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며 예술 같은 소리 하네
https://brunch.co.kr/@coexistence/68
(구하라와 설리의 죽음에 임하여 쓴 전편. 본편의 맥락과는 무관함.)
태초에 <드래곤볼>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노력하는 천재'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는 이 만화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거둔 만화가로 알려지게 된다. 그는 소년 격투만화라는 장르를 새로이 정립했고, 그 안에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스토리와 작화를 선보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만화 시장과 애니메이션 산업을 크게 융성케 했다.
이 만화가 얼마나 큰 파급력이 있었는가 하면, 11년간이나 만화가 연재되는 동안 토리야마 작가는 몇차례나 완결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드래곤볼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관련 산업계, 당장 드래곤볼이 연재되고 있던 주간 잡지 소년점프 관계자들, 애니메이션 관계자들, 문구 관계자들, 그리고 방송계 전반까지 이와 관계된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는 일이었기에 번번이 만화를 완결내려는 시도가 가로막혔다. 연재 종료 3여년 전, '이번에야말로 작품을 완결내겠다'라는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작품을 떠내보낼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도 관계된 산업계 전반이 타격을 입지 않도록 신중히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토록 위대한 작품을 낳은 위대한 만화가, 토리야마 아키라는 그리고 올해 향년 68세의 일기를 끝으로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한다. 드래곤볼 40주년을 앞두고 각종 기념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와중이었고 토리야마 작가가 새로운 드래곤볼 애니메이션 시리즈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었기에 그 충격은 매우 컸다. 일본 만화계를 넘어서 세계적으로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실로 위대한 예술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위대한 작품을 낳은 작가의 삶은, 행복했을까? 여기 흥미로운 자료 하나가 있다. 매주 한 편씩 만화를 연재해야 하는 일본의 대표 만화잡지 소년 점프의 인기 작가들의 일정표다. 비교를 위해 현시대의 토리야마로 불릴만한, 아니 어쩌면 이제 그를 초월한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이치로의 사례도 같이 배치했다.
일주일의 일정표를 보면, 간단히, 휴일이 없다. 그리고 기상시간과 취침시간이 엉망이 되어서 버티다가 한계가 오면 잠에 들고, 그 이외 시간에는 그저 그림을 드맄다고 쓰여있다. 오다 작가의 경우 맨 윗줄에 새벽 2시에 자 아침 5시에 기상한다는 말이 적혀있다. 하루에 불과 3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젊은 시절 '성실 연재'로 정평을 받아왔다.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을 상징하는 그들의 업무량은 상상을 초월해, 토리야마 작가는 데뷔작이기도 한 <닥터 슬럼프>를 연재하는 동안 3일에 한번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거나, 6일 연속으로 밤을 새는 등 가혹하다는 말이 너무 가벼워보일 정도의 살인적인 작업양을 10년 이상 이어갔다.
만화를 그려 자신과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는 동기로 이 직업을 시작한 예술가들인 그들이 이런 살인적인 일정을 십수년, 수십년간 이어간 것은, 과연 그들만의 순수한 열정이었을까? 아니면, 지나치게 커져버린, 하나의 기업, 아니 기업을 넘어서 하나의 산업이 되어버린 자신의 작품에 눌려, 고된 시간을 작품의 완결까지 달려가는 것일까? 여담이지만, 이들 작가들은 작품 연재 이외에 각종 연관활동에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한다. 칼라 작업이라거나 애니메이션에 대한 참여라거나. 이런 시간이 모이고 모여 그들의 수면, 그리고 생명력을 갉아먹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산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금 오다 에이이치로 작가는 건강 이상으로 장기간의 휴재에 들어갔다. 이미 20년 넘게 성공적으로 연재를 이어오지 않았냐고? 이런 '수명 갉아먹기'는 이미 많은 작가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건강한 유전자 덕분에 살아남은 일부의 예외사례보다도, 착취적 노동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건강의 악영향 문제를 신뢰하는 것이 타당한 생각일 것이다.
지난해의 피프티 피프티 사건. 그리고 최근 뉴진스 사태를 보며 나는 당사자들의 통제 역량을 넘어선 거대한 자본이 어떻게 그들의 영혼을 파괴하는지 목격한다. 드래곤볼과 원피스의 작가들에게, 그들의 너무나 큰 성공이 그들의 남은 삶을 거대한 산업의 노예로 만들었던 것처럼, 이 어린 여성들에게 지나치게 큰 경제적 성공은 그들 스스로의 삶을 자율적으로 살 수 없도록 한다. 피프티 피프티의 전 멤버 세 사람에게, 그리고 뉴진스 다섯 사람에게 소속사와의 결별이라는 선택이 과연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졌을까? 차라리 유명 만화가들이 스스로 하루에 두어시간만 자면서 일한다는 말을 믿는 것이 합리적이다.
