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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
4층 복도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사내가 바닥에 떨어진 담뱃재를 신발로 흩뜨렸다. 사내가 있는 곳에서 대략 오백미터 정도 떨어진 3층 건물을 지켜보던 사내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1시가 넘었다. 사내는 몸 전체를 검은색으로 도배했다. 검정 크로스 백을 메고, 검정 후드 운동복에 검정 수영 모자, 검정 마스크를 착용했다. 손에도 검은색 라텍스 장갑을 낀 사내는 물고 있던 담배꽁초를 발로 밟아 끄고는 주머니에서 꺼낸 비닐봉지에 넣었다. 새벽 1시의 녹촌읍은 고요했다.
"올 때가 됐는데..."
사내가 팔을 흔들며, 제 자리에서 콩콩 뛰면서 몸을 풀었다. 4층과 5층은 아직 분양이 되지 않아, 사내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었다. 4층과 5층의 계단 센서등은 이미 꺼둔 지 오래였고, 올라오는 길에 3층의 센서등도 꺼두었다. 사내는 최근 주말 밤마다 건물 4층에 숨어 멀찍이 떨어진 3층 건물을 감시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이 몇 차례 있었지만,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느낌이 좋았다. 담배를 한 개비 더 물려는데, 카페의 불이 꺼졌다. 조금 후 주차장의 자동차 라이트가 켜지더니, 사내가 숨어있는 건물로 다가왔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건물 앞에 선 차량의 뒷좌석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리는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조수석 문이 열리는데, 먼저 내려 몸을 휘청이던 사람이 문을 닫아버렸다.
"아냐, 아냐, 나오지 마. 방울이 잘 바래다주고."
"언니 들어가. 내일 봐."
"그래, 니들 이번에 살림 차려라. 키키. 어서가~"
목표물은 심하게 술이 취했고, 일행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사내가 바라던 상황이다. 혜영을 내려준 자동차가 출발했다. 4층에서 지켜보던 사내가 까치발로 조심스럽게 3층으로 뛰어내려 가 현관문 위쪽 문틀에 미리 준비해 온 5미리 정도의 두께에 폭이 2.5센티, 길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장판을 붙였다. 현관문과 같은 색으로 준비한 장판 조각에는 미리 양면테이프를 붙여 놓았다. 능숙한 솜씨로 문틀에 장판 조각을 붙인 사내는 조심스럽게 4층 계단으로 돌아와, 숨죽이며 3층을 감시했다. 1층 센서등이 켜졌고, 잠시 후 2층 센서등이 켜졌다. 2층에서 3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참에서 혜영이 휘청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야~"
계단에 걸터앉은 혜영이 뒷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씨~, 아직도 차단이네... 진짜 징하다...푸~.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야... 아~! 핸드백, 핸드백..."
2층 센서등이 꺼졌다. 3층 계단창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계단에서 일어선 혜영이 3층으로 올라왔지만, 술에 심하게 취한 혜영은 센서등이 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음..., 이게 무슨 냄새지..."
혜영의 코에 맡아진 알 수 없는 비릿한 냄새에 욕지기가 치솟았다.
"욱!"
혜영이 급하게 도어락 커버를 올리자, 키패드에 파란 조명이 켜졌다. 4층에서 훔쳐보던 사내가 핸드폰으로 녹화를 하고 있었지만, 혜영의 어깨에 가려져 키패드는 볼 수 없었다.
'띠 띠 띠 띠... 띠링~'
혜영이 서둘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도어 클로저의 작동으로 문이 스르르 닫히는가 싶더니, 사내가 붙여놓은 장판 조각이 문과 문틀 사이에 끼어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삐리릭'하는 문 닫힘을 알리는 기계음이 들리지 않았지만, 화장실이 급했던 혜영은 작은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급하게 욕실로 달려가 변기에 토사물을 게워냈다. 몇 번을 게워낸 혜영이 가글을 찾아 입을 몇 번 헹구고는 그대로 침대에 뻗어버렸다. 도어락을 초저가 중국산이 아닌, 쓸만한 제품으로 설치했다면, '삐! 삐! 삐! 삐! '하면서 문이 닫히지 않았다는 경보음이 울렸을 것이고, 혜영이 문단속을 했겠지만, 이 건물의 시공자는 용식이었다.
