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식사를 마치고 앉으니 왠지 모르게 머릿속에 ABBA의 SOS가...
언제나처럼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지. 깊은 밤 11시 5분에 바깥양반은,
"오빠 골목식당 봐야지."
"어 그러네."
라고 말했고, 우리는 각자 폰을 하면서 오랜만에 같이 골목식당을 시청했다. 한창 골목식당 핫할 때는 매주 같이 보는 게 삶의 낙이었는데 방송이 3년째가 되어가니 방송도 신선함이 떨어지고 우리도 그렇게까지 몰입을 하고 보게 되진 않았다.
그래도 이승기와 규현의 출연,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그러나 먹은지 몇년은 된듯한 피자집으로 방송이 시작되니 역시 재미나게 볼만은 했다. 마침 창동편이 실력이 좋은 식당들이 많아서인지 하나같이 음식이 먹을만해보였다.
그러나 세번째 집이였던가, 아란치니 파스타가 방송에 나왔고 나는 그만 바깥양반의 "해죠."라는 말을 들어버리고 만 것이다.
하면 되지 뭐. 생기부 업무 때문에 학교에 출근해서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집에 왔다. 아란치니 레시피 정도는 참고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간단하게 흉내를 내보기로 했다. 양파 반통, 당근도 비슷한 양 정도, 그리고 풍미와 품격을 더하기 위해서 우삼겹 약간. 요즘 차돌박이나 우삼겹을 대량으로 구매해서 두고두고 요리를 해먹는데 이게 꽤나 쏠쏠하다.
아란치니는 튀겨 만드는 것인데 둘이서 두알씩 겨우 네 알을 만들어서 한끼 식사를 떼우기 위해 볶고 버무리고 튀김옷을 만들고 튀겨내고 마지막으로 파스타까지 따로 만드는 공정을 거치는 것은 효율이 너무 낮다. 그래서 이왕이면 많~이 만들기로 했다. 네 알만 남기고 나머지는 냉동해놔야지. 심심할 때 하나씩 꺼내서 먹으면 될듯하다. 속이 적당히 따끈해질때까지만 익히면 되니까 튀길 때도 수월할 테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은 이정도 분량. 고명과 1:1 분량 정도이니 밥으로 크게 세 주걱을 뜨고 나서 치즈를 다섯장을 넣었다. 그 전에 고명을 볶을 때는 허브소금 약간에 버터, 우유를 넣어 졸인 상태다. 아란치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결정적으로 레스토랑에선 가성비가 너무 나빠서) 아란치니의 식감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이보다 크리미하게 해야 하나? 그렇다고 크리미하게 했다간 잘 뭉쳐지지 않을 것 같다. 뭉쳐지지 않는 반죽으로 낑낑대는 것은 뇨끼로 족하다. 담백한 맛을 위해 소금도 거의 치지 않고 심심한 아란치니 반죽. 치즈의 풍미에 백미 귀리 현미 보리가 섞인 잡곡밥이면 그 자체로 충분한 식도락을 선사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품이 너무 들긴 한다. 계란 두알. 미리 알끈을 건져내고 풀지를 않고 풀어낸 뒤에 알끈을 건져내느라 고생이 많다. 원래대로라면 알끈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을 테지만 반죽을 뭉치고 보니 아란치니 갯수가 꽤나 많다. 괜히 알끈 때문에 빵가루를 초장부터 범벅으로 만드느니, 에라이 알끈 건져버리자.
오른손으론 젓가락으로 톡톡 반죽을 집어 튀김가루와 계란, 그리고 빵가루 그릇으로 옮기고 왼손은 장갑을 끼고 빵가루에 범벅이 된 밥덩이들을 보관용기에 담는다. 양손을 동시에 놀리는 일인데 생각보다 수월하다. 가장 고달픈 공정인데 의외로 빨리 끝났다.
문제는 설거지겠지만.
네 알을 남기고 열 아홉알을 각각 식기에 담았다. 레스토랑에서 아란치니를 비싸게 팔아먹는 마음을 이해할만큼, 튀김옷까지 입혀 완성된 밥알들이 알뜰 살뜰 예쁘다. 누구에게 나눠주기 싫을만큼. 중간에 딱 두 꼬집 정도 집어서 밥알을 맛을 봤는데, 치즈의 심심하고 삼삼한 맛이, 튀겨내면 아주 맛깔난 음식이 될듯 싶다. 냄비에 기름을 붓고 불을 올리며 탁탁 뚜껑을 닫아 냉동실로 옮긴다. 신경을 못쓴 사이에 다시 냉동실이 꽉 찼다. 얼른 비워내야 할 텐데 마침 여름이라 입맛은 없고, 그러니 거꾸로 이것저것 사다가 해먹고 싶어지고. 이런 게 또 살림인가보다 한다. 반대로 냉장실은 김장철을 앞두고 순조롭게 비워져가는중이다.
깔끔하게 예쁜 색으로 튀겨진 아란치니가 곱다. 냄비에 기름이 부족해 아래쪽이 좀 타긴 했지만. 튀기고 나니 기름이 남아서 예전에 샀다가 영 처치곤란으로 잘 안팔리고 있는 해시 포테이토도 튀겼다. 이 두장을 튀기고 나니 딱 두장이, 남는다. 아란치니 네 알과 해시 포테이토 두 장을 튀기고 남은 기름은 아직은 당장 버리기 아깝지만, 그렇다고 또 하루 이틀 사이에 아란치니든 뭐든 튀김을 해먹을 것도 아니다. 월요일에 스팸튀김을 했었거든. 그러니까 당분간은 기름은 굿바이다. 기름이 식으면 미련과 함께 깔끔히 버려버려야지.
완성이다. 중간 중간 설거지까지 하느라 거의 두시간이나 소요됐다. 사진도 서너장 더 찍었지만 굳이 다 올려야 할까 싶다.
두가지 문제가 있는데, 탄수화물, 탄수화물, 탄수화물이라는 맥락없는 조합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굳이 소스를 쓰지 않고 알리오올리로 했어야 색감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들 땐 재밌었는데, 만들고 나니 굳이 팔아야 하는 조합일까 싶네. 그래도 나름 특색있는 메뉴고 보기도 좋다. 맛이야 뭐. 파스타는 파스타지.
그렇다고 파스타를 해먹는 일이 많지도 않아서 루꼴라를 집에 둘 수도 없고, 먼 옛날 옛적 드라마 <파스타>의 이선균 쉐프가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대며 "피클은 안돼!"라고 말했지만, 바깥양반의 시어머님께서 친히 만드신 야채 피클을 곁들여, 풍족한 한끼 식사를 마무리했다.
"나 많이 먹었다. 오빠 먹어."
"응 잘했어."
아란치니나 남겨줄 것이지. 바깥양반이 해시 포테이토 약간, 그리고 파스타를 약간 남겼지만 워낙 양이 많았으니 어쩔 수 없다. 기름을 버리듯 남은 파스타면도 툭툭. 내일은 내일의 밥상이 있으니까.
아 근데, 두시간이나 주방에 서 있었더니 지치긴 해. 식사를 마치고 글을 쓰려고 앉으니 귓속에 ABBA의 SOS가 자동재생된다.
So when you're near me, darling can't you hear me, S.O.S.
And the love you gave me, nothing else can save me, S.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