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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
집 주변을 어슬렁 거리던 녀석은 검정 수고양이였다. 온몸이 검은 녀석이었는데, 주댕이 부분만 흰색털이었고, 그 흰털로 덮인 콧잔등 옆엔 십원 짜리 동전만 한 검은 털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나이가 상당했던 점박이는 고양이가 아니라 불도그로 착각할 만큼 우람한 어깨 근육을 가지고 있었고,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였는지 붙임성이 좋았다. 또 다른 녀석은 흰 털에 노란 털이 적당히 섞인 예쁜이였다. 삐쩍 마른 예쁜이는 눈이 알사탕만큼 크고 예뻤지만, 인기척만 느껴도 후다닥 도망칠 정도로 겁이 많은 녀석이라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사오 년 동안 꾸준히 보이던 녀석들이 언젠가부터 하나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뺀질 뺀질하게 생긴 얼룩이의 출현 빈도가 높아졌다. 짐작건대 얼룩이가 외지인 마을의 새로운 터줏대감 행사를 하는 듯 싶었다. 실제로 점박이가 비명을 지르며 얼룩이에게 쫓기는 괴상한 장면이 몇 차례 목격되기도 했었다. 작년 여름. 태영이 비닐하우스 한편에 설치해 둔 선반 위에서 물건을 꺼내려 사다리를 세우는데, 난데없는 하악질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태영이 선반 위를 올려보니, 얼룩이 녀석이 성난 얼굴로 태영을 경계하고 있었고, 얼룩이 주변으로 꼬물거리는 다섯 솜뭉치들이 보였는데, 태어난 지 적어도 보름은 지난 듯 싶었다.
"야~, 이 놈이 여기서 새끼를 낳았구나..."
다음날 비닐하우스에 가보니, 흔적만 남아있을 뿐 얼룩이 가족은 보이지 않았는데, 며칠 후 이웃집 윤 씨네 보강토 주변에서 놀고 있는 새끼들을 볼 수 있었다. 태영이 다가가자 녀석들은 부리나케 보강토 블록의 구멍으로 쏙 숨어버렸다.
"싱거운 놈들..."
정 많은 윤 씨가 어린 고양이들이 안쓰럽다며 한동안 사료를 챙겨줬는데, 똘이와 얼룩이가 다투는 일이 잦아져 겨울이 끝날 무렵에는 사료 주기를 중단해 버렸다.
"처음부터 주는 게 아니었는데... 걔들이 자꾸 우리 똘이를 괴롭혀... 우리 아저씨가 기침이 심해서 실내엔 안되고, 요즘은 똘이를 보일러 실에서 재운 다니까..."
그 후로도 얼룩이는 여전히 똘이의 사료를 탐냈고, 성장한 다섯 마리중 두 마리도 여전히 윤 씨 주변을 맴돌았다.
"자기야, 비닐하우스에 새끼 고양이 있어."
"또?"
미정의 특종에 태영이 비닐하우스로 향했다. 미정이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으스대며 말했다.
"저기 구석에 보이지?"
"구석?"
미정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틀밭의 구석을 보니 털뭉치들이 꼬물거리며 몸을 숨기기에 바쁘다. 태영은 비닐하우스 내부에 틀밭을 만들어, 여름에는 수박과 참외를, 겨울에는 상추나 양배추 따위를 재배했다. 미정이 작은 플라스틱 그릇에 우유를 담아 털뭉치들 주변으로 다가가니 비닐하우스 귀퉁이로 도망간 새끼들이 서로 몸을 숨기려 난리가 났다. 네 놈이 진한 회색, 한 놈 만이 어미와 같은 누런색이다. 우유가 담긴 그릇을 내려놓고 물러서 한 참을 지켜보니, 누렁이가 우유에 관심을 보인다. 코를 들이밀어 냄새를 몇 번 맡고, 혀를 담가 맛을 보더니 허겁지겁 핥기 시작하는데, 눈에 문제가 있는 듯, 한쪽 눈을 뜨지 못한다. 다른 한 놈도 머리를 디밀고 맛을 본다. 나머지 녀석들은 여전히 비닐하우스 구석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다. 태영의 뒤에서 '냐옹 냐옹'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얼룩이가 어쩔 줄 몰라 이리저리 서성이며 울어댄다. 태영이 슬쩍 문옆으로 물러섰다. 어미 얼룩이가 서둘러 하우스로 들어가나 싶더니, 우유를 핥고 있던 새끼들을 머리로 밀어내고 그릇의 우유를 허겁지겁 핥기 시작했다.
