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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
"응, 동상."
정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여? 먹고 땡이여! 먹고 땡이냐고 묻잖여!"
"야! 니가 소릴 질러서 귀때기 떨어졌슨께, 귀때기 찾고 나서 말혀. 시방 들리지도 않은 께."
현정의 잔소리에 정표의 식식거리는 소리가 약간 누그러들었다.
"누님, 단속한다고 헌 지가 언젠디, 뭐 하는 겨?"
"동생, 화나는 건 알것는디, 안 되는 건, 안 되는 겨."
"고것이 뭔 소리여?"
"나가 단속만 20년이잖여?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는디, 갸는 아니더라 이거여."
"딱 봐도 불법이 천지더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넘이 어디 있다는 겨!"
"갸가 그렇다니께, 나도 칠 년 만 이여! 그렇게 억울하면 말여, 물러줄 텐께, 이따 와~. 호호."
현정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여? 지금 멕이는 겨!"
"먹고 땡이냐 문서? 아닌께, 이따 밤에 와~ 물러준다고~. 호호."
"일읎슈~!"
지방 '리'에 속한 건축물들 중 열이면 열, 불법 증축이나 불법 가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부분의 단층 건물들의 보일러실은 불법 증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건물을 크게 짓기 위해 보일러 실을 설계도에 넣지 않았고, 넣지 않아도 건축신고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법이 조금씩 바뀌는 추세지만, 지금까지 지어진 건축물의 거의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지어졌다. 건축이 끝나고 사용허가를 받고 나면 건축물에 붙여서 슬쩍 보일러실을 증축하는 게 일종의 관행이었다. 창고나 파고라등의 지붕이 있는 가설물도 모두 신고를 하고 지어야 했지만, 현실은 법과 거리가 멀었다. 신고로 적발을 당 할 경우, 벌금은 물론 철거를 하고, 철거 여부를 담당공무원의 확인을 받아야 한다. 다시 지을 경우 설계 사무소를 통해서 접수를 해야 하는데,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동안 기름보일러를 밖에 둘 수도 없고, 창고 속 가득했던 살림살이는 어디에 보관한단 말인가? 그래서 이웃 간 사이가 벌어지더라도 불법 건축물 신고는 삼가는 게 불문율이었다. 만약, 약속을 깬다면 그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미였다.
한 달 전, 현정은 정표의 청탁으로 변주임과 함께 현리를 찾았다. 하지만, 부부의 땅에 발을 딛은 순간에 현정은 본능적으로 일이 틀어졌음을 느꼈다. 집의 경계에는 측량 말뚝이 잘 보존되어 있었고, 말뚝옆에는 하나같이 굵은 철근이 박혀있었다. 측량 말뚝은 싸구려 나무로 만들어져 쉽게 썩거나 유실되는 일이 많았는데, 이 땅의 주인은 말뚝이 유실되더라도 경계를 알 수 있게 철근을 박아놓은 것이다. 집 앞의 밭도 마찬가지였다. 십여 곳으로 구획을 나눠 대나무로 만들어 놓은 틀밭은 칼로 그은 듯 반듯했다. 현정은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간파했다.
"변주임."
"예?"
"변주임은 저기 아래 농막 있지? 농막 주변 데크랑 파고라, 바닥 잡석 뿌려놓은 거 있잖여? 가서 사진 찍어."
"예."
'똑 똑' 현관문을 두드렸다. 문 옆 파티오 도어 너머로 기타를 튕기는 사내가 보였다. 호리 호리한 몸매에 스키니 청바지, 목까지 올라오는 갈색 스웨터를 입은 사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안녕하세요, 군청에서 나왔습니다."
"네. 무슨 일이신지?"
"민원이 들어와서요."
"네? 무슨?"
"선생님 댁에 불법 가설물이 있다는 민원이 접수됐어요."
"하하, 그럴 리가요."
사내의 너털웃음에 현정은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건축물대장을 확인하고 왔어야 했는디...'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었다.