4층에서 3층을 훔쳐보던 사내는 사방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까치발로 조심스레 3층으로 내려온 사내는 문틀에 붙여놓은 장판 조각을 떼어냈다. 침을 '꼴깍' 삼킨 사내가 문을 조심스레 당겨 집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등뒤로 빛이 비쳤고, 사내의 머리칼이 삐죽 솟았다. 휙 고개를 돌려보니 1층 센서등이 켜졌다. 화들짝 놀란 괴한이 조용히 문을 닫고 서둘러 4층으로 몸을 숨김과 동시에 2층에 불이 켜지더니, 누군가 3층으로 올라왔다. 문 앞의 방문자가 센서등 스위치를 켰다. 핸드백을 손에 든 용필이다. 용필이 도어락의 비밀 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나 싶더니, 바로 나와 문고리를 잡고 문이 제대로 잠겼는지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자동차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괴한이 3층으로 내려와 현관 손잡이를 돌려봤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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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난 내 여자니께~, 너는 내 여자니께~!"
거울 앞에서 노래를 흥얼대며, 머리를 다듬던 정표가 몸을 틀더니 보디 빌더처럼 사이드 체스트 포즈를 취했다. 비쩍 마른 몸에 좁은 어깨. 올챙이처럼 튀어나온 아랫배. 뭔가 우스운 꼴이 거울에 비쳤다.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허리가 길고 팔과 다리가 짧아 뭘 입어도 태가 살지 않는 체형이었다.
"음... 이 정도면 훌륭혀!"
회색 나이키 운동복 바지에 흰색 폴로 후드티를 걸치고, 검정 노스페이스 눕시 패딩 조끼로 토요일 오후 나들이 코디를 끝냈다. 신발장에서 흰색 바탕에 곤색 나이키 로고가 박음질된 킬샷 2를 꺼내 신었다. 정표의 나이나 체형을 고려하면 나름 쓸만한 코디였지만, 문제는 휑한 정수리였다. 하지만, 이 문제도 조만간 해결될 것이다. 얼마 전 몇 곳에서 견적을 받았는데, 천만 원 정도면 그가 꿈꾸던 아프로 헤어 스타일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올 가을 즈음이면 외출 때마다 쓰던 캉골 버킷햇과도 작별이다.
"누난 내 여자니께~, 너는 내 여자니께~!"
정표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누님~"
카운터에 혜영이 아니라, 1층 양사장의 막내딸이 앉아있다. 슬쩍 둘러보니, 카페는 이미 단골들로 북적였다. 혜영은 장사 수완이 좋았다.
"어? 수민, 여서 뭐 하는 겨?"
"정표 삼촌, 오늘 알바~."
"누님은 어디 간 겨?"
"부동산 출장~"
"수민. 아메리카노 한 잔~"
계산을 마친 정표가 부동산 컨테이너가 내려다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카페 안쪽 자리에 농협 이사장도 보이고, 찜질방 방 씨, 닭집 조 씨도 보인다. '저 양반은 닭은 안 튀기고 여서 뭘 하는 겨? 일 할 시간 아녀? 놈팡이들이 왤케 많은 겨... 한심한 새끼들... 언넝 누님이랑 살림을 차려야 하는 겨.' 아이패드로 모발이식 후기를 보면서, 슬쩍슬쩍 부동산을 살피는데, 용식의 부동산에서 나온 사내가 자동차에 올랐다. 조금 후에 부동산에서 뛰어나온 혜영이 방금 사내가 탄 차에 올랐다.
"뭐여?"
