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정체를 밝히려는 무모한 시도(2019)
나의 애인에게 물었다.
“만약 그때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되지 않았다면, 그래도 너는 나를 사랑했을까?”
잠시 생각하던 애인은 나지막이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 답했고, 나 역시 시시한 말장난이나 애정 어린 질투, 얄굳은 서운함을 위해 던진 질문이 아니었기에,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사랑의 부정할 수 없는 우연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어떠한 경위에서 내가 먼저 애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애인이 나를 맞사랑하게 된 것이라면, 이 사랑에 운명적인 요소는 딱히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얘기를, 내 사랑의 서글픈 푸념을 늘어놓고자 꺼내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복잡한 구조체다. 지겹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한 사랑이란 단어가, 진부한 만큼 간단하지만은 않기에, 우리는 이것의 정체를 밝히느라 역사를 반복하며 명멸해가고 있다. 사랑의 정확한 몽타주를 그려내고 싶은 욕심은 없지만, 애인의 대답에서 이 다차원의 성격을 띄고 있는 화합물 속에 ‘우연’이라는 원소 하나가 끼어있다는 것 정도는 추측할 수 있겠다.
흔히들 사랑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운명적이거나 로맨틱한 어떤 힘, 혹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특수성 같은 것들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사랑은 수많은 우연과 당사자들의 변덕, 그리고 다양한 외부 조건과 환경 변수들 사이에서 탄생한 하나의 기형적인 결과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보자. 만약 한 남자가 우연히 제주로 입도해, 우연히 한적한 곳에 카페를 차리고, 우연히 어둑한 저녁 시간에, 우연히 손님으로 한 여자를 마주하지 않았다면. 혹은 그 여자가 우연히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어서, 우연히 웹 서핑 중 남자의 카페를 발견해서, 우연히 회사 근처에 그 카페가 있어서, 우연히 그 카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면, 그날 남자가 여자에게 반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한 남자는 우연히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랑에 빠진 이들은 이 모든 우연을 운명이라 믿는다. 직전의 문장에서 ‘우연히’를 ‘운명적으로’라고 치환하는 순간, 그 문장은 마치 방금 피어난 꽃처럼 로맨틱한 사랑의 서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누가 이런 달콤한 유혹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눈치챘겠지만 이건 나의 이야기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믿고 있다. 나의 이성이 사랑의 우연성을 주장하는데, 역설적으로 내 본능이 사랑의 운명성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 어제 찾은 바다에서는 여전히 옛 애인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오늘 오른 저 산에는 아직도 옛 애인이 걸려있었다. 이 땅에도, 저 하늘에도 기억을 공유했던 누군가가 널려있는 것을 보며 나는 새로운 사랑을 말한다. 내 기억은 내가 죽기 전엔 죽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나의 종을 명명할 수 있다면, 아마 ‘다 기억해서 슬픈 짐승’이라 했을지도 모른다. …
이건 오래 전 내가 일기장에 써 둔 글의 일부다. 분명 지금도 나는 죽은 옛 애인들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슬픈 짐승이 아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감정으로 사랑을 말하는 한 남자일 뿐이다. 이것이 나의 변덕이고, 자기최면이다. 지금의 사랑은 지금 내가 믿고 있는 사랑이다. 나의 애인에게 나는 우연이었을지라도, 내게 애인은 절대 운명이다. 그렇다면 내게 있어서는,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 바로 ‘사랑’ 아닌가.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