"데크 위 파고라 있잖아요?"
"가설물 신고했어요."
"집 뒤에 창고가"
"신고했습니다."
"데크는?"
"데크가 놓인 땅은 대지로 형질 변경을 마쳤습니다만, 문제가 되나요?"
"아니요. 민원인이 뭔가 오해를 했나 보네요."
"네, 그럼 이만."
현정은 챙겨 온 줄자를 꺼내보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박 씨의 농막 앞으로 걸어온 현정이 가방에서 불법 가설물 철거 안내문을 농막 문짝에 붙였다.
"수영장이 어디 있다는 거여?"
"이거 말하는 것 같은데요? 흐흐"
변 씨가 가리킨 농막옆엔 비가림을 해둔 나무 선반장이 있었는데, 선반 한편에 에어 펌프로 바람을 불어넣어 사용하는 아이용 비닐 풀장 박스가 보관되어 있었다.
"니미, 수영장 좋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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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영씨가 전화했던데?"
태영이 하마터면 "꺅~!"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시침을 뚝 뗐다.
"혜영씨가 누구야?"
"저번에 우리 계약할 때, 김사장네 3층. 그 카페 사장이 정 혜영씨야. 그 뭐야... 우리한테 투자하라고 그랬던 아줌마 있잖아. 년 10% 이자 쳐준다고."
"아~! 그 아줌마."
태영이 모르는 척 슬쩍 눙치고 넘어가려는데, 미정이 되돌림을 한다.
"당신이랑 연락이 안 된다고, 연락 좀 달라고 하던데? 그 여자랑 뭔 일 있어?"
"뭔 소리야!"
태영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아, 소리쳐서 미안. 김 사장님 부동산에서 몇 번 마주쳤는데, 자꾸 돈 얘길 하길래, 차단했지. 뭘 믿고 투자를 해. 딱 봐도 사기꾼이잖아. 당신도 차단해."
'이런 얘긴 길게 해서 좋을 게 없다. 화제를 돌려야 한다.' 태영이 화제를 돌렸다.
"우리 콩쥐는?"
"응, 완치돼서 돌아왔어."
"다행이네. 앞으론 꿀밤 때리고 그러지 마. 불쌍하잖아."
"오키, 오키."
빵 만들기가 취미인 미정에게 오븐은 1호 보물이다. 미정은 2개의 오븐을 사용하는데, 하나는 20리터급의 꼬마 오븐이고, 나머지 하나는 최근에 구입한, 꼬마 오븐의 3배 정도 크기의 중급 오븐이다. 처음엔 꼬마 오븐을 애지중지 친 자식같이 아끼며, 심지어 오븐과 알 수 없는 대화까지 나누던 미정이었는데, 큰 오븐을 구입하고부터는 첩의 자식 대하듯 구박하기 시작했다. 발효 실패로 제빵이 잘 안 된 걸, 꼬마 오븐 탓을 하며 '에잇'하며 꿀밤 때리는 시늉을 하는 등 구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름을 '콩쥐'라고 지어줬다. 그런 불쌍한 구박데기 '콩쥐'가 얼마 전 덜컥 고장이 나버렸다.
"서방, 콩쥐가 이상해!"
"콩쥐가 왜?"
받아주는 태영도 제정신은 아니다.
"액정이 먹통이야."
"당신이 맬 구박하고, 쥐어박으니까 그렇지."
"큰일이야, '콩쥐'는 쓰임새가 많은데..."
그런 이유로 AS병원에 입원했던 '콩쥐'가 오늘 퇴원했다. 국내에 부품 재고가 없어, 이탈리아에서 물 건너오는데 무려 넉 달이 걸렸다. 태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미정에게 물었다.
"콩쥐 엄마, 시스템 보드가 바뀐 '콩쥐'가 우리가 알 던 '콩쥐'일까?"
"응?"
