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도발 아들의 응전
"올라가세요 숙부님 숙모님."
"그려 조카 고생했네."
성묘가 끝났다. 코로나로 차례를 지내지도, 모이지도 않기로 한 대신 며칠 앞당겨 대전에 와서 큰아버지를 뵙고, 할아버지 한분 성묘만 간략히 했다. 지난주에 사촌 형님들께서 벌초를 다 마치셨다. 고향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수난이고 멀리 사는 우리만 숟가락을 얹는 것 같아 마음은 좋지 않지만, 우리는 우리의 도리를 할 때가 또 남아있다. 교통 체증을 조금도 겪지 않고 네 식구가 명절 행사를 마쳤다. 아니, 시작도 하지 않은 명절을 마쳤다고 하기는 조금 우습다. 그래도 추석날 아침은 집으로 가서 먹기로 했다.
"집에 묵은지 남았냐? 빨리 먹어야지 11월 20일께에 김장 할거야."
"어- 지금 있는 거 얼른 먹어야지. 저녁에 김치전이나 할까."
"난 참치 넣고 찌개나 끓일까. 그게 땡겨."
"참치? 참치도 좋지 나는 고추장참치비빔밥 생각 나더라."
"고추장비빔밥?"
"응. 그게 또 맛이 있으니까."
아침 일찍 출발한 일행들이 점심에 먹은 게 얼큰 칼국수다. 염분이 제법 찐한 육수를 들이키고 산소에 올랐으니 다들 목이 탄다. 또 오며 가며 커피도 마신 참이다. 경기도로 접어드니 물배도 꺼지고 나나 엄마나 각자 저녁 메뉴를 구상하고 있다. 묵은지가 꽤 있으니 김치전이지. 바깥양반에 채소를 마음껏 먹일 유.일.한. 수단이 부침개다. 평소엔 밥공기에 올려주기 전까진 채소를 집지 않는 프로편식러인 바깥양반은 전만 부쳐놓으면 척척 입으로 잘도 가져간다. 집에 가면 운전도 했고 고단하니 후다닥 부침개나 해먹고 누울 생각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엄마의 한마디.
"김치전 할 거면 비지 넣어서 해봐."
"비지? 호오..."
"그래. 고소하지."
이보다 조금 일찍, 대전에 도착해서 시골로 이동하는 길목에 엄마는 먼저 만두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엔 김치만두를 좀 해볼까 하시며. 나는 그 말에 먼저 비지 얘길 꺼냈다. 지난번에 비지를 넣고 만든 만두가 맛있었으니까. 콩물이 빠지고 남은 게 비지라서 포실포실 부드러우면서도 두부의 향은 덜하다. 그래서 집에서 하는 손만두의 두부 맛이 조금 꺼려지는 사람들에게도 비지는 아주 훌륭한 대안인데, 그런데,
김치전에 비지라니. 이건 참을 수 없지.
김치전처럼 붉은 노을이 하늘을 물들여갈 무렵에 집에 도착했다. 딱 밥때가 되었긴 하지만 바깥양반이 들를 곳이 있어 모셔다 드리고 일단 먼저 뻗어서 한숨 잠을 청했다. 두시간여 후, 바깥양반을 다시 모시고 와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냉장고를 연다.
"먼저 씻고 먹을 거야?"
"응."
"알았어."
여유가 생겼다. 얼어있는 비지를 볼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먼저 비지를 좀 풀어준다. 그리고 김치와 돼지고기를 차례로 썰어서 부었다. 돼지고기를 썰어넣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엄마가 챙겨주시는 고기를 처리하기 위한 아이디어인데, 오징어처럼 궁합이 훌륭한 건 아니지만 우리집 김치전의 아이덴티티랄까. 이러나 저러나 맛은 좋다. 그리고 한끼 식사로서 밸런스도 더 좋아지고. 거기에 부침가루를 넣고 푹 익은 묵은지를 굴리고 굴린다. 이 묵은지 2년차인데 김치냉장고가 쌩쌩해서인지 맛이 썩 괜찮다. 군내도 나지 않고.
이제 후라이팬에 올려서 구울 차례인데 어라라. 비지 덕분에 반죽이 무겁고 찰기가 조금 없다. 녹두전처럼 꽤나 난이도가 있는 부침개가 되어버렸군. 다행히 부침가루가 부족하진 않아서 어떻게 휙 팬을 튕겨서 뒤집을 정도는 되었지만, 장마가 길어서 부침개를 수차례 해먹어서 뒤집는 솜씨가 늘어나 있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뒤집다가 사고 한번 냈을 성 싶다.
"바깥양반. 와."
"응."
앞 뒤로 꽤나 만족스럽게 구워졌다. 이것도 여름 내내 부침개를 해 먹은 효과랄까. 바깥양반을 부르고, 접시에 담은 부침개를 식탁에 놓은 뒤에 남은 반죽을 팬에 부었다. 다행히도 딱 양이 맞아서 김치전 두 장이 아리땁게 구워질 수 있을듯하다. 그런데,
"맛있어?"
"응. 아 뜨거 뜨거."
"어디..."
와. 놀랐다. 정말 맛있다. 비지 덕분에 부침개 반죽이 부드러운 것이, 아까 예상했던 것처럼 녹두전처럼 포실하면서, 그보단 입자가 고와서 훨씬 부드럽다. 고급지고 호화로운 식감이, 밀가루반죽이든 메밀가루 반죽이든 지금까지 먹었던 다른 부침개들보다 몇 층은 더 올라가 있는 품격 있는 맛. 아 이거 굉장하네.
비지가 아직 냉동실에 한봉다리가 아마 남아있는 것 같다. 그리고 묵은지도 두 포기 정도 남아있으니, 이거 꽤나 즐거운 저녁시간을 몇번은 더 보낼 수 있겠다. 이 김치전, 정말 최고라니까.
*후기. 그리고 엄마의 반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