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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불안을 낮추면 아이의 성장이 다가온다

접근, 시도, 이해, 경계

by 공존

“어떻게 하지 30분째 울기만하네."

"일단 내가 더 놀아줘볼게."


딸아이가 20개월이 되었을 무렵부터 수영장에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첫 수영복, 첫 튜브를 챙겨서. 처음 간 수영장은 인천 소래포구의 호텔이었는데, 작은 루프탑 수영장엔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들이 바글바글했다. 첫 날은 성공. 아빠가 신나게 튜브 째로 다이빙도 시켜주고 배도 태워주니 재미있게 놀았다. 두번째로 시도한 것이 문제였는데, 진도 쏠비치까지 갔는데, 그 비싸고 큰 수영장에서 아이가 추워서인지 30분째 울기만 한 것이다. 나는 긴 시간 운전을 하고 온 피로감에 아이가 수영장의 한기에 겁먹고 우는 것에 조금 지치기도 해서 그냥 데리고 나가자고 할까도 생각했지만, 부부가 함께 인내하기로 했다. 아이를 달래고 달래니 31분째엔 울음을 멈췄다. 물 위에 뜬 채로 드디어 처음 웃음을 보이는 아이와 함께 신나게 물장구를 치고 놀며 첫번째 관문을 넘었다.


그렇게 아이의 수영장 놀이가 시작되었다.


"오빠 하지마 큰일나!"

"잠깐만 잠깐만."


두번째 문턱은 아빠가 만들었다. 80cm를 오가는 22개월의 신장에, 유아 풀 말고는 아이를 놀릴 데가 없다. 22개월이 되어선 치앙마이로 휴가를 갔는데 4일을 묵어야 할 두번째 호텔에 유아풀이 아예 없고 그저 조금 얕은 구간이 있어서 거기에서 아이를 놀릴 수 있었다. 아이는 수영을 좋아하고, 해외여행을 왔으니 수영장에선 놀려야 하는데 어쩔 수가 없다. 얕은 자리는 튜브를 타기조차 어려워 그저 물컵이나 가지고 놀도록 하다가, 내가 지쳐서 아이를 안고 성인풀에서 놀기 시작했다.


"동백아, 여기 한번 들어가볼래?"

"응!"


자기가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이라는 것을 이해한 아이이지만, 아빠가 안고 한참 물에서 놀아주니 조금 안심을 한 상태. 나는 그대로 손을 놓아서 아이를 잠시 물 속에 잠기도록 한 뒤, 즉시 다시 끌어안으며 물 위로 올렸다. 2, 3초나 될까 싶은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는 물 속에서 하강하는 감각을 느꼈고, 그런 뒤엔 따듯한 아빠의 품에 돌아올 수 있다는 안도감을 즐겼다.


문제는 그걸 본 아내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


"괜찮아 내가 지금 놀아주고 있는 거잖아."

"잠깐이라도 안돼 애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래."

"너가 우리 여기로 데려온 거잖아."


22개월 아이를 발도 안닿는 깊은 수영장에 담그는 아빠라니 엄마야 식겁할만도 하다만, 내 입장에선, 아이의 발목 위 밖에 안오는 얕은 물에서 놀만큼 놀았고, 이제 새로운 흥미거리를 제공할 차례에 한 일이다. 그런 뒤엔 다시 튜브를 태우기도 하고, 물장구를 치기도 하며 아이와 한참을 놀아주었다.


여기까지, 나와 아이의 수영 연습에 있어서 먼저 아이의 불안과 엄마의 불안이 차례 차례 성장의 문턱으로 다가왔고, 그것을 벗겨내는 과정이 있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처음엔 수영이라는 생경한 체험, 바닷바람이 주는 한기에 불안을 느끼고 물 속에 들어가길 거부했지만 엄마와 아빠의 인내로 물에 적응했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와 놀아주는 아빠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재를 가하려 했지만, 그럭저럭 협의가 되고, 아빠의 양육 영역을 존중했다.


그런 양육의 결과, 45개월째엔 자율 수영에 마침내 성공했다.

이번에도 과정은 비슷했다. 수영장에 갔고, 유아풀은 아이가 금새 질려했다. 103cm 아이를 데리고 120cm 성인풀에 들어가서 수영조끼를 하고 놀다가 아이가 질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몇가지 훈련, 예를 들어 물 속에서 점프 해서 올라오기, 스노클링 안경 끼고 호흡하며 오래 수영하기 등의 연습을 먼저 시켜보았다. 아이가 잘 적응한 다음엔, 조끼를 풀어주고 수영장 사다리와 나 사이를 오가는 수영 연습을 몇번 시켰다.


"여보 이리와봐 빨리 빨리."

"왜-...우와!"


나는 의기양양 아내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응원이 겹치자, 아이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몇번이고 3미터, 4미터, 5미터 그리고 5초, 10초, 15초까지 기록을 늘렸다. 아직 팔다리의 근육이 자라나지 않아 세발자전거도 제대로 못 타는 시기다. 폐활량도 미약하다. 그러나 몇번 사이에 몸이 축 쳐질만큼 지쳐하면서도 잠시 쉬고 나면 금새 힘을 얻어 다시 물안경을 썼다.


이렇게 아이가 제 키를 넘는 풀장에서 자유수영을 할 수 있게 되니 우리의 선택지는 확 늘어났다. 두번째로 다녀온 수영장이 문제였는데, 유아풀은 쓸 수가 없었고 성인풀만 가능했다. 게다가 여긴 140cm는 되는 깊은 물이다. 다행히 수온이 높은 편이라 아이가 오래 놀 수 있었다. 세시간 가까이 수영을 하는 동안 아이는 때론 수영 조끼를 입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조끼 없이 아빠와 자유 수영을 하고 놀았다.