"몸뚱이는 예전 그대로지만, 사람으로 치면 두뇌가 바뀐 건데..., 두뇌가 바뀐 '콩쥐'를 과연 예전의 '콩쥐'라고 할 수 있을까?"
미정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음..., 아니지. 그럼 앞으론 '팥쥐'라고 불러야 하나...?"
"하지만, 비록 기억을 잃은 '콩쥐'지만, 이 스텐 몸뚱이는 당신과 4년을 함께하며 수많은 빵들을 구워온 '콩쥐'임이 확실하잖아. 여기 봐, 이 긁힌 자국. 당신이 청소하다 긁어먹은 상처잖아. 이건 우리 '콩쥐'의 몸뚱이 임에 틀림없다고. 그렇지? 그렇다면 이 녀석은 '콩쥐'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내가 태영이 아닌 건 아니잖아?"
미정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건 자기 말이 맞지. 그렇지... 그럼, 도로 '콩쥐'가...? "
순진한 건지, 미욱한 건지... 태영은 가끔 누워서 미정을 생각하면 이런저런 걱정에 잠이 안 왔다.
"결국엔 정신이냐, 육체냐의 문제인데 말이지..."
"어려운 문제네... '콩쥐'야...? '팥쥐'야...? 아하, 그럼 '콩팥쥐'?!"
태영이 이런 시답잖은 얘기로 일단 미정의 기억에서 '혜영씨'란 급한 불을 껐지만, 조속히 특단의 조치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다짐했다. 그의 귀때기가 시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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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이 이른 새벽 시간에 누구길래 이렇게 문을 두드리는지... 미정도 놀라 잠을 깼다. 불을 켜고 거실로 나가보니, 마 씨 노파가 파티오 도어 앞에서 유리문을 두드린다. 대화가 될리는 없지만, 습관적으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 어서 나오라고 손 짓을 한다. 뭔가 굉장히 급하다. 가만 보니 몸이 흠뻑 졌었다. 문을 열어주니 태영의 팔목을 잡아 막무가내로 잡아끈다.
"잠깐만요!"
손짓 발짓을 하는데, 소용이 없다. 이번에는 차탈 겨를도 없는지 빨리 따라 오라며, 앞서 뛰기 시작한다. 저만치 가서는 어서 오라며 손 짓을 한다. 노인네가 기력도 좋다. 태영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아니, 씨.., 새벽부터 뭐 하는 거야, 아, 진짜... 추워~!"
집에 도착하니, 문짝을 가리키며, 손 짓을 한다. 어서 들어가 보라고 하는 것 같다. 태영이 조심스레 문을 여니, 세면대가 바닥에 떨어져 있고 욕실벽의 고압 호스에서 물길이 치솟고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면기가 떨어지면서, 소켓과 세면대 수전을 이어주는 고압 호스가 파손된 것 같았다. 앵글밸브로 연결을 해뒀다면, 파이프가 터져도 쉽게 물을 잠글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시공했는지 알 길이 없다. 일단, 물을 잠가야 한다. 태영은 밖으로 나가 핸드폰 조명으로 수도 계량기를 찾아 밸브를 잠갔다.
"어쩐다..."
수도 계량기의 밸브를 잠가놓으면, 물을 사용할 수 없다. 손 짓 발 짓으로 '집에 다녀오겠다' 의미를 전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 씨 할머니의 맥가이버가 된 셈이다. 창고로 들어가 필요한 장비와 공구를 챙겼다. 미정과 태영은 둘이서 하나에서 열까지 직접 집을 지었고, 창고엔 집을 짓고 남은 이런저런 자재와 공구가 보관되어 있었다.
"보자, 스패너 두 개, 테프론 테이프, 임시 메꾸라 하나, 혹시 모르니까... pb파이프 조금이랑, 그리고... 암 25A밸브 소켓, 마감 소켓, 슬리브 두 개."
이렇게 부품과 장비를 비닐봉지에 담아 나오는데, 미정이 파티오 도어로 얼굴을 내민다.
"무슨 일이야?"