폰을 꺼내 카메라의 줌을 최대한 당겼다. 3층에서 내려다보는 차 안은 혜영의 검은색 스커트만이 보일뿐 사각이 너무 많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정표가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 건물 뒤편으로 돌아갔다. 이 위치에선 자동차 조수석 방향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건물 뒤로 숨어 핸드폰 렌즈를 건물밖으로 내밀었다. 각도를 조절하고, 줌버튼을 눌렀다. 핸드폰 렌즈를 통해 보이는 혜영은 평소와 달랐다. 명백하게 달랐다. 표정이 달랐고, 눈빛도 달랐다. 순간, 혜영이 사내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정표의 가슴에서 불이 솟았다. 수년간 혜영을 스토킹 한 정표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핸드폰 속 혜영은 분명 달랐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정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옆에 앉은 놈팡이가 궁금했다. '누구여? 누군데 저러는 겨?' 혜영이 밖으로 나올 듯하다가, 사내 쪽으로 몸을 휙 돌리더니 사내의 귀때기를 살짝 핥는 것 아닌가!
"어! 어!"
놀란 정표가 뛰쳐나가려는 순간, 사내가 자동차에서 뛰쳐나와 혜영에게 어서 내리라고 소리쳤다. 소리치는 사내가 정표의 낯에 익다.
"어~! 저 새끼, 저기..., 뭐여... 저거... 그려, 현리 사는 놈인디... 저 새끼가 왜 저서 나오는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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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 구석에 놓인 테이블에는 차갑게 식은 배달 음식과 소주병이 놓여있었고, 바닥엔 소주병이 뒹굴었다. 침대에 누워 뒤척이던 정표는 머리가 복잡했다. '나도 강남 살았으면, 누님이 좋아해 줬을까? 아녀, 그 새끼도 이젠 촌놈이잖어? 그 나이에 모닝 타는 새끼가 뭐가 좋은 겨? 아, 아니지. 그 새끼가 돈은 좀 있응께... 아니 말여, 그 새끼는 돈도 있는 넘이 왜 모닝이여...? 여튼 말여, 생긴 것도 별 것 없드만... 대가리 때문인가...? 누님한티 모발이식받는다고, 분명히 말혔는디..., 가을이면 시마인디..., 아니, 씨발. 왜 귀때기를 핥냔 말여? 지가 타이슨이여 뭐여! 이거슨 보통 일이 아니여, 뭔가 조치가 필요혀...' 이리저리 짱구를 굴리며 궁리를 해보지만 도무지 뾰족한 수가 없다. 혜영의 행동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김 씨 그 자식은 도무지 용서가 안된다. '마누라도 있는 새끼가 어서 껄떡대는 겨...' 생각할수록 화가 치민다. 한참을 침대에서 뒹굴던 정표가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렇지!' 핸드폰에 저장된 주소록에서 한동안 피해왔던 '현정'을 찾았다.
"눌러? 말어? 눌러? 말어?"
한참을 고민하던 정표가 발신 버튼을 눌렀다.
"누님, 이따 시간 되는 겨?"
"우리 정표 동상이 뭔 일이여?"
"오널 시간 되는 겨?"
"누구 호출인디 시간이 읎것어? 시간은 만들면 되는 겨."
"그려, 그라문 8시에 두꺼비형 가게서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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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을 여는데, 진한 무스크향이 코를 찔렀다. 방울은 용필이 왔음을 직감했다. 몸이 굳었다.
"왔으면 들어와."
"오... 오빠."
식탁 의자에 앉아있던 용필이 의자에 걸어놓았던 가죽 재킷을 집어 들었다.
"와서, 짐 싸."
"용필 오빠, 저기..."
"짐 싸."
"으, 응."
방울이 침대 아래에 넣어둔 캐리어를 꺼내, 옷가지와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챙겼다. 방울의 전화가 울렸다.
"받어."
방울이 코트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응, 석구씨... 응. 저기... 나, 가야 할 것 같아... 미안... 이럴 줄 알았잖아. 안돼."
통화를 하던 방울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데, 다른 한 편으론 속이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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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이 도착했을 때, 정표는 난로 옆 둥근 대포 테이블에 앉아 소주를 두 병째 비우고 있었다. 연탄 화로에 놓인 노란 양은 냄비에선 반쯤 남은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주방에서 달걀말이를 굽던 사내가 현정을 보고 아는 척을 한다.
"현정이 올만이다?"
"그 새를 못 참고, 벌써 두병이나 비운 겨?"
불콰하게 취한 정표가 현정을 힐끗 보고는 소주를 털어 넣었다. 현정의 얇은 입술이 붉었다.