"웃긴 놈이네..."
한참을 멀찍이서 지켜보는데 우유를 다 핥은 얼룩이와 새끼들이 단체로 이동을 시작했다. 얼룩이가 한 녀석의 뒷덜미를 물고 앞장섰고, 나머지 네 놈이 어미의 뒤를 따르는 게, 꼭 이사를 가고 있는 것 같았다. 태영은 어린 시절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던 부모와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이사를 갈 것 까지야..."
얼룩이네 가족은 전과 같이 태영과 윤 씨네의 경계석인 보강토 블록으로 이사를 갔고, 윤 씨는 털뭉치들이 불쌍하다며, 사료를 줄 것임에 틀림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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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과 혁의 첫 만남은 21년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태영이 감자밭을 준비하는데, 검정 세단 한 대가 마을 입구로 들어왔다. 검은색 구형 벤츠였다. 용식은 부친에게 물려받은 클래식 벤츠를 몰고 다녔는데, 자동차에 '벤식이'라는 애칭까지 붙여주며 애지중지 유난을 떨었다. 누가 조금이라도 클래식 벤츠에 관심을 보이면 녹음해 둔 파일을 실행하듯, 같은 얘길 반복했다.
"요즘은 말여 개나 소나 벤츠 몰잖여? 근디, 벤츠라고 다 같은 벤츠가 아녀! 클라스가 다르단 말여. 머시 다르냐? 요즘 벤츠는 말여, 미국서도 맹글고 헝가리서도 벤츠를 맹근다 이거여! 근디 말여, 미국에서 맹근 벤츠가 밴츠여? 아니여. 우덜 같은 벤츠 마니아는 말여, 독일에서 맹근 거 아니면 인정 안하는 겨. 우리 벤식이는 오리지날 메이드 인 저머니라 이거여. 우리 벤식이 생일이 쌍팔년이여! 사람 나이로 치면 서른이 넘은 겨, 근디, 엔진 소리가 말여, 고롱~고롱~ 한 것이, 갓 난 얼라들 숨 쉬는 소리 맹크롬 조용~하단 말여. 이게 바로 메이드 인 저머니여! 그거 아는가? 전두환이가 타던 벤츠도 우리 벤식이랑 형제여. 야 타고 장날에 나가잖여? 쭘마들이 환장에 환장을 하는 겨~! 헌팅 백 프로 성공이여! 우리 벤식이는 효잔께, 무조건 고급유에 손세차여~!"
클래식 벤츠에서 내린 김사장이, 태영에게 손을 흔들며 안부를 묻는다. 이번에도 호구를 하나 물고 왔다.
"김 씨, 뭐 하는 가?
"네, 씨감자 심을 준비하네요."
"여름 감자는 잘 안될 틴디."
"네, 그냥 해보는 거예요."
용식이 호구에게 소개할 매물은 태영네 주변 세 필지였다. 입구 쪽 필지, 태영의 밭과 접한 필지, 모퉁이에 위치한 지대가 낮은 필지. 태영의 밭과 접한 땅의 주인도 조금 별난 게, 땅의 기운이 본인이랑 안 맞는다며, 땅을 내놓는다고 했단다. 얼마 전에 봤을 때만 해도 본인이랑 찰떡궁합이네 어쩌네 했었는데, 아마도 성토 작업에 들어갈 비용이 만만치 않자, 땅을 내놓은 게 아닌가 싶었다. 현리는 흙이 귀했다. 어설프면 물린다. 호구를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니며 한 참 동안 땅을 소개한 용식이 소리쳤다.
"김 씨, 나 이만 가네~, 아직도 안사람 학대하고 그러는 가? 그럼, 안되네."
