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광화문덕 Apr 19. 2020

나에게 맞는 자린 어딜까

승진이 중요하다 생각한 건 오만이었을지 몰라

오늘 저녁 약속 있어?

친한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얼마 전 새로운 부서 발령이 나서 얼굴 본지가 좀 되긴 했다. 반가운 마음도 있었지만 대뜸 저녁에 밥 먹자고 묻는 선배에게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 흔쾌히 "저녁에 봐요"라고 답했다.


선배는 내게 은인 같은 분이기도 하다. 지난해 어둠 속을 헤맬 때 내게 큰 힘이 돼 줬던 선배다. 점심을 먹자고 하면 언제든 시간을 내주었고, 저녁을 먹자고 하면 그 또한 마다하지 않았다. 선배도 바쁠 텐데 늘 내게는 귀한 시간을 할애해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 역시 선배의 저녁 벙개에 흔쾌히 응했다.

저녁 뭐가 좋으세요?

말은 이래 물었지만 난 알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선배가 나보다 빠르게 저녁 값을 지불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오늘은 선배 새로운 부서 발령 건도 있으니 내가 한 끼 모셔야겠다고 다짐했다. 좀 더 재빠르게 움직여야겠다고 말이다.

족발 어때?

선배는 이미 메뉴를 정하신 듯했다. 선배의 저녁 식사 선택을 듣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족발을 먹어본 지가 꽤 오래전이다. 1년은 넘은 듯하다.


"선배 좋아요. 그럼 근처 족발집 좀 찾아볼게요"


그리고 검색하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광화문 인근에 족발집은 크게 두 가지 부류였다. '오향족발'과 '족발과 보쌈'을 하는 집이다.


족발

사실 늘 먹어왔던 음식이지만, 이제는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해서 제대로 좀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외국 술인 와인은 그토록 먹으면서 역사와 맛과 향에 대해서 논하려고 했으면서 정작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해서는 무지했음에 부끄러워져서다.


족발에 대해 살펴보니 돼지의 다리를 양념한 국물에 푹 삶아낸 뒤에 썰어낸 것을 말한다.


족발과 비슷한 요리로, 내 주변에서 언젠가부터 자주 듣게 되는 요리인 슈바인스학세(Schweinshaxe)가 있다. 독일 요리인데, 족발을 삶은 뒤에 오븐에서 구운 통다리 요리다. 족발과 차이점이 있다면 슈바인스학세는 직접 잘라먹는 요리여서 칼집을 낸 상태로 나온다고 한다.  

출처: 위키백과

사실 주변에서 슈바인스학세라고 하여 몇 번 듣기는 했으나 실제로 먹으러 간 적은 아직 없다. 족발도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 먹으러 가는데 슈바인스학세를 먹으러 찾으러 갈 만큼 내게 음식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어서다. 내겐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하지, 어떤 걸 먹느냐는 솔직히 중요하진 않아서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족발은 앞다리일까 뒷다리일까

돼지의 뒷다리는 퍽퍽해 기름기가 많은 앞다리가 족발에 선호된다고 한다. 족발 가게에서 '앞다리'를 마케팅 포인트로 하는 곳이 있다면 이런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리라. 검색해보니 앞다리와 뒷다리의 가격을 차별화해서 파는 곳도 있다고 한다. 참고하시길.


족발의 유래

나무 위키에 정리된 족발의 유래 대해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돼지 발은 고대부터 먹었다. 우리나라에서 돼지 발이라는 단어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첫 언급됐는데, 강원도 인제군의 고구려 시절 지명인 '저족현(猪足縣)'이다. 왜 지명에 족발이란 글자를 사용했는지는 지금은 알 수 없다고 하는데, 현재로서는 우리나라 역사의 최초 기록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가 먹는 족발이란 음식은 서울 장충동에서 처음 시작됐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라고 한다.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대거 서울로 유입됐는데, 이들이 생계를 위해 음식장사를 했고 이때 돼지다리를 삶아 판 것이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런 설명도 있다. 중국식 장육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한국화 되는 과정에서 향이 약해지기는 했으나 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식의 강한 팔각 향이 나는 족발이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족발의 색 역시  검은색이 진한 중국식 간장인 노두유 때문이라고 한다.

오향족발 vs 족발

사실 족발을 먹으려고 검색해 보면 오향족발과 족발로 대략 이름이 갈린다. 오향족발은 오향이 들어간 족발일 테니 뭔가 더 고급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찾아봤다.


