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기자의 기본, '공시'를 배우다
너 주식은 좀 하느냐?
출근 후 며칠이 지났다. 오늘은 공시 당직 선배 앞에 앉아있다. 공시 당직자 보조다. 공시 처리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다. 여기서 말하는 공시는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http://m.dart.fss.or.kr/)에서 쏟아지는 공시를 말한다.
※ 공시의 사전적 의미
(공공 기관이 일정한 사항을) 공개적으로 게시하여 일반에게 널리 알리는 것.
거의 10년 만에 증권사 HTS(홈트레이딩 시스템)를 노트북에 설치했다. 설치가 다 되길 기다리며 난 추억 속 여행을 떠났다.
집에서 주식매매가 된다고?
1999년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대학교 1학년이었다. 컴맹으로 컴퓨터 공학과를 입학해서 컴퓨터에 대한 두려움을 깨기 위해 여기저기 IT자가 들어간 박람회, 콘퍼런스, 랩 등을 찾아다녔다. 코엑스에서 IT 박람회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람회를 가면 업체들이 선물을 많이 줬다. 게임 시디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그 때 받았던 것 중에 하나가 HTS CD였다.
당시는 현대증권에서 'BUY 코리아' 열풍을 일으키고 있을 때였다. 많은 어르신이 주식으로 돈을 불리고 있을 때로 알고 있다. 우리 아버지도 주식으로 돈을 불리기에 동참하고 계셨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돈을 불리지는 못했다. 늘 마이너스였다. 힘들게 버신 돈이었는데...
매일 아침이면 아버지는 집 근처 증권 창구로 마실을 다니셨다. 거기에 가야 주식을 사고, 팔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아버지에게 IT 박람회에서 받아온 HTS CD는 획기적이었다. 애플과 같은 혁명이었다.
HTS를 깔아드렸다. 부모님은 신기해하셨다. 아버지는 내게 주식을 해보라고 하셨다.
군대 가기 전까지 2~3개월 동안 주식의 '주'자도 모르던 나는 초단타를 치기 시작했다. 200원 오르면 팔고 내려가면 다시 사기를 반복했다. 수백, 수천 건의 거래를 했다. 내 계산으로는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고 생각했다.
그해 11월 난 군대에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2주차를 맞이할 즈음... 아버지가 보내주신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은....
"수수료가 엄청 나왔네.
마이너스야..."
맞았다. 거래 수수료를 생각하지 못하고 초단타를 친 것이다. 번 돈보다 수수료가 더 많다 보니 손해가 누적된 것이다. 당시 200만 원 정도 손실이라고 들은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까지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 아버지가 힘들게 번 돈을 내 무지함으로 날렸으니 말이다...
이것만 보면 되는구먼...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 설치 후 너무 복잡한 메뉴에 또다시 머리가 아파져 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놔 이거 내가 할 수는 있는 걸까'라고... 사실 HTS를 설치한 건 그 많은 메뉴를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로지 쏟아지는 공시를 가장 효율적으로 볼 수 있는 공시 창만 보면 됐다. 그렇지 않으면 금감원 공시 사이트를 초 단위로 무한 클릭해야 했다.
흔히 경제 속보를 쓰는 매체들은 공시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투자자들에게 공시란 시장의 기대나 우려를 확인해주는 중요한 창구이기 때문이다. 주요 경영상황에 대해서 무조건 투자자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래서 주식투자를 하려면 공시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기자도 마찬가지다.
실례로 보통 합병한다거나 외국에서 큰 사업권을 따왔다고 소문이 돌면 주가가 출렁인다. 이 경우 조회공시 요구가 들어간다.
생각해봐라. 어디선가 호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주식을 샀다. 한창 오르고 있다가 갑자기 하한가로 돌아섰다. 이런 경우는 작전 세력에게 낚인 경우일 거다. 아마도...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왜 이럴까 하고. 누군가 조회공시를 요구했고, '사실무근' 즉, 거짓부렁 소문으로 확인됐다. 낚인 거다.... 반대로 아무 생각 없이 차트 보고 괜찮다 싶어 주식을 샀는데 갑자기 상한가를 치기 시작했다. 이 경우에도 조회공시 요구가 들어간다. 알고 보니 호재가 있었다. 투자 유치 등 말이다.
이처럼 조회공시가 들어가면 해당 회사의 입장이 나온다. '사실무근'이라든지 '진행 중', 또는 '검토 중'이라는 내용을 공시하게 돼 있다. 반드시 답변해야 하는 의무 사항이고 거짓 공시를 하면 제재를 받는다. 검토 중이라는 것은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위의 내용이 어렵다면 그냥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아무튼, 공시는 투자자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한 정보다. 특히 개미들에게는... 그래서 경제 매체 기자들에게 공시는 기본이다.
■조회공시란?