"오빠, 장사는 좀 어뗘?"
"묻지 마러~, 성질 나니께."
"하긴, 큰 일이여..."
현정이 냉장고에서 소주를 하나 꺼내, 비쩍 마른 엉덩이를 바짝 붙여 앉는데, 정표가 슬쩍 엉덩이를 들어 거리를 뒀다.
"넓은 자리 두고..."
"대포 테이블은 말여, 요로코롬 딱~ 들러붙어서 마셔야 제 맛인 겨."
정표가 소주병을 기울였다. 오늘따라 현정의 붉은 입술이 유독 돋보였다.
"헛소리 말고, 잔이나 받아유."
"따라봐, 소주는 빈 속이 제 맛이 여."
"캬~, 짜르르 허네~"
현정이 찌개에서 적당히 비계가 붙은 고기 덩이를 집어 입에 넣었다. 두섭이 달걀말이를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의자를 당겨 앉았다.
"한 잔 따라봐."
"오빠, 저녁 장사 접는 겨?"
"접고 말고도 없는 겨. 니미, 동네에 돈이 앵꼬여..."
"그건 그려, 돈이 마른 겨."
"그려. 첨단 도신지 뭔지가 다 쓸어간 겨. 아니 말여, 지금 당장 다 죽게 생겼는디, 다 디지고 난 담에 도시가 들어서면 뭐 할 거여? 서울 넘들만 좋은 겨! 니미, 씨벌."
두섭이 소주잔을 드는데, 남녀 한 쌍이 가게로 들어왔다.
"어서 와유."
두섭이 잔을 내려놓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내려놓은 술잔을 현정이 호로록 털어 넣고는 달걀말이를 베어 물었다. 정표가 현정의 빈 잔을 채웠다.
"저기, 복태는 학교 잘 댕기는 겨."
"이번에 반장 된 겨. 지그 애비 닮아서 머리는 좋은께."
"형이, 전교 일등 했잖여. 씨는 못 속이는 뱁이여."
"공부만 잘하문 뭘 혀..., 캬~ 달아 뿌네."
"빈 속에 취하문, 시부모도 못 알아보는 겨. 천천히 마셔."
정표가 자신의 잔을 반쯤 비우고, 현정의 잔을 가득 채웠다.
"저기, 나가 맡은 구역이 현리잖여?"
"글지."
"근디, 현3리에 외지인 부락 있단 말여. 오다가다 보니께, 보통 심각한 게 아녀~. 죄다 불법이여~!"
"뭔 소리여?"
"뭔 소리긴, 외지인 넘들 때문에 마을이 개판이라는 겨."
"뭐가?"
현정이 달걀말이를 하나 집어 케첩에 찍었다.
"범죄의 온상이라 이 말이여~! 언넘은 밭에 데크를 깔고 말여, 수영장을 맹근 겨. 누군 땡볕에 김매는디, 누군 밭에서 수영하문 으르신들 맴이 으떻겠어? 언넘은 밭에 정자도 지었다니께, 싹 다 건축법 위반이잖어? 현리가 이래서 되것어? 서울 넘들이 남의 나와바리서 살판난 겨~"
"수영장? 참이여?"
"그려, 누님이 건축과 과장 아녀? 이건 말여, 직무 유기여. 그람 되것어?"
"그렇잖아도, 담 주부터 불법 건축물 단속 기간이여."
"저기 말여, 부락 안쪽으로 드가잖여? 쪼마난 밤색집이 하나 있는디, 그 집이 잴 악질이여! 불법 파고라에, 창고에, 데크에 아주 아방궁이여, 아방궁!"
"그려, 알았어. 캬~"
정표가 소주병을 들어 현정의 잔을 채우는데, 현정이 정표를 바라보곤 '킥킥' 웃었다.
"왜 웃는 겨?"
"니는 말여 아때부터 그라더니 여전 혀. 귀여운 자슥."
"뭐가?"
"아녀, 그런 게 있어."
"이번에 말여, 지대로 뿌리를 뽑아야 하는 겨. 특히 말여, 안쪽 밤색집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야 하는 겨. 불법이 한 둘이 아닌 겨. 거가 현 3리 15번진디..."
