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존 Jun 20. 2024

너는 그냥 엄마 빈젖만 빨았어

닮은듯 아닌듯한 나와 딸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은 대전의 대사동이라는 동네의 아담한 한옥이다. 우리 둘째 큰아버지께서 분가하시며 지은 집으로 지금도 세월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도 결혼을 해 한 해 가량을 시골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지내다가, 내가 생길 때쯤에 분가를 하시어 둘째 큰아버지 댁의, 방 하나를 얻어 신접살림을 시작하셨다. 아버지와 둘째 큰아버지는 자그마치 스물 세 살의 터울로, 둘째 큰아버지가 군대에서 휴가를 나오셨을 때 우리 아버지가 태어난 것을 보고 그렇게 기가 차 하셨단다. 평생 땅을 이고 지고 사는 농민의 팔자로 늘그막까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그 시절 당신들의 삶인지라.


 하여, 둘째 큰아버지와 3년 가량을 더 살고서 우리집은 다시 분가를 하였는데, 그때까지를 나는 20살에서 15살까지의 터울이 나는 네 사촌 형 누나들, 그리고 두살 터울의 우리 누나에 둘러싸야 자랐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대가족 구성으로서 나의 어린 시절은 시작되었다. 예쁘긴, 좀 어지간히 에뻤을까. 막내집의 막내, 그것도 아들네미였으니 아마도 어린 시절의 나는 울지 않아도 기저귀가 시시각각 갈아졌으며, 떼를 쓰지 않아도 배가 채워졌을게다.


 그래서, 나의 유아 시절은 "너는 그냥 엄마 빈젖만 빨았어."라는 엄마의 한 마디로 정리되곤 했다. 원래부터도 순하게 태어난 아이가 부모와 형누나들의 보살핌도 듬뿍 자랐으니, 우는 일도 떼를 쓰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어디 내려놓아도 눕혀놓아도 그냥 애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조용했다. 그런 성격이 크면서도 대강 유지되었다. 짜면 짠대로 싱거우면 싱거운대로 먹고,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살았다. 나는 부모님께, 나의 감정의 풍요와 결핍 양쪽 모두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다.


 그러던 내가, 애를 낳아서 길러보니 비로소 그 말엔 보다 깊은 엄마의 여러 고민이 담겨있단 것이, 서서히 뉘어쳐지곤 한다.


"엄마 내가 애를 키워보니까, 빈젖만 빨았다던 게 얌전하단 뜻이 아니구만. 나 밥 안먹었었지?"

"으응. 원래 젖 먹던 애들은 밥 안먹어~."

"그러니까 내가 살 찌는 걸 좋아했구만."

"그래도 너는 너무 살이 쪘었지. 살이 다 터지게 그게 뭐니."


 오랜만에 부모님과 저녁을 먹던 자리에서, 나는 궁금하던 것을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를 기르기 전엔 몰랐는데, 나는 밥도 과자도 거부하고 엄마 품에 파고 들던 업둥아기였나보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나는 빼빼말라, 사진을 봐도 서너살에 얼굴이 벌써 뾰족하니 젖살이 빠져있었다. 떼를 쓰질 않으니, 배가 고프다고 울지도 않았더란다. 굶으면 굶는대로 엄마 빈젖만 빨면 장땡이었던 게다.


 내가 어린 시절 밥을 잘 먹지 않던 것이 엄마는 굉장히 스트레스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살이 확 찌기 전까지 늘 내가 말라 걱정이라는 엄마의 한숨 소리가 들리곤 했고, 내가 그 해부터 폭풍처럼 살이 찌자, 부모님이 흐뭇하게 기뻐하시던 정경이 눈에 선하다. 게다가 뭘 먹지 않아도 키는 컸으니, 어딜 데리고 다녀도 흐뭇하셨을 터. 공부를 썩 잘하지 못해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서야 구구단을 다 외운 것이나, 말 더듬이가 심했던 것을 빼면 말이다. 난 하루 종일 앉아서 책만 보던, 공부는 그닥 관심이 없던 아이였던 탓이다.