"세면대 연결 호스가 망가졌어."
"아..., 우리 파이프 여분이 있던가?"
수도 설비를 함께했기에 미정이 재깍 알아들었다.
"없어, 일단 메꾸라로 막아두려고."
"같이 갈까?"
"뭐 하러, 그냥 자."
"통역해야지~"
"일없슈~"
"얼른하고 와."
다시 사고 현장으로 돌아가니, 마 씨가 주방 수전 손잡이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물이 안 나온다고 난리다.
'알겠다', '기다리라'라고 손짓 발짓으로 마 씨를 진정시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따따따따 따따 딴~!' 태영이 맥가이버의 주제곡을 흥얼거리며 수리를 시작했다. 스패너로 소켓과 연결된 고압 호수를 풀고 보니, 벽의 소켓은 수나사다. 메꾸라도 수나사. 이래선 파이프를 막을 수 없다. 25A 밸브 소켓에 PB 파이프를 연결한다. 우선, 가져온 PB파이프의 양 끝에 스텐으로 된 '슬리브'라는 부속을 끼워 넣는다. 파이프의 한 끝에 PB관용 메꾸라를 끼워 놓고, 나머지 파이프 끝을 25A 암밸브 소켓 연결한다. 벽에 고정된 수소켓에 테프론 테이프를 감고, 25A 암밸브 소켓과 단단히 결합한다. 이것으로 긴급 수리는 끝났다. 다시, 밖으로 나가 계량기의 수도 밸브를 열었다. 돌아와 확인하니, 임시로 막아놓은 파이프에서 물은 더 이상 새지 않았다. 마 씨에게 전화기를 받아, 주소록에 1번으로 저장된 큰 딸에게 전화를 하려다, 그래도 남자가 편할 것 같아 3번으로 저장된 막내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상대방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저기, 아침부터 전화드려 죄송한데요."
"어! 깜짝이야! 엄마한테 무슨 일 있어요? 그런데 누구세요?"
"아니요, 별 일 아니고요. 저는 어머니댁 근처에 사는 김 아무개라는 사람인데요. 다름이 아니라..."
이런저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공구를 챙겨 나오는 태영에게, 마 씨가 눈에 익은 플라스틱 통을 내민다.
"뭐예요?"
열어보니, 고춧가루가 잔뜩 들어간 새빨간 열무김치가 들어있다. 하루 이틀새 만든 것 같다. 양념 냄새에 침이 고인다. 엄지 검지 중지로 김치를 집어 먹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저 먹으라고요?"
"응으응."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미정이 없어도 이 정도는 가능했다.
"잘 먹을게요. 근데, 이마가?"
화장실에서 다쳤는지, 마 씨의 이마가 살짝 찢어졌고, 피가 조금씩 비친다. 테이블에 놓인 약바구니에서 빨간 약을 찾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줬다. 밖으로 나오니, 날은 이미 밝아 있다.
"이 김치통은 뭘로 채워 돌려주나? 빈 통이면 난리 난리, 혼구멍이 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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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님, 안녕하세요."
마흔 정도의 필부가 부부의 땅을 밟으며 인사를 한다.
"누구시길래, 농투성이를 선생님이라 하세요?"
"예, 이번에 이장 입후보한 강이라고 합니다. 인사 차 들렀어요."
밀짚모자에 장화, 낡은 청바지, 검정 남방. 꼬락서니가 파종을 준비하던 태영과 비슷하다.
"커피 한잔 하시겠어요?"
"제가 옷이 지저분해서..."
"하하. 농투성이가 흙투성인 게 당연하죠."
태영이 옷을 털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스카소 에스프레소 머신을 켜고, 그라인더에 커피 두 스푼을 넣고 갈았다. 예열된 기계에서 마중물을 내리며 물었다.
"성함이 뭐라고 하셨죠?"
"예, 강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연배가?"
"서른여덟입니다."
"아, 전 마흔둘이에요. 듣기론 이 동네 사람이 아니라던데, 그런가요?"