"동상, 가만히 들어본께, 이거 청탁같은디?"
"아녀~, 애향심의 발로여... 섭섭하게 왜 그려~"
"나가 공무원 짬이 20년이여. 그니께, 조지라 이거 아녀?"
"꼭 그란건 아닌디... 마을을 생각해서 그래 주문 좋긴 허지... 그 자슥이 미꾸라지여!"
"니도 공무원인께 알것지만, 사적인 청탁은 곤란한디... 글고, 원체 공무가 많아서 말여..."
현정이 턱짓으로 벽에 써붙여놓은 A4 용지를 가리키며, 정표의 손등을 검지 손가락으로 살살 비벼댔다.
'떡라면 3500원'
"라면 한 그릇 먹을 텨? 한 그릇 때리면 누나가 책임지고 조질 겨."
"안 묵으면 어떻게 되는 겨?"
"뭘 물어본댜... 공무원이 청탁받으면 되것어? 읎던 일 되는 겨."
"저기, 후불은 안 되는 겨?"
"알잖여, 우덜은 선불이여. 후불은 할증 이빠이여."
'일단 그 시답잖은 새끼부터 확실히 조져야 하는 겨...' 정표가 콧구멍이 벌렁이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왕 끓이는 거 곱빼기여! 그니께, 확실히 조지는 겨! 약속혀~!"
"약속은 무슨..."
현정이 접시에 남은 달걀말이를 정표의 입에 넣어주고,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냈다.
"퍼뜩 안 일나고 뭐 하는 겨? 곱빼기라고 안 혔어? 라면은 불어 불면 맛없는 겨."
"그려..."
"오빠, 여기 얼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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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
방울이 고개를 푹 숙이고, 양손 검지를 뗐다 붙였다 한다. 페도라 사내가 옆 의자에 앉아 담배 연기로 도넛을 만들고 있다.
"언니, 잘못했어."
방울이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입을 열었다. 몇 달 전부터 카페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허우대 멀쩡한 젊은 목수가 있었다. 읍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커다란 전원주택 단지가 들어서는데, 그 현장에서 목조주택 골조 작업을 한다고 했다. 동갑내기였던 둘은 쉽게 친해졌고, 청년은 숙소를 방울의 자취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몇 달 전 목수 청년의 작업이 끝났고, 한동안 방울과 동거하던 청년은 다음 현장을 찾았는데, 경기도 양평의 어디라고 했다. 청년과의 알콩달콩 살림이 좋았던 방울이 조용히 신변을 정리하고, 청년을 따라 양평으로 야반도주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언니, 앞으론 절대 안 그럴게. 정말이야. 나도 맘이 편하진 않았어."
"그러고 보면 우리 방울이는 순정파야."
"언니, 정말이야, 앞으론 그런 일 없을 거야. 한 번만 믿어줘, 언니.
정마담이 종이봉투에서 서류를 한 장 꺼냈다. 방울이 자필로 쓴 차용증이었다.
"'등등의 계약을 위반할 시, 차용액의 두 배를 변상합니다. 서방울.' 야! 니가 쓴 거야. 이렇게 쓰고도 튀는데, 믿긴 뭘 믿어. 야, 튀면 끝일 줄 알았어?"
"..."
"그리고 있잖아, 언니가 조금 다르거든... 보이는 게 있어. 믿고 말고는 알아서 하고..."
혜영이 담배 연기를 깊게 마셨다.
"말했잖아, 방울아 넌 있잖아, 살림 차릴 팔자가 아냐. 남자가 안 보여... 다 뜨내기야."
"나도 알아..."
"아는 년이 째? 니가 마이킹 오천 땡겼으니까, 이제 큰 거 한 장이네. 이거 어쩔래? 목수 총각한테 받을까?"
"언니, 언니, 내가 다 갚을게. 석구씨는 상관없어. 내가 좋아서 따라간 거야."
"어떻게? 뭘로 갚을래? 지금도 좋게 말로 하니까 언니가 호구같지? 키키. 니가 뭘 알겠니..."
방울이 말없이 양손 검지를 뗐다 붙였다 한다.
