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폴스 Jan 20. 2020

나는 방구석 여행자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읽은 날



고등학교 졸업 이후부터 작년까지 10년동안 나는 혼자 살았다. 하노이에서 근무하는 1년 동안 친구와 함께 생활한 적은 있었지만, 온전히 내 집을 갖게된 것은 1달 남짓이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전세기때문에 집을 갖은 것이 아니라 빌렸다고 해야 맞다. 내 소유가 아닌 임시적으로 빌렸다고 해도 원룸에서 살았던 10년을 비교했을 때 지금 1달이 주는 만족감은 너무나 크다. 지금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해가 잘 든다는 것이다. 마루에 앉아 있으면 시간이 지나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어제 친구들과 점심 식사를 했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마루에 누워 책을 읽었다. 햇볕이 베란다를 넘어 마루까지 들어왔다. 여유로웠다. 이 시간에 나는 학교에서 일을 했기때문에 이런 여유를 느끼는 경험은 꽤 오랜만이었다. 


 부드러운 러그 위로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그리고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를 읽었다. 이 책에서 'armchair traveler' 즉 방구석 여행자를 이야기하는 부분이 나온다. 



 내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는다. 모호한 감정이 소설을 읽으며 명화해지 듯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명료해진다. 이런 이유로 김영하는 꼭 자신이 다녀온 것만 여행이 아니라고 말한다. 

  출처 : 김영하, 여행의 이유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 김영하가 다녀온 여행을 함께 하는지 모른다. 김영하가 상하이에서 입국금지를 받은 이후부터 말이다. 

 여름과 겨울 방학만 되면 나는 해외여행을 다녔다. 일주일에서 한달까지, 해외에 있어야 방학을 잘 보내는 것 같고 가치있다고만 생각했다. 이번 겨울방학은 유일하게 여행을 가지 않은 방학이였고, 불안했다. 그런데 어제의 2시간 남짓의 짧은 시간으로 난 여행이 주는 불안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해가 지고 햇살 대신 그늘이 진다. 김영하를 따라 다녀온 두 시간의 여행이 마무리가 된다. 이제껏 여행을 하면서 늘 채울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어제 그것을 채울 수 있다. 

 여행은 설렘이라는 감정과 불안이라는 감정과의 싸움이다. 설렘이 불안을 이긴 상태일때 여행을 떠난다. 설렘보다 불안이 커지면 여행을 포기한다. 불안을 줄여줄 여행지를 선택하거나 불안을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방법으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여행이라도 결국 불안이 설렘을 압도한다. 여행이 마무리되어갈 쯤 혹은 설렘이 사라질 때쯤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때문이다. 여행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야 할 상황(현실)에 대한 불안, 다시 현실로 돌아갔을 때 그 세계는 따라가지 못할 만큼 변하지 않았을까하는 불안, 내가 다시 그 현실에 적응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다. 

  오늘 해가 든 오후 잠깐 동안 집에서 떠난 이 여행은 설렘도 줬고, 불안감도 없애줬다. 책을 읽으며 나는 김영하를 따라 여행을 했다. 그리고 내가 편안한 우리 집 마루에 있다는 사실에서 불안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방구석 여행자가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10일 만에 돌아온 보테가 베네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