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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Dec 28. 2021

간절함을 응원할게

[광화문덕 X 월간에세이] 고민이 깊어지는 만큼 바람도 매서워지는 어느날

시끌벅적한 광화문 인근 카페 안. 습관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눈길이 머문 곳. 검은색 코트, 하얀색 브라우스, 검정 바지, 검정 구두. 작고 아담한 손에 움켜쥔 작은 쪽지. 쪽지엔 검정색 펜이 새겨놓은 글자들이 빼곡하다.


20대 초반쯤 되어 보였을까. 미세하기 떨리는 눈동자를 달래듯 눈꺼풀은 연신 깜박깜박거리고, 얇은 입술로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아.... 요새 신입 채용 시기구나'


그렇고 보니 얼마 전 바쁜 걸음으로 지나가는 인사팀 차장님이 내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채용시작해서 업무 관련 회의는 다음에 할 수 있냐고.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직장동료와 커피 한 잔을 마시러 들어온 카페지만, 내 온 신경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면접을 준비하고 있는 그녀에게 쏠렸다.


동료가 가져다준 커피 한 모금을 조심스럽게 입안으로 흘려보낸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아메리카노 향이 콧속을 자극하고, 따뜻하면서도 짙은 탄 맛이 입안 가득 번진다. 그리고 뇌는 머릿속 한구석에 담아두었던 20대 수험생 시절의 나를 찾아냈다.


'벌써 15년이나 됐구나... 수험생 시절이었던 게...'


"학생 소화제가 중요한 게 아니야 잠을 좀 자야지 커피를 마셔서 위 기능이 약해진 거야. 커피를 줄여! 자꾸 약 사먹으러 오지 말고"


커피를 하루 10잔을 마셨던 때가 있었다. 밥은 굶어도 믹스커피는 입에 달고 살았다. 돈이 없으니 비싼 커피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저 내게 커피는 믹스커피가 짱이었다. 독서실 내 사물함에는 이러저러한 항상 커피믹스가 통째로 놓여져 있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난 신경성소화불량을 달고 산다. 그때에도 그랬다. 믹스커피만 마시면 소화불량에 걸리곤 했다. 그 덕택(?)에 단골약국이 생겼고 약사님은 내게 호통치시곤 하셨다. '수면부족->커피믹스->소화불량->약국방문'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려 말이다.


대학 졸업을 앞둔 당시 모든 게 불확실하고 암흑같았다. 취업도 미래도... 내가 사회에 나가서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을지,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수준의 일을 잘 처리해낼 수 있을지... 너무도 불안하고 두렵던 때였다.


취직만 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취직만 할 수 있다면 간 쓸개 모두 꺼내보일 수 있을만큼 간절했었다.


내 '두개의 심장'과 '지치지 않는 열정'을 받아주는 곳을 위해서라면 내 전부를 걸겠다고 다짐하며...


'취직 그 자체가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마음을 난 요새 너무 잊고 살았구나...'


인턴을 하며 생전 처음 받아든 명함을 보며 한참을 바라봤던 그때... 수많은 마음들이 내 몸을 휘감아 전율을 일으켰던 그때...가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은 사라지고, 부조리 부당함 사내정치에 대한 피로감 등으로 불평불만만 가득한 내가 되어 있다. 불평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부터는 투덜이가 되어버렸다.


'지금은 직장생활을 하며 조직의 나쁜 모습만을 탓하고 있었구나... 사실 어딜가나 완벽한 조직은 없는데...'


사실 요새 나뿐만 아니라 주변도 고민이 많은 듯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도전에 대한 두려움은 증폭되다 보니 꿈을 좇기보다 안정을 택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이다.


혼자일 때야 실패하면 툭툭 털고 일어나면 됐지만, 40대가 지나 50대로 향하는 지금은 가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해서다. 아이가 결핍 없이 자랄 수 있도록 안정적인 수입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하루하루 어깨를 짓누른다.


