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구라구 미트볼이 라구

아란치니는 라구와 먹는다길래

by 공존

"아란치니가."

"응."

"이렇게 라구랑 함께 먹는 거라는데."

"응 근데 지난번에 아란치니 맛있었어."


그게 맛있었던 거랑 지금 내가 라구를 보고 호기심을 느끼는 건 다른 문제지.


지난주가 결혼기념일이었다. 평일이어서 퇴근 후 휘딱 인적 드문 곳으로 드라이브를 다녀온 뒤에 식사를 하러 갔다. 라구를 잘하는 맛집이라는데, 친한 선생님이 "배우신 분이 하시는 집"이라며 추천을 받아 갔는데 정답이었다. 결혼기념일시려운 스테이크도, 라구 파스타도 정말이지 훌륭했다. 그런데 그 식당에 가서야 할게 된 것이, 라구는 소스가 아니라 독립된 요리라고 하네. 허어 이거 첨 왓 어 원더풀 월드. 검색을 해봐도, 19가지나 공식 라구 레시피가 있다고 하고 말이지. 레스토랑에서 먹은 라구 역시 그랬다. 간 고기가 아니라 장조림처럼 고기의 결이 길게 살아있는 푹 삶아낸 고기였다. 상당히 이채롭다. 이게, 라구란 말이지.


마침 집에는 아란치니가 남아있다. 빨리 해치워야 하는 로제 소스도 있다. 결정적으로, 라구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나의 오랜 숙제 하나를 해결해줬다. 그것은 미트볼.


미트볼과 햄벅 스테이크를 정말 좋아하면서도 딱 한번 해먹은 뒤로 하지 않은 것은 간 고기를 처리할 대책이 없었던 탓이다. 간 고기는 얼리면 물이 다 빠져버리고 통 못쓰게 된다. 굳이 얼릴 쇠고기를 살 이유가 없다. 그러니 미트볼이 생각이 나도 참고 참았던 것인데, 라구를 만들어서 냉동하면 되는구나! 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 푹 삶아내는 것에 가치가 있는 라구라면 넉넉히 간 고기를 사서 미트볼을 하고, 남는 것도 알차게 재활용을 할 수 있다. 라구 하나로 두가지 숙제가 한꺼번에 해결이 되었다. 당장해야지!

그리하여 퇴근길에 마트에 들렀다. 그런데 소소한 해프닝이 하나. 적당히 저렴한 간 고기를 샀는데 계산을 마치고 차에 타면서 생각하니까, 아차 나 미트볼만 할 게 아니지.


간 고기를 살 때 정작 라구를 할 분량의 고기를 산 게 아니라 미트볼 정도 분량의 고기만 샀다. 300그램 가량의 고기면 둘이서 나눠먹고 라구까지 만들기엔 박해도 너무 박하다. 멍청하긴. 집 바로 앞에 마트에 다시 들러서 고기를 더 사야겠다.


그런데 이런. 매출이 좋지 못한 작은 마트라 간 고기가 없다. 어떻게 하지. 정육점에 가서 간 고기를 샀다간 만원을 훌쩍 넘길 것이다. 미트볼 하나에 라구 조금 만들겠다고 이 지경이라니. 입맛을 다시면서 마트 쇼케이스를 둘러보고 있는데 문득 50% 할인이 된 얇게 저민 고기가 발견된다. 이거다!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했던 모양. 상관 없다. 나는 라구를 할 거라구요. 유통기한이 임박한 고기라고 해서 상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래서 집에 와서 빠르게 칼질을 시작했다. 일단 먼저 양파를 다지고 마늘을 빻아 냄비에 버터와 함께 볶았다. 절반 가량은 그대로 냄비에 남겨 라구를 만들고, 절반가량은 퍼내서 미트볼을 만들 볼에 넣었다. 후추까지 넣어서 함께 자작하게 볶아진 양파와 마늘에서는 신선한 풍미가 솟아오른다. 잠깐 냄비 불을 끈 뒤에 저민 고기를 다지기 시작했다. 무조건 다진 고기로만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니니, 잡채 고기 반의 반 크기 정도로만 칼질을 했다. 그러면서 조금 엉뚱한 생각을 또 했는데, 이왕 미트볼을 만들 것이니 이 저민 고기를 좀 섞으면 색다른 식감이 날 것 같다. 라구를 만들 다진고기를 2/3가량, 그리고 미트볼에 합칠 고기를 1/3가량 나눠서, 조금 더 굵게 썰어뒀다.

고기를 넣고 버터를 추가. 그리고 달달달 볶아서 고기의 알갱이 하나하나 바삭해지도록, 그러나 타지는 않을 때까지 가열한 뒤에 냄비바닥에 갈색 빛이 번져갈 때쯤 물을 붓는다. 그리고 역시 다진 양파 외에 따로 남겨둔 반통의 양파는 큼직하게 썰어 물과 함께 냄비에 넣었다. 다져지고 볶아져 아래에서 맛을 받쳐줄 양파와, 부드럽게 씹히는 입자를 남겨서 라구에 생동감을 더할 양파를 남김 셈.