태영은 미정과 둘이서 직접 집을 지었는데, 용식이 간혹 들러서는 태영이 미정을 혹사시키느니, 학대를 하느니 마느니 농담을 하곤 했는데, 여전히 저따위 농지거리를 지껄였다. 돌아서던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정마담이, 자네 한 번 봤으면 하던데? "
"네? 제가 그분 만날 일이 뭐가 있어요?"
"뭐긴 뭐여, 돈이지. 전에도 말혔지만, 갸가 돈거래는 확실 혀."
"에이~, 제가 무슨 돈이 있다고요. 들어가세요."
김사장은 태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에 올랐다. 김사장이 마을을 빠져나가고 한 시간 즈음 지났을까, 이번에는 푸른색 뉴비틀이 마을로 들어왔다. 태영이 살고 있는 현리만 해도 하루 24시간 내내 사람 구경이 어려웠다. 거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도로는 물론 어디서도 인적을 찾아볼 수 없다. 현리에서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녹촌읍 정도는 나가야 사람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진공의 환경에서 정적을 깨뜨리는 외지인이나 차량을 발견했을 때의 호기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것도 무려 푸른색 뉴비틀이었다.
뉴비틀에서 내린 외지인이 감자를 심고 있는 태영에게 다가왔다. 흘끔 보니, 조금 전 헤글러에게 귀때기를 물려 땅을 보고 간 호구다. 'J ' 로고가 찍힌 커다란 종이컵을 양손에 들고 있던 호구가 오렌지색 한화 이글스 야구모자를 벗으며 태영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태영이 네댓 살 어려 보이는 호구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거만하게 인사를 했다. 여긴 태영의 나와바리니까.
"저기 좀 전에 땅 보러 왔던 사람인데요."
"네."
태영이 네기에 기대어 짝다리를 짚고는 호구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며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낯선 호구는 30대 중후반으로 보였는데, 키가 훤칠했고, 생김새가 반듯한 것이 무척 호감 가는 외모였다. 진갈색 뿔테 안경, 레드 제플린 앨범 재킷이 프린트된 흰색 티셔츠에 슬림 핏 청바지, 흰색 나이키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잘생긴 호구가 양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 하나를 태영에게 건넸다.
"얼음이 거의 녹았네요. 그래도 커피 한 잔 하시죠."
"아이고, 뭐 이런 걸... 감사합니다."
거만하던 태영의 태도가 커피 한 잔에 다소 부드러워졌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고..., 세상사가 그렇지 않던가.
"부동산 사장님이, 선생님도 몇 해 전에 귀촌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네. 한 3년 됐죠."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 향이 좋았다.
"부동산 사장님은 인심 좋고, 공기 좋고, 다 좋다고 하는데, 뭐 업자들이야 당연히 그렇게 얘기할 테고, 주민분에게 어떤지 좀 여쭤보고 싶어서요."
'현지 조사라, 완전 호구는 아니구먼.'
"선생님 연배가 저랑 같다고도 들었어요."
"그래요?"
"잔나비 띠 맞죠?"
태영은 자신보다 네댓 살은 어려 보이는 동갑내기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런가요? 이 동네에서 제 연배를 만나는 게 쉽지 않은데, 반갑네요."
"저도 반갑습니다. 혁이라고 합니다."
외지인이 오른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손이 지저분해서... 네, 김이라고 합니다."
장갑을 벗어 손을 몇 번 털어내고 땀을 바지에 닦았다. 혁의 손톱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태영은 흙투성이 손이 부끄러워, 어정쩡하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손이 지저분해서..."
"별말씀을요."
혁이 스스럼없이 태영의 손을 잡았다.
"제가 집 지을 땅을 알아보고 있는데, 이 동네는 어떤가 싶어서요."
"음, 여기가 생각만큼 공기가 좋진 않아요, 그리고 보시다시피 남향이긴 한데, 하필 동쪽 언덕을 개간한 땅이라 일조량이 적은 편이에요. 겨울에는 좀 더 심하고요. 그리고... 서풍이 굉장히 심하고... 보자, 또 뭐가 있나... 쓰레기 수거차가 마을 입구까지 밖에 안 와서 쓰레기 버리기가 번거롭고..., 아, 주변에 병원이 없는 건 아시죠? 종합 병원은 대략 한 시간 거리예요. 마트도 자동차로 십분 거리고. 음... 이 정도?"
