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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장 곁에서 커피를 볶는다

열 사람 분의 커피를.

by 공존

방학이 끝나고 나는 공사장이 된 학교 뒷마당, 지금은 출입이 금지된 후문 현관 앞에 앉아 커피를 볶는다. 내 작업실은 접이식 책상 하나. 그 위에 평면 회전식 로스터 두개를 올리고, 커피를 볶는다. 날은 조금 덥다. 그러나 화창한 하늘에, 그리 습하지는 않아 능히 견딜만하다. 조금쯤의 땀은 느슨한 이 늦여름의 사근한 바람에, 뭉근한 구름에, 값을 한다. 그러니까 나는 공사장 곁에서 커피를 볶는다.


- 제가 무료로 드릴 수 있는 원두가 소진되어 내년 새학기부터는 회비를 모아 생두를 구매할까 합니다. 한 학기 3만원으로 커피를 무제한 드실 수 있습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과 2020년에 나는 커피를 이용한 사회적기업가 정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래서 학생들이 실습할 원두커피를 제작하고자, 생두를 넉넉히 구매했다. 그런데 학교에 대형 로스터리를 만들 순 없는 노릇이라 커피 로스팅을 원시적인 냄비로 진행했다. 학생들은 많은데 로스팅 기기는 적고, 시간은 오래 걸렸다. 그래서 한 학년을 다 마치니 생두가 제법 남았다. 이듬해에는 교육감이 바뀌며 관련 사업이 없어졌다. 내가 해당 수업을 더 진행하기 난감했다. 생두가, 악성재고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작년까지 2년에서 3년에 걸쳐 그 악성재고가 된 생두들을 천천히 소진했다. 그 사이에 내가 건강이 악화되면서 예전처럼 집에서 수시로 커피를 내려먹지 않게 되었다. 집에 있던 커피머신을 학교로 가져왔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아메리카노가 자동으로 뽑히는 전자동커피머신이 교무실에 자리잡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내가 커피를 볶게 되는 일도 늘었다. 교육실습용으로 산 저렴한 생두였지만 그래도 스타벅스 커피보다 한등급 위인데다가 로스팅 포인트도 더 잘 잡았기에, 사람들은 나를 따라 커피 맛을 알게 되었다. 이런 즐거운 공동체 생성의 시간이, 작년 말에 마감되었다. 악성재고 전량 소진. 나는 사람들에게 회비를 모아보자고 말했다. 그리하여 60명 남짓의 교사가 모인 학교에 열명의 커피동아리가 탄생했다.

커피를 볶는 건 제법 고된 일이다. 폐에도 안좋다. 즐거워서 하는 노동이다. 나를 따라 커피 맛을 깨우치게 된 아홉 선생님들과 하루 잠시의 기쁨을 누리는 일이다. 집에서는 로스팅 시 발생하는 매연 때문에 볶을 수가 없고 학교에 와서는 일과중엔 할 수 없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볶는다. 그날은 밥을 굶고 커피를 볶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을 열 명이 나누어 누린다.


그런데 개학을 하고 보니, 학교가 공사판이다. 원래 나는 후문의 벤치에서 호젓하게 커피를 볶는 사람인데 그

벤치도 없어졌다. 그래서 개학날 밤에는 집에서 오랜만에 앞뒤베란다 창문을 모두 열고 커피를 볶았다. 오랜만에 집에서 커피를 볶으니 그 로스팅 매연이 새삼스러웠다. 그나마 새벽에 한시간 내 볶은 콩이 겨우 3일을 못갔다. 당장, 집이 아닌 학교에서 나는 커피를 볶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커피계 회원님들의 일용할 카페인을 제공해드릴 책무를 이행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공사판이 된 후문 현관에 접이식 책상 하나를 끌고 나왔다. 통제선 안쪽으로 비스듬히 그려진 세모꼴의 작은 공간이 나의 영토, 우리의 로스터리가 되었다. 여기서 씩씩히, 나는 커피를 볶기 시작했다.


공동체가 생겨나니 업그레이드란 현상도 발생한다. 열 명 몫의 커피를 냄비에 볶아대던 내 손목이 어느날 비명을 질렀다. 고민하다가 자동 로스터를 하나 샀다. 마음에 들어서 하나 더 샀다. 회비를 모으긴 하지만 장비는 내 재량이니 내돈내산. 커피맛의 팔할은 생두의 질이다. 허접한 장비여도 신경써서 좋은 콩을 골라사 볶으니, 다들 만족 중이다.

게다가 커피머신도 업그레이드 되었다. 원래 내가 쓰던 머신은 가정용 전자동커피머신이라 10명이나 되는 인원이 쓰기엔 작았는데, 우리 회원이신 젊은 선생님 한분이 친구에게서 받아왔다며 사무실용 대형 전자동커피머신을 내게 건냈다. 머신을 뜯어 살피고 세척을 하며 짐작해보니, 어느 사무실에서 다들 제대로 관리도 하지 않고 더럽게 쓰던 것을 막내 직원에게 떠넘기듯 처리했고, 그 머신을 감당할 수 없던 직원이 친구에게 넘긴 게, 우리 교무실까지 흘러들어온 모양이다. 단 한번도 세척된 적 없었던듯 커피가루가 종유석처럼 굳어버린 그 머신을 열심히 닦아 테이블 위에 두었다. 내가 아끼는 소중한 커피머신은 우리집 식탁으로 금의환향해, 집사람의 화려한 핀잔세례를 받았다.

이리하여 점심 한시간이 흘러간다. 8분 뒤 나는

교실에서 수업을 해야하니, 이 로스터리도 싹 치워야한다. 이마에 송글거리는 땀이 커피를 볶는 한시간에 값하듯 점심을 굶고 글을 쓰며 보낸 잠시의 여유가, 그래 호젓하다.


집에는 2학기에 먹을 10키로 분량의 생두가 배달되어있다. 내일은 그 택배박스를 교무실로 옮길 차례. 오늘 볶은 이 콩이 절반 가량으로 줄면 다음주엔 조금은 더 선선해질까. 그러지 않더라도, 이정도면 그럭저럭 볶을만은 하다. 구태여 돈을 들여 하는 공사란 일은 더 나은 환경을 위한 것. 마찬가지로 굳이 힘을 써 커피를 볶는 이유는 가장 맛있는 커피를 가장 저렴한 가격이 먹기 위한 것. 4개월간 단 돈 3만원에 최상급의 커피가 무한 제공된다. 우리 커피공동체를 위해. 이것은 왜 보람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로 인해, 나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빚을 수 있다. 삶이 바쁘고 퍽퍽하여 자주 글 공간을 마주하지는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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