여기서 오향이란 팔각, 계피, 화자오, 정향, 회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오향으로 양념한 족발이라 하여 오향족발이라 명명한 것이다. 오향족발은 쌈이나 쌈장이 같이 제공되지 않고 마늘 소스와 양배추가 같이 나오는 것이 족발과 다르다고 한다. 중국식으로 보면 오향장육, 동파육의 변형으로 정도라고.


텅 빈 거리

광화문, 시청 인근에는 오향족발을 비롯해 수많은 족발집이 있어 장소를 특정하지 못했다. 다만 선배의 퇴근 동선을 고려해 시청역에서 보기로 했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보니 저녁 식사 장소에는 대부분 빈자리가 많기 마련이다. 심지어 텅 빈 가게에 나 홀로 식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정도로 요새 경기는 그야말로 심각한 수준이다.

오목집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시청역 7번 출구 앞이라고 하니 잠시 후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과 '무슨 일 있으신가'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허기진 배를 잡고 시청역 골목으로 들어가니 눈 앞에 족발집이 하나 보였다. 바로 '오목집'.


오목집은 프랜차이즈다. 사실 되도록이면 프랜차이즈보다는 소상공인 분들의 가게를 주로 찾으려고 하는데 이날은 족발에 대한 무지와 가장 먼저 보인 곳으로 들어가기로 하다 보니 이곳으로 들어가게 됐다.


사실 오목집은 예전 기자 시절 회사 앞 지하에 있던 가게여서 자주 갔었다. 이제는 기업인이 됐지만 '오목집'이란 이름을 보면 그때가 떠올라 아련해진다. 물론 당시 기억이 꼭 좋다고는 할 수 없다. 당시에는 끔찍했던 기억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미화된다고 하지 않는가...


목동에서 느꼈던 인테리어는 그대로다. 뭔가 막걸릿집을 연상케 하는 그런 분위기라고 할까. 테이블의 간격은 충분히 떨어져 있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최대한 구석에 앉아 '반반'을 시켰다. 그리고 소주를 시켰다.

이미지 출처 : http://omokjib.co.kr/
형님
무슨 일 있으신 거 아니죠?

우린 소주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지난 안부를 물으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공기 중으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최근 몇 년간 승진에 미끄러진 형에 대해서 얘기가 나왔다.


"형진형 승진하셔야 하는데..."


하지만 형님의 생각이 조금 달랐다. 50세가 넘으면 무조건 승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곳에서 정년까지 버티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버틴다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의 무능함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다. 사회란 곳은 진급이라는 것을 놓고 경쟁하도록 되어 있다. 지금 내 나이 41살에는 진급이 전부로 보일 수 있으나, 50세가 지나면 진급이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가치를 조직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다. 정년퇴직, 구조조정 대상이 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조직에서 그동안 쌓아온 자신만의 경쟁력을 토대로 조직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여러 해 동안의 노력이나 경험으로 체득한 것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연륜'이라고 부른다. 이는 대체할 수 없다. 오랜 경험에서 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형진 형은 지금 있는 곳보다는 현장업무를 보시는 게 더 나으실 거야"


사실 형진 형은 본사에 있다. 본사에서 전략업무를 하고 있는데 요새는 늘 한계에 부딪힌다고 내게 푸념하곤 했다. 사실 그럴 것도 그럴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은 함께 성장하고 해야 하는데...

내게 맞는 자리는 어디일까?

어느새 시간은 2시간 여가 지났고 소주는 3병을 지나 4병째 시키고 있다. 형님이 잠시 화장실 간 사이 계산대로 가서 중간 정산을 하려고 하니 이미 형님이 하셨단다. 오늘도 난 선수를 빼앗겼다. 오늘도 형님은 나보다 빠르셨다. 늘 매번 형님은 나보다 발 빠르게 움직이신다. 저녁자리에서 마저도...


그렇게 형님과 간단히(?) 저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생각이 많아졌다. 승진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내게 숙제를 받은 느낌이다. 50세가 되기 전에 풀어야 할 인생의 과제랄까.


'난 어디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내가 있어야 하는 자리는 어디일까'


기자였다가 지금은 기업인이 됐다. 어떤 이는 내게 기자 시절로 돌아갈 생각이 없냐고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기자가 가슴 뛰고 좋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 기업인이 되고 난 후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더 넓어졌다고 할까. 그 당시에 보지 못했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은 매 순간 깨닫고 알아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앞날은 어떤 모습일까. 난 또 어디에 가 있을까... 10년 후에 난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집이다. 고민이 많아지는 밤이다.......


저 멀리 보이는 외롭게 빛나는 빨간 십자가를 보며 되뇌었다.


'내게 맞는 자리는 어딘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