양쪽 다, 어른들의 치열한 머니게임이 진행된 증거들이 즐비하게 우리 앞에 제시되었고, 아이들은 스스로의 판단에 대해 회고하고 성찰할 기회도 없이 "주인공"이라는 허울이 덧입혀져 플래시 세례 앞에 내밀어진다. 마치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산업계가 만화가들을 주인공을 내세워, 그들의 생명력을 쪽쪽 빨아먹듯이. 토리야마 아키라 한 사람이 벌어들인 수익이 많을까 그를 통해 일본 산업계가 벌어들인 수익이 더 많을까? 뉴진스가 정산받은 돈이 많을까 아니면 그 아이들을 통해서 관계자들이 벌어들인 수익이 더 많을까?
민희진 탓이네 방시혁 탓이네 하는 속이 빤히 보이는 어른들의 싸움 아래, 올해도 꽃다운 나이의 아이들이 자본의 수렁 속에 빨려들어간다. 아이돌이라는 망국적 산업의 깃발 아래. 나는, 일본의 만화 산업이 작가들의 생명력을 빨아먹을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돌 산업 역시 미성년자, 특히 여성들의 생명력을 빨아먹을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점을 비판하고자 한다. 아티스트 같은 소리는, 그들의 예술활동에 얼마나 다양한 권리들이 경제적 이득과 결부되어 있는지를 살핀다면 감히 논거로 내세울 수 없는 소리다. 애초에 수백억의 예산을 투자해 자본 시장의 상품으로 가공된 소년소녀들이 무슨 수로 주체적 아티스트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사람들은 내버려두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예쁘장한 새장에 가두어진 아이들이 수백, 수천억의 머니게임을 목격하고, 가치판단을 하면서 어떻게 마음이 멍들어가는지 알 수 없다. 왜, 거대자본이 중고등학생이라는 '상품'을 가공하는데 투자되는 것일까. 이들이 몸을 흔들지 않으면 우리는 시청각적 쾌락을 음악으로써 향유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이돌 산업은 망국적 산업이다. 미성년자들의 육체를 상품으로 하여 수천억의 머니게임을 벌이고, 그들은 자신의 '예술가(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스스로 그렇다고 착각하고 있을 테니 피치 못하게 이 용어를 여기선 쓸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슬프게 고지한다.)'로서의 삶과,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망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길고 지리한 소송의 당사자가 될 것이다. 그 동안 무수히 많은 대체재들이 시장에 공급될 것이다. "신상"을 넘어설 수 있는 성상품이란 없다. 소녀들은 나이먹어갈 것이다. 이들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그들보다 적극적으로 골반을 흔들어댈, 더 어린 아이들이 지금도 기획사마다 줄을 선다. 이러한 구조는 산업 자체가 소멸되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다. 과연 이, 미성년자들을 향해 놓여진 덫들은 걷힐 수 있을까? 그러기엔, 이미 우리는 보아오지 않았는가. "재능"과 "예술"로 포장되어 노동법 따위, 청소년보호법 따위, 쉽사리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이들이 가면 그 다음엔 더욱 빼어난 요정들이, 소녀들이, 음악 영재와 댄스 신동들이, 카메라 앞에 불려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원리다. 개인 경제 주체는 거대한 산업 구조의 하나의 바퀴 이상이 될 수 없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나는 청소년들이 음반산업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까딱하면 너무나 큰 경제 소득이 아이돌 가수 개인에게 부여된다. 배우는 차라리 영화나 드라마가 재미없으면 안보기라도 하지. 아이돌은, 예쁘고 잘생기면, 그리고 어리면, 신상이라면, 그 뒤부터는 그저 자본의 게임일 뿐이다. 이렇게 아이돌 산업은 이어져왔다.
부디 이 산업이 사라지길 나는 소망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아이돌의 경제소득에 대한 일정한 안전장치라도 마련되어야 하겠지. 물론 지금의 연예인 표준계약서가 여러가지 기획사의 폭압과 싸우며 얻어진 것이라고 하나, 미성년자들에게 너무나 많은 자본이 투자되고 그들을 둘러싼 머니게임이 번번이 발생하는 이 구조는, 나는 '사람의 것'이라곤 믿고싶지 않다.
아이돌 산업은 망국적 산업이다. 그들에게 영광을 누리게 하며 뒤에서 고혈을 빠는. 그로 인해 행복해진 사람도 많겠지만, 그런 소수보다는 불행한 결말을 맞는 소년 소녀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지 않은가. 나는, 이 산업이 끝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의 영혼이 너무 늦지 않게 구제 받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