"니가 돈 되는 건, 나름 반반한 얼굴이랑 젊은 몸뚱이밖에 없잖아? 그렇지?"
"..."
"방울아, 대답해야지?"
"응, 언니."
"그니까, 그 몸뚱이 딱, 일 년만 쓰자. 뭘 시키든 토 달지 말고."
"응?"
"아니다 싫으면 지금 얘기해. 마침 최사장이 아가씨 하나가 필요하다고 하니까. 최사장 아니?"
"아니, 몰라"
"있어, 최백정이라고. 골 때리는 새끼 있어."
"언니..."
"일 년이야. 대신,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할게. 너 여기서 팔려가면, 언니가 장담하는데, '혜영이, 그 년이 선녀였구나' 할 거야. 키키."
혜영을 바라보던 방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영의 말이 맞았다.
"용필아, 차용증 문서랑 볼펜 하나 가져올래?"
용필이 가져온 볼펜을 방울에게 건넸고, 혜영이 다시 담배 한 개비 꺼냈다.
"받아 적어. 불러주는 대로 적는 거야. '나 서방울은' 옆에 주민번호 쓰고, 야! 그걸 쓰면 어떻게 하니. 이름 옆에 주민번호를 쓰라고! 방울아, 방울아. 널 어떡하면 좋니... 그래도 이 년아, 너 정도면 운이 좋은 거야. 언닌 있잖아..., 스물 하나에 첫 떡을 쳤거든? 근데 상대가 있잖아, 키키. 일흔여섯 처먹은 반송장 사채꾼이었어. 송장이 홀딱 벗고 덤비는데, 와~ 씨발... 키키. 지금 생각하니까, 골 때리네... 니가 뻘 짓을 하니까 언니가 꼰대같이 주저리 주저리 하잖아! 받아 적어."
방울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몇몇 단어의 받침을 틀리게 쓰고는, '언니, 이렇게 쓰는 게 맞냐' 며 부끄러운지 실없이 웃으며 물어봤다. 방울이 실없이 웃을 때마다 혜영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몇 번을 수정하고, 차용증 작성이 마무리 됐다. 방울이 마지막으로 서명을 하려는데, 혜영이 차용증을 빼앗아 북 북 찢어버렸다.
"에이 씨발... 호구 맞네. 미친년아 그러게..."
"언니..."
방울이 와락 혜영을 부둥켜안았다.
"미안해. 이젠 안 그럴게..."
"전에 살던 집 그대로 뒀으니까, 가서 정리해."
핸드폰을 꺼내 저장된 번호를 누르고, 통화 녹음을 시작했다.
"응, 동생~. 내가 고맙단 인사를 안 했더라고. 응, 응, 그래. 이번에 정경장 덕을 엄청 봤네. 내가 신세 지고 그냥 입 닦는 사람은 아니잖아~. 응 조만간 서프라이즈~! 기대해. 응, 그래. 들어가~"
'치이익' 혜영이 캔맥주 뚜껑을 당겼다.
"이러면 나가린데... 이제 장사 접어야 하나... 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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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나와!"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문을 두드리는 소란에 놀라 잠에서 깼다. 부부는 10시면 잠에 드는데, 그들만이 아니라 동네 전체가 9시가 지나면 하나 둘, 불이 꺼졌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뭔 소리야?"
"몰라, 경찰, 112."
놀란 미정이 핸드폰을 찾아 경찰에 신고부터 한다.
"저기, 서초구... 몇 번지드라...."
놀란 미정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둥거린다.
"거긴 서울 살던 주소잖아, 줘봐."
"예, 수고하십니다. 여기 현3리 15번지인데요, 주취자가 문을 두드리면서 행패를 부려서요. 네, 빨리 와주세요."
미정이 커튼 대용으로 창에 고정시켜 둔 색이 바랜 광목을 살짝 젖혔다.
"나가지 마, 경찰 10분이면 오니까, 그냥 모른 척 집에 있어, 근데, 누구야? 어두워서 모르겠네..."
