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어떤 곳일까?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 온 지 대략 8개월이 넘었다. 올해 7월 싱가포르에서 우리 아파트로 이사 온 이웃이 있는데, 아이들이 같은 학교를 다니고 또래 친구들이라 가족끼리 왕래를 자주 하는 편이다. 어느 날 그 이웃집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동네가 이민자들이 정착해 모여 사는 곳인 것 알아?”
부동산 에이전트는 집을 구할 당시 이런 설명을 전혀 해주지 않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동네에는 이민자 자녀들이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언어와 학력 수준이 떨어지고, 학군지로서 매력도가 낮은 곳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알려주기 전까지 나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동네를 오가며 우리가 생각하는 여느 스위스 동네와는 좀 거리가 있는 낡은 아파트들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신축이고, 우리 가족은 꽤 만족하며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쁜 의도를 담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이 날카롭게 들렸다. “나는 스위스에 왔으면 스위스 가정 아이들과 같이 지내고 싶지 이민자 아이들이 많은 환경에서 내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 않아.” 그녀는 렌트 기간이 종료되는 대로 좀 더 스위스인들이 많이 살고, 학군이 좋은 지역으로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사와 동시에 인터내셔널 스쿨에서 퍼블릭 스쿨로 아이들의 전학을 예정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부모로서 어떤 심정으로 이야기하는지, 또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이해한다.
이내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이 낯선 환경 속에서 우리 아이가 친구를 사귀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다. 그 새로 사귄 친구가 루마니아, 알바니아, 세르비아 등에서 이민을 왔을지라도 내 아이와 함께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 안에서 아이는 또 다양한 경험을 할 테고 문제해결하는 방법을 배울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파왔다. 내 아이도 아시안이란 이유만으로 배제되고, 사람들이 꺼려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을 아닐지, 우리 아이의 무심한 행동이 불필요한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닐지를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부모로서 아이가 맞닥뜨리는 상황을 다 막아줄 수도 대신해 줄 수도 없다는 것을. 한국에서보다 더 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이곳에서 내가 아이의 환경을 모두 통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그렇다면 내 아이는 스스로 문제를 의연하고 유연하게 대처할 힘을 키워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곳이 학군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아마 당분간 우리의 이사 계획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아이를 위해 실천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진 스스로의 힘을 믿어주고, 도움이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