"네, 제가 십여 년 전에 귀농을 했는데, 여전히 외지인 취급을 받네요."
얼음을 가득 넣은 커피잔을 강 선생 앞에 놓았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감사합니다."
"와, 향이 굉장히 좋네요. 고소한 게 맛있어요."
"어제 구운 콩이라 향이 괜찮을 거예요."
사내가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댁이 굉장히 소박하네요."
"빈농이라 가진 게 얼마 없네요."
사내가 작은 가방에서 부스럭 거리며 종이 쪼가리를 꺼내 태영에게 내밀었다.
"제 공약입니다."
"공약이라... 보자, '환경을 살리겠습니다. 더불어 잘 사는 마을로 나아가겠습니다.' 심플하네요?"
태영이 종이 쪼가리를 사내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네, 환경만 좋아져도 이 마을은 많이 바뀔 것이고, 더불어 함께라면 못 할 일이 없지요."
"그런가요? 실례지만, 누군가는 강후보님을 빨갱이에 전문 시위꾼이라 하던데요?"
"아닙니다. 그냥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꿀 뿐입니다."
"그게 빨갱이 아닌가요?"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강 씨가 묻는다.
"고구마를 주로 심으시나요?"
"고구마와 땅콩을 주로 심어요. 강 후보님은?"
"저도 고구마랑 이런저런 작물을 조금씩 심는데, 이것저것 벌려놓은 일이 많아, 농사가 엉망이네요. 하하."
"후보님도 농사를 짓는다니 물어봅시다. 환경을 살려 제가 덕을 보는 게 뭐죠? 고라니, 멧돼지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아시잖아요? 맘 같아선, 그 놈들 싹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말이죠, 우리 마을이 환경 보호에 애쓴다 한 들, 수도권에서 하루 동안 버려지는 쓰레기의 양을 생각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아시잖아요? 그 어마 어마한 쓰레기 말이에요."
태영은 부러 사내를 도발해 보았다.
"다른 후보인 박사장은 도로도 깔아주고, 쓰레기 차도 들어오게 해 준다고 했는데, 강 선생의 환경 어쩌고 보다, 박사장 같은 이장이 제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강 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뭐라고요?"
"맞는 말씀이세요. 저도 고라니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우리 마을이 용쓴다고, 세상이 좋아지진 않겠죠. 도로도 필요하고, 쓰레기 차가 들어오면 좋죠.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우리 마을의 생태가 좋아지고, 살기 좋아진다면, 많은 이들이 우리 마을로 귀농 귀촌 할 테고, 세수가 늘어나면 인프라는 자연스럽게 확충되겠죠. 그럼 다른 마을도 우리 마을을 벤치마킹..."
대학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야기를 쏟아낸다. 허무맹랑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 이 양반도 '몽상가'일 따름이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를 가져온 건 몽상가들 아니었던가. 옳은 방향이든 그릇된 방향이든.
"유세 잘 들었습니다."
"네, 커피 잘 마셨습니다."
"될까요?"
"네?"
"이장이요."
"아니요."
"그럼 왜 나왔죠?"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속이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어서요."
"건승하시고, 가끔 놀러 오세요."
"네, 환대 감사합니다."
무공 수련을 마친 미정이 그가 가기를 기다려 내려왔다.
"누구?"
"몽상가."
"몽상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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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
오늘은 현수막에 표시된 이장 선거일이다. 태영이 마을 회관에 들어가니, 십 수 명의 노인들이 의자에 앉아 있다. 누군가 그를 반기는데, 마을 총무를 맡고 있는 봉 씨다.
"잘 왔슈."
"네, 좀 늦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태영을 흘끔거리며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누구랴?"
"첨 보는디?"