이제 미트볼을 만들 차례다. 볶은 마늘과 양파에 빵가루, 간고기와 다진 고기를 함께 넣고 양 손에 위생장갑을 끼고 버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아차...


"바깥양반!!! 바깥양반!!!"

"왜-?"

"빨리와 빨리. 급해 급해!"

"아...왜?"


거실에 누워있던 바깥양반이 느릿하게 주방으로 왔다.


"여기 위에 후추 있어. 꺼내봐."

"응."

"살살...조금. 그렇지."

"됐어?"

"아니 저기, 유리병 세개 중에, 흰거. 소금."

"응."


요리 따위 전혀 못하는 바깥양반에게 나는 손을 펴고 말했다.


"여기에 최대한 살살 조금만...오우 나이스."

"어어 어떻게 해."

"가만 있어봐."


후추는 딱 적당히만 뿌렸는데 소금은 그만 바깥양반이 내 손 가득 담아버렸다. 예상한 바라서 놀라진 않았다. 손 위에 수북히 올려진 소금을 다시 살살 유리병에 남고, 적당량만 남겨 버무리기 시작했다.

미트볼을 맛있게 만드는 방법은, 센 불에 겉을 바싹 익힌 뒤에 불을 낮추고 천천히 속까지 익히는 것. 거의 자두 크기로 큼지막하게 빚은 미트볼들을 아란치니 세 알과 함께 버터를 넣고 팬에 담은 뒤, 센불에서 잠깐 익힌 뒤 뚜껑을 덮고 중간불에 익혔다. 버터가 조금 많은듯 싶긴 한데, 급해서 버터 조각을 자를 짬이 없었다. 집에 와서 숨도 쉬지 않을 기세로 부지런히 몸을 놀려도 시간은 째깍째깍 순식간에 40분을 넘긴 시점이었고, 톡에서는 윙윙 학생들의 메세지가 울리고 있었다.


-선생님 오늘 저녁에 회의 하나요?

-선생님...?


지역 진로활동 프로그램이 마침 오늘이다. 7시에 줌으로 회의를 들어가야 하는데...시간이 20분 남짓 남았다. 이런. 애매한 크기의 버터를 잘라서 조금 절약할 짬도 내지 못하고,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바쁘게 미트볼을 굴리고 굴린다.

미트볼이 충분히 구워진 다음엔 라구를 센 불에서 졸여낼 차례. 바쁜 시간을 한창 보내고 나니 아이러니 하게도, 라구가 졸아들기만을 기다리며 멍을 때리는 시간이 남았다. 풍미를 더할 베이컨 한주먹과 파마산 치즈 가루, 그리고 허브소금을 조금 넣고는


- 여러분 유감스럽게도 제가...

- 피이이이치 못할 사정으로 그만 오늘...모임을 못할...

- 그런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 일어나진 않습니다...

- 헐...

- 뭐예요 설렜는데...

- 야 근데 10분은 늦겠다. 7:10에 줌 켭시다.

- 힝...ㅠㅠ


라구의 미덕은 푸우우욱 끓여내서 고기가 흩어지듯 부드러운 것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야속하고도 회의시간이 째깍째깍이다. 딱 10분만 늦기로 하고, 그만큼만 더 졸여낸다. 그런데 아까 로제소스를 싹싹 씻어내서 냄비에 붓는다고 물 양이 좀 많아진 터다. 그래서 센 불에 하염없이 끓이고 끓일 수 밖에 없다. 뭐 10분 정도야. 내용이 중허지.

"바깥양반-."

"응."


다 됐다. 나는 미트볼 네 알, 그리고 아란치니 한 알을 골라 바깥양반 그릇에 먼저 담고 라구를 홀홀 떠서 올렸다. 좀 더 자작하게 졸이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이게 어디야. 예쁘다 곱다 마음에 든다. 사진을 찍을 생각이긴 하지만 미트볼과 아란치니가 완전히 파묻히도록 있는대로 라구를 위에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냉동실에서 치즈를 꺼내 삭삭 갈아낸다. 딱 지난 주에 치즈 가는 도구를 사서 이제 천천히 쓰고 있는 방식이다.


"맛있어-!"

"어? 응. 맛있지?"

"응. 수고했어요."

"많이 먹어."


미트볼을 마저 담고 있는 내 등짝을 향해 바깥양반이 외친다. 그렇게 맛있나. 맛이 없을 순 없지만. 나도 라구를 붓고 자리에 앉았다. 포크를 폭, 찍어서 미트볼을 그대로 한 입. 야 맛있다. 너무나 부드럽고 바삭하고 짭쪼름한 미트볼은 싹 먹어치웠다. 라구는 절반 이상이 넉넉히 남았다. 내일 아침은, 이걸로 뭘 해먹어 볼까?


너무나 행복한 한 끼 식사를 음미할 틈도 없이 게 눈 감추듯 먹고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 잘 먹었으니 이제 일할 시간. 줌을 켜고 회의에 들어가서 아이들을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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