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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Dec 11. 2020

사랑은 연필로 그러나 결혼은 네임펜으로

각자의 삶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또 책보네."

"아아 미안미안 놀자-."


 거실에 누워서 TV를 보던 바깥양반이 삐뚜름하게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바깥양반이 드라마에 몰입하고 있는 사이에 아주 잠깐 책을 폈다가 이내 다시 닫았다. 그리고 바깥양반 곁에 발랑 누워서 같이 드라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2017년작인 <이번 생은 처음이라>를 최근엔 보고 있다.


"저 장면 뭔가 되게 의미심장하다. 지호는 자기 내면을 담담이 조곤조곤 말하고 있는데, 심지어 저게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에 하나인데, 시어머니한테는 저게 완전히 개소리 미친소리로 들릴 거고, 그렇게 연출도 하고 있잖아."

"당연하지. 저걸 어떻게 이해해. 보는 사람이나 공감하지 시어머니는 이해 못하지."

 

 드라마는 한창 클라이막스다. 16부작 드라마인데 일주일에 서너편씩 천천히 보다보니 한 3주는 걸려 다 본듯하다. 어렵게 바깥양반의 취향에 맞는 드라마를 찾아서 틀어줬는데 볼 땐 꽤나 재밌게 보는듯 싶다가도 잠깐 고개를 돌리면, 바깥양반은 잠들어있다. 그래서 내가 다시 꿈찔, 하고 자리에서 몸을 슬쩍 일으키거나 하면, 바깥양반은 "나 안잔다."를 시전하곤 하는 것이다. 


 덕분에 11월 첫째주부터 한달간 집에 와서 책을 거의 읽지 못했다. 2.5단계로 격상된 코로나 환경에서 바깥양반과 집에 딱 달라붙어 있으면서 평생 다 볼 드라마를 몰아서 보고 있다. 학교에서는 기말로 치달아갈수록 책 읽는 여유 같은 것은 전혀 부리기 어렵다. 도시락을 먹자마자 다시 자리를 붙이고 앉아 소중한 점심시간을 글쓰기에 할애할 정도로, 집에서는 내 개인 시간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있다. 퇴근하고 와서 저녁을 먹고 그대로 거실에 나란히 앉거나 누워서 대화를 하고 드라마를 보다가 잠에 든다. 외식을 안하니 배달음식을 시키는 게 늘었다. 결혼 3년간 시켜먹은 치킨보다 요 2,3개월간 시켜먹은 치킨이 더 많다. 


 드라마를 보는 것은 퍽 재미있다. K-컬쳐! 원래 나는 드라마 자체를 전혀 보지 않는다. 영어교사지만 미드도 <빅뱅이론>을 시즌6 정도까지 보고 더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바깥양반과 드라마를 몰아서 보다보니, <거짓말의 거짓말>과 같은 드라마에 드러나는 캐릭터의 상징성이나 인물의 합리성에서도 흥미와 이야깃거리들을 얻어내고 그것을 바깥양반과 나눈다.


 이게 다 내 탓이려니. 남들 부부끼리는 당연한 이런 활동을 우린 결혼 3년을 넘겨서야 하고, 배운다. 대학원 공부를 한다고 신혼 때부터 나는 욕심을 부렸다. 시험 공부에 집중해야 할 늦여름만 되면 주말은 몰라도 평일에는 완전히 바깥양반을 외톨이로 두었다. 바깥양반은 약속이 없거나 외출이 짧았던 날은 내가 집에서 엉덩이 붙이고 책만 읽는 꼴을 9월부터 매년 봐야했다. 특히 올해는 그것이 심했다. 한번 붙었던 시험을 다시 보는 스트레스를 상상하지 못했는데, 혹시 두번째 시험에서 낙방하면 어떻게 하나, 얼마나 쪽팔리고 부끄러울까 하는 생각에 5월부터 적지 않은 스트레스와 함께 공부 강박으로 나타났다. 이걸 신혼 때부터 매년을 꼬박 겪어야 했던 바깥양반의 심사를 나는 따지지 못했다. 

거실에 접이식 책상을 놓고 공부할 때가 많았다.

 "너 하고 싶은 거 해. 그러니까 나 하고 싶은대로 하게 해줘."라는 우리 결혼생활의 모토에 대하여 그동안 나는, 그리고 바깥양반은, 사실 깊은 고민을 하고 있지는 않았던 셈이다. 우리는 연애시절처럼 저마다의 스케쥴을 고수했다. 나는 일, 바깥양반은 핫플. 그러나 여느 기혼여성처럼 바깥양반은 결혼생활이 길어지면서 바깥스케줄을 줄이고 정리해나가고 나와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늘었다. 반면 나는 한 해 한 해 일거리를 늘리면서 일주일에 세번 야근을 하는 때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한 변화에 대한 나의 생각이 그렇게 진지하지 못했다. "바깥양반"이라는 호칭으로 아내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바깥의 삶을 통하여 결혼생활에서 내가, 그리고 서로가 만들어내는 공백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졌던 것이다. 그러니 탈이 안 날 리가 없다. 두번째 대학원 시험을 치르고 나서 바깥양반은 그간 쌓여있던 서러움을 내게 말했고, 나는 고이 그 말을 받아들여 그 후로 집에서는 핸드폰조차 최대한 줄이고 대신에 대화와 드라마 감상을 충실히 해주고 있다. 물론 마음 속으론 빨리 읽고 싶은 책들도 많고, 학교에서 싸 온 일거리를 두고 노트북도 열지 못해 마음은 사뭇 초조하지만 시간은 많다. 바깥양반에게도 그간의 나의 소홀함에 대한 보상을 넉넉히 해주고 나서 내 욕심을 부리는 것이 옳겠다. 


 나는 밥과 집안일을 하고 바깥양반을 가장으로서 책임지는 일에 대해 기고만장해져있었다. 부모와 자식 관계로 친다면 용돈 넉넉히 주고 비싼 옷 사 입히고 정작 대화와 애정은 부족한 부모와 같다. 물론 관계는 언제나 쌍방과실의 문제이므로, 바깥양반 역시 나에게 그런 애정이 충분하지 못한 결혼생활이었음을 참작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실천에 옮기는 것일 테다. 마치 사랑을 연필로 쓰듯, 우린 결혼생활도 연필로 쓰고 살아온 것. 다른 관계는 다른 도구로, 다른 생각으로 새로 써 나가야 할 텐데 말이다. 

 

 하여 시험을 마치고 나서 근래에 책도 없고 게임도 없는 저녁시간을 바깥양반과 보내고 있다. 그래도 피로가 몰려와 내가 먼저 잠들 때도 있다. 어제 딱 그랬다. 내가 10시쯤 일찍 잠들었다. 하필이면 보충수업을 마치고 8시가 되기 조금 전에 집에 들어온 날이다. 저녁을 먹고 집안일을 조금 하는듯 싶더니 까무룩 잠에 들었다. 일어나니 바깥양반은 세상 서운한 얼굴이다. 그래도 <이번생은 처음이야>는 함께 완결까지 볼 수 있었다. 오히려 밤 시간에 분주한 여성의 생활패턴 덕에 바깥양반이 드라마를 볼 때 부산했고 나는 자꾸 불러다 앉히는 몫이었다. 드라마를 다 보고서야 다시 나란히 누웠다. 새로 볼 드라마를 몇개 골라뒀는데 바깥양반이 흥미를 그닥 느끼지 않았음을 조금 서운해하면서.


 그래도 곧 방학도 올 테고, 나도 책도 글도 조금 여유있게 읽고 쓸 수 있겠지. 물론 하루 하루 이 결혼생활에 충실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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