어차피 나갈 생각도 없었다. 박 씨였다. 그는 몇 달 전에도 술에 취해서 혁에게 행패를 부렸고, 태영에게도 '평소에 건방지다'며 행패를 부렸는데, 그의 행태를 보고 상습 주폭자에겐 강력한 공권력 말고는 답이 없음을 실감했다. 다만, 그들과 어느 정도 척질 각오는 해야 하는데, 그들이 이장이나, 토박이 원주민이라면 고민해 보겠지만, 그들은 주민도 아닌, 주말 텃밭을 일구는 뜨내기 외지인 아닌가? 이곳은 태영의 구역이다.
"야, 김 씨, 안 나오냐! 씨팔 놈아~!"
태영이 잠이 깬 김에 나스닥 100 지수를 확인해 보니, 지수가 살짝 상승했다.
"아는 사람인가? 나가 볼까?"
"박 씨야, 나가지 마. 술 취해서 난동 부리는 거, 한 두 번도 아니고. 경찰 곧 올 거야."
"박 씨~! 어쩐지 목소리가 익더라. 그래도 이웃인데 경찰은 좀 그렇지?"
"이웃은 무슨..."
밖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살짝 열린 광목 사이로, 하나 둘 전등이 켜지는 게 보인다. 동네 사람들이 다 깬 모양이다. 지수가 살짝 하락했다.
"왜 이래 정말! 가! 동네 사람들 다 깼어!"
"깨면, 뭐~! 너나 들어가! 야, 김 씨! 안 나와!"
"민채 아빠, 제발 가자! 제발~!"
박 씨의 난동은 계속됐고, 잠시 후 혁의 목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주변으로 몇몇이 더 모였다.
"무슨 일이에요?"
"저기, 이 양반 좀 끌고 가세요. 제 힘으론 안 돼요."
"야~! 김 씨! 니가 신고했지! 데크 설치했다고, 니가 신고했지~!"
"미쳤어! 미쳤어!"
"개새끼야! 내가 사장이야! 사장! 백수 주제에 누굴 신고해~!
"그만해~! 제발~"
"아, 맞다! 너도 공무원이었지? 얀마! 니네가 뭔데 철거 딱지를 보내냐!"
그 순간 오 씨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야! 김 씨! 복자가 그러는데, 니가 신고했다면서! 얇실한 새끼!"
"미친놈아, 그만해~!"
"복자가 누구냐고? 우리 마"
"야~!"
그때였다. 오 씨가 주사를 부리던 남편의 뺨을 '철썩' 후려쳤다. 일순 바깥이 조용해졌다. 뺨을 때린 오 씨도 놀랐고, 뺨을 맞은 박 씨도 놀랐다. 혁도. 강 씨도. 윤 씨도. 하 씨와 하 씨가 안고 있던 똘이도 놀랐다. 똘이 녀석은 어찌나 놀랐던지, 눈이 둥그레져 '뽕'하고 방귀까지 뀌고 말았다. 잠시 후, 훌쩍이던 오 씨가 조용히 걸어 내려갔다. 멍하게 자신의 뺨을 주무르던 박 씨가 오 씨의 뒤를 휘청이며 좇았고, 사람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그렇게 오 씨가 숨기고 싶었던 그녀의 이름을 외지인 주민들 모두가 알게 됐다. 미정만 '하하' 웃으며 신이 났다.
"오 씨 이름이 복자래~, 직장 다니는 오복자~ 하하."
"이름 가지고 그러는 건 좀..."
"오복자, 오복자.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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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알지? 그 빨갱이 자슥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넘이 먼 이장을 한다고, 동네꼴이 아주 개판이여! 그 자슥 직업이 뭔 줄 아는가? 전문 시위꾼이여. 글고, 이 동네 사람도 아녀. 외지에서 온 뜨내기여."