 - 하여, 오늘도 쉬질 않고 뛰어다니는 딸을 보며, 누굴 닮았나, 곰곰이 생각을 한다. 나는 누가 와서 꼬집기라도 하지 않으면 우는 일이 없는 아이였는데 우리 따님은, 신생아 때부터 센서란 센서는 모두 장착하고 나와서, 엄마와 아빠의 밤을 꼴딱 새게 만드는 일이 다반사였다. 유당불내증으로 배앓이를 해서 분유를 두번이나 바꾸어 겨우 조금 달랬다. 분유를 그렇게 먹더라니 33개월을 향해가는 지금까지도, 밥보단 우유가 더 좋단다. 그것이 모든 집과 같은 나의 심각한 고민이다. 기분파처럼 뭘 먹는다 하더니 차려주면 한 입을 살짝 기미만 보시고 휙 하고 달려나가 침대에 눕는다. 이유식에서 일반식으로 넘어올 시기부터, 자아가 생기고 먹는 것을 가리는, 내가 업마의 빈젖을 찾던 딱 그 때와 같은 시기 때부터, 이 아이는 밥은 됐고 우유를 달라고 했다. 그렇게 버려진 밥이 부지기수. 그나마 나는 그거 아까워서 먹기라도 하지. 아내는 탁 하고 싱크대로 넘겨, 나의 속을 썩게 한다.


 내가 어릴 때 밥도 안먹고 빼빼마른 걸 보던 엄마의 마음이 어땠는지. 왜 엄마는 평생 그 마음을 빈젖 이야기로 남겼는지 이해가 된다. 밥을 안 먹는 자식새끼가, 이렇게 얄밉구나. 그러나 한편으로, 그 빼빼마르던 아이가 지금은 90kg을 넘는 거구에 평생 병원 신세도 져 본 적이 없으니. 나는 어릴 때 입맛투정이 그리 큰 걱정은 아니라는 결론에도 도달해 있다. 그래, 먹기 싫으면 말거라. 알아서 크겠지. 그래도 크겠지. 그 말을 입증하듯 뭘 딱히 챙겨먹이는 것도 없는데 세상 팔팔하게만 자라난다. 눕혀놓으면 그리 떼를 쓰더라니, 진짜로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쉬지 않고 놀고 떠든다. 그러니까 나는, 나와 아내의 아기 때와는 품성 적으로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이 아이를 보며 누굴 닮았는가 때때로 어리둥절해함과 동시에, 그래도 나를 닮았으니 알아서 크겠지. 이런 우스꽝스럽고 이기적이기까지 한 생각도 하는 것이다.


“생선-.”


 어제는 제멋대로 아침 밥상에 비척비척 다가와 앉는다. 내가고등어와 두부부침을 접시에 담고 있을 때였다.


“여보여보, 얼른 애 꺼 밥 퍼.”

“응.“


 나는 다급하게 아내에게 말하고 아이의 밥그릇을 꺼낸다. 침대에 누워 뽀로로를 보다가 들기름에 구워진 그윽한 고등어의 향에 이끌려나온 것이겠구나. 기뻐하며, 얼른 고등어 조각을 떼어내 후후 불어 아이의 입에 넣어준다.


 그러나,


“지마안(그만)-.”

“어?”


 세 숟가락째였다. 따님은, 고등어구이와 잡곡밥을 세번 먹어삼키더니만, 식탁을 손으로 슥 밀어내며 내 무릎에서 빠져나간다. 그러니까 늘 이런 식. 배가 고프면 와서 기미를 하시고, 어떤 맛인지는 알았으니, 한 두입 허기만 달래고 간다. 얄미워. 


 아이의 변덕스러운 식성을 겪고나서야 나는 엄마의 그 말을 알아차렸다. 엄마로선, 날 규정하는 한 마디 문장에 대해 내가 수십년만에 보다 깨우쳐진 답안지를 제출한 셈이다. 그래도 내가, 애를 낳고서 더 나은 사람이 되었고, 그만큼 엄마와 아버지에게 다가서고 있다는 뜻이겠지. 아이를 낳아 길러보지 않았다면 평생 나는 엄마의 그 말뜻을 몰랐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도, 아이도, 시간이 지나면 나이를 먹어가며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많은 엄마의 말들을 해석하게 되면서, 나 나름의 규정들로 아이를 설명하게 될 것이다. 짙은 빛깔의 살결을 타고 난 네가, 수백년 농사를 지어 온 아빠의 집안 내력을 이해하게 되듯 말이다. 


 그렇게 나는 하나 더 빈 답안지를 받아든다. 아마도 정답을 작성하기까진, 지나온 수십년, 앞으로 수십년이 더 지날지 모르는. 

 


매거진의 이전글 아빠의 무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