물론 물을 수시로 삼켰다. 물 속에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 후 숨을 멈추라 가르쳤지만 일단 재미가 있으니 입이 죽 벌어지고, 그대로 입에 들어온 물을, 뱉을 생각도 못하고 삼켜버린다. 중간에는 완전히 체력이 방전되어 선베드에 누워있기도 했다. 그런데, 1분만에 벌떡 일어나 수영장으로 다가가는 바람에, 그 사이 샤워타올을 가지고 와 덮어주려던 아빠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자리를 비운 사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아주 중요한 최소한의 불안 이외에는, 아이와 나 사이에 물에서 느끼는 불안감은 더는 없었다. 이 자유로움 속에서 아이는 다이빙 후 그대로 5미터 이상 자유수영을 해 오는,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




자녀교육이라는 불안의 공간


한국에서의 자녀교육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감정은 "불안"이다. 현대인은 대부분 높은 불안수치를 달고 산다. 그 원인은, 당연히 항구적으로 실직, 경제적 실패, 결혼 포기 출산 포기 등의 불행이 우리 주변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불안이 의대라는 외길에, 의대를 위한 선행학습에, 선행학습을 위한 레벨테스트에, 레벨테스트를 위한 선행과 과외에 이어지면서, 마침내는 7세반에서 5세반, 4세반까지 선행학습의 시작점을 낮췄다.


불안은 우리의 자녀교육을 규정한다. 한국의 자녀 교육은 거대한 불안 마케팅 시장이다. 그것은 성공적이다.


아이의 주도성 측면을 고려할 때, 체계적으로 우리의 불안과 아이의 불안을 조절하고 관리하는 것이 자녀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아이의 불안을 잘 관리하면 만 3세, 45개월 아이에게 10초 이상의 잠수와 자율수영을 시킬 수도 있고, 넘어져도 피가 나도 울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우리의 불안을 잘 조절하면 팔랑귀가 되어 영어 유치원과 유치원 시기의 선행학습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불안에 잠식되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주변의 영향에 노출되는 취약한 자녀교육의 길을 스스로 택하게 된다.


불안은 근본적으로 "이것은 하면 안돼."라는 감정을 발생시켜 주도적으로 문제 해결 노력을 지속하고 실패를 극복하는 것을 막는다. 불안수치가 높은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는 스스로 라면 끓일 불을 켤 수도 없고, 과일을 깎기 위해 칼을 쥐지 못한다.


내가 아이에게 수영 연습을 시킨 과정은 대체로 잘 하지 않을 그런 방식이다. 불안은 모두의 안전 수준을 높이는, 굉장히 평범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불안 없는 안일한 태도는 사고를 자초한다. 불안을 인식하고 경계하는 태도는 "회복 불가능한 위기"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이 불안이 없다면 애초에 학교 교육조차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불안을 긍정하고 그것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부모의 불안이 늘 아이의 주도적 행동, 도전, 성찰, 재시행, 성장을 가로막는 수준으로 형성된다는 점이다.


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굳이 부모가 한다. 단지 옷이 더러워질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아이가 젓가락질을 하지 않고 굳이 부모가 밥을 먹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 불안의 습성은 아이가 스무살에 볼 시험에서 원하는 성적을 얻지 못할까봐 다섯살부터 영어학원에 밀어넣는 자녀교육 습성으로 이어진다.


자녀교육에 있어 우리의 불안은 적절한 수준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그 제한선은 아이의 주도적 행위를 가로막지 않고, 위험은 예방하는 선이다. 또, 아이가 다쳤다가 그 뒤에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대응이 있어선 안된다. 그날 다치고도 다음날 다시 같은 일을 시도하려한다면, 곁에 붙어서 아이의 위험 수준을 조절해주는 것을 경계선 삼아야 한다. 그 선을 넘는 것은 아이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우리가 경계선 밖에 머무는 동안, 아이는 자기 스스로 위험을 인식하고 조절하는 연습을 한다. 이것은 평생 지속되는 자기관리역량 습득 과정이다.


불안은 발생하지 않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스무살의 수능과 수시, 그 사이 사이의 내신 관리.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존재하는 위험일까? 발생했을 때 대처 불가능할 위험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고 그때 발생할 추가비용보다 너무나 많은 자본과 에너지를, 지금 과잉투자하고 있다.


사교육은 공교육의 보완재로서 대부분의 학생에게 반드시 수요가 발생한다. 그러나 사교육 수요는 어디까지나 학생이 느끼는 교육의 요구와 학력 결손, 혹은 월반해서 기대될 수 있는 학업성취에 준해야 하는 것이지, 사교육 경제 시스템에서 생성된 "레벨테스트"의 사다리가 기준이 되어선 안된다. 학원이 마련한, 학교교육과정을 완전히 무시한 자의적인 기준에 우리 아이의 미래를 거는 것은 오히려 너무나 불안을 키우는 일이다.


아이에게 바람직한 것은 적절한 불안, 특히 자신의 미래와 학력에 대한 불안을 스스로 인식하고 그로 인하여 구체적인 실천이, 스스로의 인식 속에서 발생하는 그 과정 자체를 정교화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으면, 아이는 평생 사교육이라는, 안전하게 느껴지지만 결국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유아 수영장에 머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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