명부를 확인하고, 주방에 설치된 기표실에서 날인후 두 번 접어 투표함에 넣었다. 평소엔 혹시라도 잉크가 번질까 싶어 용지를 접지 않는데, 이번엔 투용 용지를 두 번 접었다. 마을 회관 한 편에 놓인 소파에 앉아있는 누군가의 날카로운 눈빛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헤글러 용식이다. 아니, 저 양반은 마을 주민도 아닌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데, 다들 한 마디씩 한다.
"회관에 좀 자주 나와유."
"젊은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겨~."
꾸벅 인사를 하고 마을 회관을 나왔다.
"김 씨~!"
"네, 사장님."
따라 나온 김사장이 말한다.
"정마담이 연락 좀 하라는디?"
"그분 좀 이상해요. 자꾸 돈 얘기를 하는데, 제가 무슨 돈이 있어요? 뭔가 오해를 단단히 한 거 같아요. 사장님이 말씀 좀 해주세요. 저 별 볼 일 없는 빈농인 거 아시잖아요."
"갸가 그렇게 했슨께 지금에 온 겨. 돈도 있잖여, 뽕이여, 중독이여. 글고, 자네도 말여, 책임이 있는 겨."
"무슨 말씀이세요?"
"보게, 자네가 말여, 놀잖여?"
"네?"
"집에서 쳐 놀잖여? 글지?"
"아시잖아요? 저 밭농사 짓잖아요. 어제도 고구마 순 여덟 단을 심었는데... "
"300평이 농사면, 파리도 새여~!, 지나가는 개가 웃어~, 근디, 자네 차가 뭐여. 비엠따블유 아녀! 집에서 거시기 슬슬 긁으면서 쳐 노는디, 비엠따블유 몰고 댕기니께, 혜영이 가심이 두근 두근 하것어, 안 하것어?"
"그거 10년 넘은 똥차고, 이제 모닝 타는 거 사장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돈 있으면 모닝 안타죠."
"나도 그런 줄 알았지, 그랬는디...,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말여, 혜영이 년은 진작에 알고 있더라 이 말이여! 진작에 레이다에 걸려버린 거여! 그래서 자네가 타게트가 된 겨."
용식은 한쪽 콧구멍을 막고 나머지 구멍을 바닥으로 겨냥하고 '팽' 콧물을 날렸다.
"오해 마러, 나도 엊그제 들은 겨, 그거 듣고 알았슨께."
"뭘요?"
"새벽 2시가 넘도록 카페에 불이 켜져 있길래, 나가 내려가 봤지."
용식이 태영에게 들려준 얘기는 이랬다. 이틀 전,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잠이 깬 용식이 핸드폰을 보니 새벽 2시가 넘었다. 용식은 본인의 건물 옥상층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이런 상황이 익숙했지만, 오늘은 정도가 좀 심했다.
"시팔. 때가 어느 땐데, 핑클이여, 핑클이..."
옷을 챙겨 입고 카페로 내려가 보니, 문을 잠가두고 혜영과 방울이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고, 용필은 다른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용식이 출입문을 쾅쾅 두드렸다.
"가게 문 닫았어요~"
방울이 쳐다보지도 않고 혀 꾸부러진 소리를 한다. 용식이 다시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염병..., 방울 양! 나여! 김 용식이여!"
"어? 용식 오빠?"
용식을 알아본 방울이 비척거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오빠, 지금 몇 신데 온 거야?"
"몇 시고, 나발이고..."
용식이 카운터로 걸어가, 오디오 앰프의 볼륨을 줄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낼 장사 안 할 겨? 시간이 몇 신데 여즉 퍼 마시는 겨? 잠 좀 자자."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혜영이 용식을 바라보더니 엉뚱한 소릴한다.
"어? 용식 오빠네, 오빠 그거 알아?"
"몰러, 알아도 몰러. 방울아, 언넝 치우고, 시마이 혀."
"응, 안 그래도, 정리하려고 했어."
방울이 휘청이며 카운터로 들어갔고, 용식이 졸고 있는 용필을 깨웠다.
"용팔아, 용팔아, 정신 차리고, 누나 모셔라."
"음..., 그류..."