증권의 공정한 거래와 투자자 보호를 위하여 기업의 주요 경영사항 또는 그에 준하는 사항에 관한 풍문 또는 보도(풍문 등)의 사실여부나 당해 기업이 발행한 주권 등의 가격이나 거래량에 현저한 변동(시황)이 있는 경우 거래소가 상장법인에게 중요한 정보의 유무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고 당해 기업은 이에 응하여 공시하도록 하는 제도.
어쩌라는 건지...
공시처리는 단순 업무다. 요즘은 공시 속보를 프로그램화시켜서 자동으로 처리하게 하는 곳도 있다. 공시의 관건은 속도이니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게 맞다. 가까운 미래에는 기계가 처리하고 있을 것이다.
공시 유형별로 '틀'이 있는데 내가 적을 두었던 회사에는 그 틀을 적어놓은 스타일북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선배들이 이전에 처리했던 기사를 찾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처리하는 구조였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다. 선배마다 공시를 처리하는 틀이 다 달랐다. 큰 틀에서는 비슷하지만 디테일함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공시 당직자는 매일 바뀌었다. 난 매일 다른 선배한테 공시를 다시 배웠다. A선배가 얘기해준 그대로 했는데 B선배는 뭐라 했다. B선배한테 배운 대로 C선배한테 하면 또 혼났다.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거리 인생이 됐다. 정말 그 때 이 말이 하고 싶었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지금 생각하면 수습이니 그냥 까인 것 같다...
헉...
단위가 억 원이었네....
큰 일이다. 오보를 냈다. 해외에서 수조 원의 사업권을 따냈다는 공시인데 수천만 원으로 내보냈다. 공시는 속도가 중요해 데스킹을 볼 시간은 없다. 일단 쏘고 틀리면 정정하는 구조였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HTS 뉴스 속보를 살펴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여기저기 오보가 속출했다.
이런 구조다. 초짜 공시 담당자들은 자신이 없어서 누군가 먼저 써주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누군가 간 크게 오보를 당당하게 쏘면 긴가민가했던 이들도 덩달아 오보를 낸다. 언론사는 달라도 공시를 쓰는 기사 유형은 거의 같다. 양심선언을 하자면... 가끔 귀찮을 때는 다른 곳에서 먼저 공시 기사가 나오길 기다렸다가 그대로 베껴 쓰기도 했다.
올해 한국은행에 출입할 때였다. 통신사가 오보를 내면 대부분의 언론사가 같은 오보가 났다. 내가 제대로 쓰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았다. 혹시 시간 나면 검색을 해보시라. 통신사 오보나 오·탈자가 그대로 베껴 쓰기라도 한 듯 기사가 나온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오보를 냈으니 정정 기사를 내야 했다. 투자자들에게 혼란을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했다. 다행히 정정 기사 틀은 있었다. 이것 역시 문서가 아닌 선배들의 기사 형태였다... 부끄럽지만 정정은 그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했다. 그때마다 매우 혼났다...
우하하하
이번에도 내가 1빠다
공시 시스템 틀이 나름 손에 익어갈 즈음 지루함이 다가왔다. 그때부터 고안해 낸 것은 자칭 '1빠 놀이'였다. 경쟁자는 보이지 않는 다른 언론사 공시 담당자들. 난 그들과 누가 가장 빨리 공시를 처리하는지 내기라도 한 것처럼 미친 듯이 키보드를 쳐댔다. 키보드 워리어라도 된 듯... 그리고 기뻐하며 외쳤다. "아싸 내 기사가 가장 빨리 HTS 속보 창에 꽂혔다!"
난 그렇게 경제 기자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갔다... 나만의 방식으로...
다음 주에 계속
에필로그
이번 편은 꽤 어려운 용어들이 사용됐습니다. 하지만 알아두면 유용한 용어들이라서 주석도 달아놨습니다. 글도 길어서 지루할까 봐 중간중간에 추억담도 풀어봤습니다...
글은 쉬워야 하고 잘 읽혀야 한다고 생각하며 퇴고를 수차례 했는데 독자분들께는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쉽고 잘 읽히는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하겠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경제를 몰라도 경제 기자를 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이죠. 전 되묻고 싶습니다. "그럼 정치, 사회에 대해서는 잘 아시나요?"라고 말이죠.
그런 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학에 진학할 때 전공을 모르고 입학하는 이들이 대다수입니다. 기자도 입사하고 배우면 됩니다.
학교 다닐 때 글 좀 써봤다는 이들도 입사하고 나면 엄청난 시련을 겪습니다. 기사는 리포트도 아니고 소설도 아닙니다. 기사란 틀이 정해져 있는데 이 틀을 모르면 아무리 필력이 뛰어나도 박살이 나게 돼 있습니다. 필력은 기사 틀이 몸에 익은 다음에 발휘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