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 이대로 끝나지 않으려면

조금씩, 천천히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by 광화문덕

〈희영〉

글을 다시 쓰기로 마음먹은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어느 밤,
아이들을 재우고
설거지를 끝낸 뒤
거실 구석 작은 테이블에
자연스럽게 앉게 되었을 뿐.


노트북을 켜고
새 문서를 열었다.
하얀 화면 앞에서
한참을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그 침묵마저도 괜찮았다.
‘쓰지 못하는 나’도
‘다시 쓰고 싶은 나’도
함께 그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까.


조금씩, 천천히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엄마라는 이름에 가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부르지 않았을까.
이제는, 내 이름으로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


서툰 첫 문장.
그러나 희영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이 글이 어디로 가든,
누가 읽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히 느꼈다.


나는 다시,
‘나’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후〉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코워킹 스페이스를 찾았다.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이 모인 공간.


별다른 기대 없이
그저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하는 마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모니터 너머로 오가는 사람들의 눈빛이
이상하리만큼 익숙했다.
그 익숙함은
한때 자신이 지녔던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만이 갖는 빛이었다.


“당신이 일하고 싶은 미래는 어떤 모습입니까?”


안내 브로슈어의 문구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리고
잊고 있던 오래된 아이디어가
불쑥 떠올랐다.


회사 다닐 때 막연히 생각만 하던
프리랜서 커뮤니티 플랫폼.
상호 피드백, 경험 공유,
간단한 수익화 구조까지.


‘다시 한 번, 꺼내봐도 될까?’


지후는 휴대폰 메모장에
단어들을 하나씩 적어내려갔다.
한 줄, 두 줄,
손끝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 감각,
오직 “기대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태석〉

강연 요청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사내 후배가 연락을 해왔다.


“상무님, 저희 대학 커뮤니티에서
실무자 특강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일에 지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듣고 싶어해요.”


처음엔 망설였다.
스스로 멋진 어른도,
누군가의 롤모델도 아니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도
이메일을 닫지 못했다.


조용히,
자신의 이름으로 새 문서를 연다.


제목: “이대로 끝나지 않으려면”


문장 위에 손을 얹는 순간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
세 사람은 단톡방에 차례로 메시지를 남겼다.


희영:
“오늘 글을 다시 썼어요.
짧지만, 제 이름으로요.”


지후:
“아이디어 정리했어요.
아직 이름도 없지만,
뭐라도 시작해보려고요.”


태석:
“강연 수락했습니다.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살아 있는 느낌이에요.”


휴대폰 화면 위에
서로의 말들이 하나씩 쌓여갔다.


조금씩,
서로가 서로의 새로운 시작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이대로 끝나지 않기 위해
다시, 조금씩
살아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