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레시피 하나 발견!
나쁘지 않은 연휴 첫날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두 눈이 뻑뻑함을 느끼고 욕조에 물을 받아 반신욕을 했다. 상반기 생기부 점검에 대한 재점검을 월요일 저녁에 받았다. 화요일은 하루 종일 후속조치를 했고 마침내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완전히 뻗어버렸다. 한달 넘게 생기부에 매달려 일요일 밤 12시까지 일을 몇번이나 했으니 연휴를 앞두고 몸이 지칠만도 하다. 그 대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구니 몸도 마음도 같이 풀어지는 기분이다. 아.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에 콩을 볶는 중노동을 하긴 했다. 어제 퇴근하고 나서 그 피곤한 와중에도, 하긴 했다.
반신욕을 하고 나서도 당장 아침잠을 보충할 기분은 들지 않는다. 워낙 아침잠이 없는 성향이라서 누운들 잠이 오지 않는다. 에라이 하고 어제 볶은 콩으로 커피를 내려 테이블에 앉았다. 바깥양반이 바로 옆에 곤히 주무시는 가운데, 어제 애써 볶은 원두는 상상 이상의 멋진 향과 맛을 선사했다. 구매처에서 가장 저렴한 라인인데도 맛의 캐릭터가 강하고 꽤나 풍성한 맛이다. 흥미진진한 책을 두고 커피를 즐기니 기분이 한껏. 머릿속에는 커피의 풍미만큼이나 풍성하게 상념과 감각이 춤을 춘다.
12시쯤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도 굶고 잠을 자고 있는 바깥양반을 먹여야 하고, 나는 나대로 낮잠을 보충해둬야 한다. 한달 넘게 주말을 주말답게 쉬어보지 못한 피로가 밀려와서 3,4일 동안은 거의 좀비 상태로 보내고 있다. 피곤함에 신경이 날카로워 잠을 청하지 못해서 막걸리의 취기를 빌릴만큼. 그러니까 오늘은, 점심을 제대로 먹고 한숨 푹 잘 테다. 나는 주방으로 가 휴대용 버너를 꺼냈다.
1단계. 김을 구워 얇게 오린다. 국수에 올릴 단촐한 고명이다.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확인해보니 따로 후리카게를 쓰라거나 가쓰오부시를 쓰라거나 나와있는데 내가 맛집이라는 곳에 가서 먹어본 요리가 그런 잔재주를 쓰는 것도 아니었고 해서. 솔직담백하게 생김을 굽고 얇게 오리는 것으로 시작을 한다. 창밖에 하늘이 어제 저녁, 그리오 오늘 아침의 흐린 장막을 거두어내고 다시 화창하고 투명한 빛을 내고 있다.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내 머릿속에 떠오른 그 맛을 천천히 가꾸어나가는 시간이다. 냄비에 물을 넣고, 어제 산 메밀국수를 꺼낸다.
메밀국수를 샀다. 여름 내내 비빔면과 국수를 여러번 해먹어서 마트에 들르면 중면으로 챙겨두곤 하는데, 먹다보니 열무에는 메밀국수가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메밀국수는 그것대로 쓸모가 있기도 하다. 뜨거운 국물에도 어울린다. 냄비에 넣고 나서야 성분표를 확인해보니 고작 메밀은 30% 밖에 들어가지 않았지만서도, 이것보다 메밀 함량이 높은 것을 찾으려면 뭐. 그냥 식당 가서 사먹어야지.
면을 건져내고 보니 딱 시판 막국수의 그 면이다. 흔하게 파는 것이구나 싶다. 함량은 함량대로 문제지만, 이왕 밀가루를 이렇게 버무린 것, 좀 더 얇게 만들 수는 없을까? 쫄깃한 맛이 아니라 소면의 섬섬옥수같은 촉감으로 입 안에 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어넘기고 싶은데.
그래서 일부러 면을 푹 익혔다. 시판 메밀면의 그 탱글함은, 역시 함께 공장에서 만들어진 그 시판 막국수 국물을 떠올리게 한다. 동치미의 신맛은 정말 좋지만, 식초가 주류가 된 국물의 신맛은 여엉 입에 맞지 않다. 식초는 딱 상큼함을 더할 정도만 해야지. 암.
자- 그렇게 일단 면에서 물이 빠지도록 받쳐두고, 설거지거리를 치우며 국물을 뎊힌다. 9월에 접어들어 바깥양반이 추위를 느끼면서 "열무는 이제 그만."을 선언했다. 그리고 나는 연휴 내내 바깥양반과 단 둘이 보내게 된 이번 명절을 기념하여 여러가지 메뉴를 구상했다. 오늘 점심은 그 첫번째 타자. 들기름 막국수.
들기름 막국수는 면을 삶는 순간 끝이다. 아. 내가 김을 구워서 얇게 오려내긴 했지. 이거 두가지면 끝이다. 면에서 물만 빠지면 그릇에 담아낸다. 그리고 간장 반 스푼, 들기름 한 스푼 반. 물론 계량 따위는 하지 않고 대충대충 넣는다.
여기에 들깨가루. 지난번에 감자탕을 만들 때 사놨던 건데 이렇게 쓰인다. 들기름 막국수니 들깨가루가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새 숟가락을 꺼내서 살살 떠서 솔솔 국수 위에 뿌린다. 그 다음엔 아까 오려서 만든 김가루를 뿌리고, 마지막으로 깨소금. 끄읕.
수도권에서 가장 유명한 막국수 집 중 하나인 고기리 막국수에서 처음 먹었는데, 제대로 된 메밀면에 들기름이 어우러져 정말 독특한 경험이었다. 다만 들기름의 향이 너무 강했고 간이 심심한 편이었다. 자아 그럼 오늘, 내가 뽑아낸 이 맛은 어떨라나. 나는 바깥양반을 조금 미리 불러서 잠을 깨도록 하고, 열무김치와 선지국을 차례로 담아 상에 올린다.
"이게 뭐야?"
"맞춰봐. 그거 소스 잘 섞어야 돼. 젓가락으로 비벼."
"뇸뇸...들기름 맛이 나는데에."
"그럼 뭐겠니."
"흐응. 뇸뇸"
"전에 먹었잖아. 들기름 막국수."
"아하!"
"국물도 먹어. 어디...나도."
어엇. 진짜 맛있다. 정말 맛있다. 연휴 첫날 첫 식사(아침은 나만 혼자 먹었다)에, 또 하나 인생 레시피가 발굴되었다. 푹 삶아서 푸들푸들 부드러운 메밀면에 들깨가루와 들기름의 과하지 않은 풍미가 부드럽게 얽히고, 간장은 얌전하게 간을 잡아준다. 와 이거 정말. 엄마 아빠한테 맛보여드리고 싶은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