"과장님 저는 잘살고 있는 걸까요? 요새 안 그래도 삶이 팍팍한데 같이 꿈꾸며 살던 분들마저 하나둘씩 떠나니 마음이 아프네요"


앞에 마주 앉은 과장님은 갑작스러운 묵직한 질문에 당황한 듯 보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그냥 이제 저도 43살이 되고 있네요. 42과 43이 주는 심적 무게감이 큰 가봐요. 아무것도 이뤄놓은 것은 없는데 벌써 40대 중반이 된 것 같은 허탈함이랄까... 팔춘기가 왔나봐요"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넵 편히 다녀오세요"


직장 동료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문득 기자 시절 함께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부딪히며 치열하게 살아가자고 의기투합했던 후배가 그리워 전화를 걸었다. 후배도 이제는 가정을 꾸리고 있는 가장이 됐고 그 역시 어느덧 40이 됐다.


"잘 지내니? 요놈 연락도 뜸하고! 요새는 어떻게 지내?"


"선배 전 그냥 이제는 직장인이죠모"


쓸쓸함과 씁쓸함이 강하게 묻어나왔다. 쓰디쓴 커피처럼.


저음으로 귓속에 툭 하고 던져지는 무뎌진 단어들에 기분이 더 쓸쓸해졌다. 더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전화기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래 건강하면 좋은 거지. 그게 제일 중요한 거지. 마음 건강 잘 챙기고 조만간 보자"


무언가를 도전해야만 살아있는 것이라고 믿었던 30대를 보내서일까...


40대가 되고 나서 느끼는 감정 중 대부분은 공허함이다. 무언가를 이뤄냈다는 성취감보다 내 삶의 하루를 무의미하게 잃고 있다는 상실감이랄까...


하루하루를 보다 의미 있게 살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아침 운동을 6개월 동안 해보기도 했다... 안드로이드 앱을 만들어보겠다고 한 달 동안 매일 새벽 3시반까지 코딩하며 살아보기도 했다. 머신러닝과 딥러닝을 공부해보겠다며 파이선을 시작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허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 같이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고... 이를 위해 작지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보겠다는 원대하고도 추상적인 목표를 세웠지만... 지금 나의 위치와 모습이 너무도 보잘것없이 느껴진다... 공허함이 몰려온다.


광화문덕이라고 부캐명을 적은 것도 삶의 대부분을 광화문 인근에서 보내고 있어 광화문에서 덕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바람인데... 그 바람은 간절히 바라는 바람이 아닌 스쳐 가는 바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오늘따라 아메리카노 향과 맛이 더 쓰디쓰게 느껴진다.


이제 막 세상으로 나와 꿈을 꾸기 시작하며 새로운 주인공의 탄생 그리고 그의 도전기로 가득할 페이지들... 지금 건너편 테이블 앞에서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가 만들어나갈 한편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 역시 내 나이가 되면 또다시 꿈꾸는 눈빛으로 가득한 20대를 보며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때쯤이면 난 60대가 되어 있겠구나... 그때 나의 페이지에는 어떤 이야기를 써가고 있을까? 그리고 나의 40대와 50대의 이야기는 어떤 전개로 펼쳐질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 머지않은 미래. 눈만 감았다 뜬 것 같은데도 과거가 되어 속절없이 사라지듯 순삭되는 내 40대...


다시 20대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란 부질없는 질문을 내게 해본다. 하지만 난 지금까지 선택의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 선택해왔기에 후회는 없다.


이제 면접 시간이 왔나보다. 그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난다. 꿈이 가득한 눈빛. 순수한 눈빛이다. 속으로 기도했다.


'간절함을 응원할게'


고민이 깊어지는 만큼 바람도 매서워지는 겨울 어느날 광화문덕 드림
월간에세이 1월호에 실린 글이에요

소중한 지면에 제 글이 실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김신영 편집장님께 감사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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