소파에 누워있던 용필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갔다. 혜영이 중얼거렸다.
"자기가 싫다는데 어쩌겠어... 아휴... 아파트가 두 채야."
용식의 눈이 반짝였다. '아파트?' 은근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물었다.
"와! 아파트가 두 채여? 혜영아, 누가 아파트가 두 채란 겨? 야그 좀 혀봐~."
"누구긴 우리 자기지... 강남은 마누라, 키키. 분당은 우리 자기..."
'니미... 말을 말든가...' 용식은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듣지 못할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우리 혜영이, 자기가 누굴까~?"
"있잖아, 주식도 꽤 많아..."
"와~ 부자네. 긍께, 누군지 말을 혀야지?
용식이 살살 얼러봤지만, 혜영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용식이 혜영을 흔들어 깨웠다.
"혜영아, 말을 하고 자야지, 누구 말하는 겨? 혜영아?"
"응...?"
"니는 자뿔면 그만이지만, 그라문 나가 잠을 못 자는 겨!"
혜영이 실눈을 뜨더니 중얼거렸다.
"누구긴 누구야? 우리 자기지..."
"야! 니가 자기가 한 둘이여? 녹촌읍 사내들은 다 자기잖여?"
용식이 혜영을 재촉하는데, 화장실에서 돌아온 용필이 혜영의 핸드백을 집어 들고 혜영을 깨웠다.
"누님, 누님."
"응...?"
"그만 가요."
"응, 우리 용필이. 응, 가야지..."
혜영이 용필의 부축을 받으며 카페를 빠져나갔고, 용식은 혜영의 '자기'가 궁금해 잠들 수 없었다.
"정마담이 자네 집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알더라 이거여!"
"예? 무슨 말씀이세요."
용식이 응큼하게 웃으면서 다 안다는 듯, 슬쩍 미끼를 던졌다.
"자네 말여, 안사람 명의로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자네 명의로 분당에 한 채, 합이 두 채 있지?"
"예? 사장님이 그걸..."
태영의 눈이 커졌다. '딱 걸린 겨!' 화들짝 놀라는 태영을 보고, 용식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있지? 분명히 있을 겨... 엊그제 정마담이 죄다 말한 겨~"
"아녜요. 무슨..."
"아니긴... 그게 다냐? 아녀! 글고 보면 말여, 자네도 너구리가 '형님~ 오셨슈' 할 겨. 워찌 그리 응큼한가?"
"아녜요. 다 헛소리예요."
"주식도 솔찮이 가지고 있다문서? 맞는 겨?"
"네? 아니 정사장이 그런 말도 했어요? 그 양반 제정신이 아니네요. 미쳤네, 미쳤어."
"삼성 맞지?"
"!"
눈이 커진 태영은 아무 말도 못 했고, 의문이 완전히 풀린 용식은 이죽거렸다.
"자네, 농협에 계좌 있으면 말여, 갸가, 자네 은행 예금도 죄 다 알 겨."
"다른 사람이랑 착각했겠죠. 제가 무슨..."
용식이 태영 주변을 이리저리 돌며 위아래를 훑었다.
"강남 좌파, 강남 좌파,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볼 줄은 몰랐네..., 이렇게 생겼고만...? 난중에 싸인이나 한 장 해줘~! 어따~ 신기하네."
"아니에요. 장난치지 마세요."
"어이, 강남 좌파, 나 들어가네~. 내가 부정 선거 방지하려고 왔다는 거 아녀~. 요즘엔 말여, 죄다 거짓부렁이여, 대선도 말이여, 표 차이가 그렇게 적은 게 말이 되냔 말여~! 싹 다 부정 선거여! 싹 다 조사해서, 조작한 넘들은 총살이여 총살! 여튼 나 들어가네."
태영은 용식과 헤어지고 한 참을 자동차에 앉은 채 출발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낮도깨비에 홀린 기분이 꼭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뭐지? 어떻게 알았지...?"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태영은 정마담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