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리아, 장티푸스, 장염, 이름 모를 질병들
사무소에서 일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된다.
단기로 왔다 가는 사람도 있고 장기적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많이들 아프다. 한국에서 근무하면 젊은 사람들이 일 년에 아픈 경우가 얼마나 될지 싶다.
아프리카에서는 많이 아프다.
그동안 거쳐간 많은 사람들이 말라리아에 걸렸고, 두 번 세 번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한 번은 옆 나라에서 전문가가 다녀갔다가 한국에서 말라리아 진단을 늦게 받아 큰 일 날 뻔한 적도 있었다.
우리도 늘 말라리아에 주의하면서 살았다.
단기 전문가 파견 시에는 항상 말라리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귀국 시에는 현지 말라리아약을 손에 쥐어 주었고, 혹시나 한국에 가서 감기 기운이 있으면 말라리아 위험국가에 다녀왔으니 관련 내용을 의사에게 꼭 이야기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다행히 한국에 돌아가서 큰일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우리 아이들도 말라리아 검사를 꽤 받았다. 열이 나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에 갔고 말라리아 검사를 받았다. 아이를 꽉 붙잡고 피를 뽑는 모습은 부모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어떤 병원은 그래서 부모는 나가게 한다. 다행히 우리 아이들은 말라리아 양성 판정을 받은 적이 없었다.
장염, 장티푸스도 자주 걸린다. 장티푸스는 한국에서 예방접종을 하고 오는데 왜 자꾸 걸리는 건지 알 수 없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과 배아픔에 시달리기도 한다.
사무실 환경은 그나마 청결한 편이지만, 외부 일정시 접촉하는 환경이 깨끗하지 못한 경우도 많고
개인 생활공간의 위생이나 청결도도 한국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전기가 끊기고 물이 끊기는 상황도 자주 겪게 된다
집에 벌레도 나오고, 상하수도 시설도 품질이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살던 집에서는 늘 노래기가 잔뜩 기어 나왔다. 아내는 볼 때마다 기겁을 했고 약도 수없이 뿌렸지만 없어지지 않았다.
동그랗게 말린 노래기 사체와 느릿느릿 기어 다니는 모습을 수없이 보면서 살았다.
내가 해외에서 가장 아팠을 때는 C국이 아닌 B국에 갔을 때였다. 부임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 밤에 배가 너무 아팠다.
살면서 그렇게 배가 아팠던 적이 없었다. 배가 너무 아프니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아침에는 녹초가 되었다.
그곳에서는 그런 배앓이를 비자받는다고 표현했다. 본격적인 B국살이를 알리는 환영식 같은 의미였다. 누구나 겪는다는 거였다. 그때부터 나는 내 몸속에 과연 무엇이 들어왔다 나갔을까 생각했다.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겪지 않았을 물질들이 내 몸속에서 싸우다가 나갔고, 앞으로 내 몸에는 조금 다른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C국에서 말라리아에 한 번 걸렸다. 그 전에도 열이 날 때마다 병원에 가서 피를 뽑고 검사를 받았지만, 진짜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는 정말 달랐다. 아 이거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정말 온몸이 아팠고 말 그대로 삭신이 쑤셨다. 병원에서 확진 판정을 받고 누워서 주사를 맞으며 힘이 하나도 없었다. 3일 동안 약을 먹고 말라리아 완치 판정을 받고도 한 달 이상 온몸에 힘이 없었다. 1층에서 2층 사무실을 올라가는 계단을 오를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말라리아 후유증을 겪으면서 왜인지 모르게 고추장이 너무 땡겨서 저녁마다 밥에 고추장을 비벼서 먹었다. 말라리아는 내가 한국인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개발도상국에서 근무했던 한국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일반인보다 절대적으로 짧을 거라고 확신한다.
한국에 살았으면 겪지 않았을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겪으면서 수명이 단축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평범한 것들이 평범하지 않은 곳에서 사는 고통은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건강 염려증으로 사무소에서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회사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집에서 쉬라고.
조금만 몸이 아파도 걱정하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늘 누누이 말하고 살았다.
물론 나는 몸이 아파도 출근해야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