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 470일 차
첫째가 좋아하는 학원 오빠 (재거) 네 집에 초대받아 다녀왔다. 온 가족이 초대받은 거라 둘째도 데리고 가면서 힘들고 정신없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갔는데, 이게 웬걸. 역대급으로 편하게 있다가 왔다. 심지어 둘째도.
재거네랑 같이 사는 재거 외할머니는 브라질 분이라 영어를 아예 못 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집에 가자마자 손을 씻고 오셨다. 내가 안고 있는 둘째에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며 내게 둘째를 안아도 되냐며 허락을 구했다. 나는 잠시 안아본다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그 이후로 2시간 반 내내 둘째를 데리고 계셨다. 힘들지 않냐고 물었는데도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둘째를 보는 표정에서 사랑이 넘쳐났고, 둘째도 그걸 느꼈는지 편안한 표정으로 같이 있었다. 나중에는 폭 안겨 잠까지 들었다.
재거랑 동생도 포르투갈어를 못한다는데, 와서 아이들을 봐주고 지내고 계신 게 그래서인가 보다. (브라질은 조부모가 육아를 많이 도와준다고 했다. 재거 엄마는 내니를 많이 쓰는 미국 문화가 어색하다고.) 보고 있으면 아이를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좋아하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너무 따뜻하고 안정적으로 아이를 보셔서 감동적일 지경이었다. 내가 뉴욕에서 일을 한다면 어떻게든 이 할머니께 아이 돌봄을 부탁드렸을 것 같다.
그 감동의 여운은 오래갔다. 둘째가 자다가 깨서 한참 우는데, 먼저 아이를 안아 든 남편은 ‘언제까지 우나 보자’하고 화가 난 상태였다. 평소였음 나도 피곤하고 손목과 어깨도 아프니 그래도 좀 두고 봤을 텐데 오늘은 얼른 넘겨받았다. 아이가 조금 버둥거리다 폭 안겼는데 그 기분이 너무 따스하고 좋아서 내내 안고 재우고 싶었다. 평소엔 아무리 예뻐도 그런 생각 잘 안 드는데 ㅎㅎ 진짜 좋은 영향을 많이 받고 왔다. 감사하다.
브라질 문화 경험은 재밌었다. 재거 아빠 말로는 브라질이 중남미에서 가장 다양성이 높은 사회라고 했다. 재거 엄마가 보여주는 브라질 각지의 사진을 봐도 그랬고. 오늘 저녁에 먹은 음식도 퓨전 음식이었다. 브라질식 스트로가노프라고 했는데, 원래 스트로가노프는 대표적인 러시아 요리로 소고기 사워크림 스튜인데 여기에 브라질 고춧가루와 토마토, 엄청난 양의 마늘 등을 넣어 끓여냈다.
정식 스트로가노프는 내 입맛에는 약간 느끼한데 (아주 느끼한 소고기 크림 파스타 맛이다.) 매콤하고 새콤한 맛이 들어가 우리 입맛에도 잘 맞았다. 브라질은 다양성이 높아 외국 음식이 많이 들어왔는데, 그걸 다 브라질식으로 재 해석해서 먹는다고 했다.
재거 엄마 아빠는 대화를 하면 할수록 약간 히피 느낌이 있다. 아빠는 미디어 쪽 일을 하기도 하고. 우리와는 성향도 반대고 살던 곳도 지구 정반대인데 이렇게 인연이 생기는 게 희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