이장 선출 플래카드가 여기저기에 걸렸다. 몇 차례 이장직을 맡아온 정이장의 사임으로, 십수 년 만에 선거 바람이 불었다. 입후보자는 강인영과 박장구였다. 귀촌한 지 6년이 흘렀지만, 부부는 여전히 외지인이다. 기본 삼대 정도는 살아야, 마을 사람 소리를 듣는다고 하는데, 평소 마을 대소사나 회관 주변에 얼씬도 않는 부부로선 그런 취급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되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장 선거도 김사장의 전화를 받고 알게 되었다. 재미난 것은 박장구나 김사장도 녹촌읍 출신이지 현리 사람이 아니었다. 장구는 몇 달 전 급하게 송씨네로 전입 신고를 했다. 지금은 마을의 실질적 지배자를 자처하는 박 장구지만, 그의 일가는 구한말까지 관청에서 대대로 서리 역할을 해오던 중인 아전 출신이었다. 조부는 왜정 시대엔 말단 순사로 지원해 활약했고, 광복 이후 동란이 발생하자 재빠르게 육군으로 참전을 했는데, 수완이 좋았던 조부와 선친은 후방에서 미군의 물자를 빼돌려 많은 돈을 모았다고 한다. 동네 토박이들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짱구여, 짱구 밀어주는 겨. 짱구네 조부가 육이오 참전 용사여!"
"예, 알았어요."
용식이 손가락 권총을 만들어 태영을 조준했다.
"자네같은 빨갱이들 잡는, 빨갱이 킬러였다, 이 말이여!"
"하하"
태영도 나중에 알았지만, 이장 선거도 투표 방식은 일반 선거의 투표 방식과 동일했다. 선거 명부와 신분증을 확인하고 칸막이가 쳐진 곳에서 후보에게 날인하고, [심지어 날인하는 기표 용구도 똑같다.] 투표함에 넣는 방식이다.
"짱구란 분이 사장님 친구분이세요?"
"아녀. 갸가 내보다 한 참 적을 거여."
"그럼...?"
"짱구가 읍에 건물이 석채여, 땅도 허벌나게 많고. 갸가 이번에 이장되면 나한테 다 맡기기로 한 겨. 그래서 선거 운동 하는 겨."
역시, 헤글러. 순간의 주저도 없이 대가성 선거 운동원임을 밝힌다. 그에게 공익이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사적 이익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장님은 참 솔직해요."
"맞어, 긍께, 2번 짱구여. 짱구 되면 자네도 노나는 겨! 왜냐~! 갸 건물 1층에 쭈꾸미 있잖여? 그려, 쭈꾸미 김밥, 갸 서방이 낙진디, 짱구 동상이란 말여. 글고, 낙지 아들내미가 시청 주무관이여. 자네 집에서 강 씨네까지 비포장 아녀, 비만 오면 진창이라 차가 뻑하문 빠지고, 지랄 같잖어? 근디, 내가 짱구한테 슬쩍 말하면 말여, 짱구가 쭈꾸미 깁밥 옆구릴 슬쩍 찌르는 겨, 그라문 낙지가 토스받아서 아들내미한테 먹물을 찍 쏘는 겨! 그럼, 당장에 아스콘 포장은 어려워도 말여, 매년 잡석 한 번씩은 깔아준다 이거여! 그때부턴 포장도로 부럽지 않은 겨! 내 말이 맞는가, 틀린가? 근께, 2번 짱구라 이 말이여."
과정이 좀 복잡하긴 하지만, 말이야 맞는 얘기다. 태영이 도로포장 민원을 몇 차례 넣었지만, 사업 순위에서 계속 밀리고 있다. 몇 년 전 잡석을 한 번 깔아준 게 전부였다.
"그게 다냐? 달 거 같어 아닐 거 같어?"
"아닐 것 같은데요."
"빙고여! 거기 3층에 한의원 있자너~. 그려~, 꽁치 대가리. 꽁치 며느리가 시청 환경과 과장이여. 자네 부락 쓰레기차 안드가지? 짱구가 이장되면 어뜨케 되겠어? 글고, 그 동네가 겁나게 어둡잖여? 송씨네 모퉁이에 하나 있는 게 다 잖여? 이번에 짱구가 이장되문 가로등도 놔주기루 한 겨. 긍께, 부락 사람들 한티 단단히 얘기 좀 햐~! 알지? 내는 말여, 자네만 믿는 겨."
"자기야~"
김 사장의 전화를 가로챈 정마담이 차갑고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자기야~ 있잖아~ "
뭐라고 하는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다시 핸드폰이 울렸지만, 태영은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