"김 선생님, 담배 태우세요?"
"예? 예."
혁이 뒷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태영에게 한 개비를 건넸다.
"이것 참..."
혁이 주머니에서 꺼낸 라이터의 뚜껑을 열었다. '챙~' 맑고 투명한 쇳소리다. 혁의 얼굴에서 어떤 뿌듯함이 느껴졌다. 태영이 몸을 기울여 불을 붙였다.
가끔 땅을 보러 왔던 외지인들도 혁과 비슷한 질문을 태영에게 했다. 그들은 태영 같은 농투성이가 지껄이면, 중간에 끼어들거나, 아니면 '에이, 서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청정지역이죠. 일조량이야 요즘 단열만 잘하면 괜찮아요. 쓰레기야 뭐, 운동한다고 생각하죠.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반응했다. 그들은 태영에게 '그럴 거면 왜 물어보는 거야?'란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외지인뿐만 아니라, 그의 짧은 인생에서 만난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랬다. 태영 역시 그랬다. 그런데 이 사람은 조금 달랐다. 귀를 기울여 들었다.
혁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당겨 한 모금 물었다.
"지금 매물로 나온 필지가 총 세 곳인데, 전 입구 쪽 땅이 맘에 드는데 그 필지는 팔렸다고 하더라고요? 매물이 입구 옆 필지랑, 지금 사장님 밭이랑 붙어있는 땅, 그리고 저기 구석진 곳이 있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제가 땅 보는 눈이 없어서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그랬으면 이 땅 안 샀죠."
"하하, 그냥 아시는 만큼만 말씀해 주세요. 참고만 할게요"
태영이 좀스럽게 엄지와 검지로 담배를 빨았다.
"굳이 고르라면 강사장님 옆 필지를 살 것 같아요. 구석진 곳은 볕이 너무 안 들고, 지대가 낮아서 배수도 안 좋고, 이 땅도 구배가 있어서 성토를 하고 보강토를 쌓아야 하는데, 이 동네는 흙이 귀해요. 비용이 만만치 않을 거예요. 입구 쪽 땅이 일조량도 좋고, 상하수도 시설도 다 되어있어서 집 짓기는 개중 나을 것 같아요."
"부동산 사장님은 구석 쪽 땅이 안락하고 주변이 군땅이라 넓게 쓸 수 있어서 좋다고, 제일 났다고 하던데요?"
태영은 혁이 말한, 대나무로 뒤덮인 땅으로 걸어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사장님이야, 우선 안 좋은 땅부터 팔려고 하는 거죠 뭐. 저한테도 똑같이 말했었어요. 이 땅이 굉장히 포근한 느낌이 있긴 한데, 지대가 낮다는 단점이 너무 커요."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죠?"
"무엇보다, 오수 문제죠. 보세요, 지대가 낮아서 기존의 하수도에 연결이 안 되잖아요. 연결을 하려면 성토를 높이 해야 하는데, 비용이 만만찮고. 이대로 쓰려면 구거를 이용해야 하는데, 바로 옆이 논이라 분쟁의 여지가 있고... 애초에 허가가 날지도 모르겠고..."
"음... 그렇네요. 구거가 옆 농지랑 연결되어 있네요."
혁이 빈 종이컵에 담배꽁초를 넣었다.
"김 선생님, 꽁초 여기에 버리세요."
"예? 아뇨 제가 버릴게요."
"넣으세요."
태영이 들고 있던 꽁초를 빈 컵에 넣었다. 김사장은 올 때마다 아무데나 꽁초를 버렸다.
"듣고 보니, 입구 옆 땅이 제일 좋은 것 같네요."
"땅값이 조금 비싸도 녹촌읍 주변을 알아보세요. 여긴, 인프라가 너무 부족해요."
"전 조용한 게 무척 마음에 드는걸요."
"뭐, 여기가 조용하긴 하죠. 누구 하나 죽어도 모를 걸요?"
"하하, 참고할게요."
"덕분에 커피 잘 마셨습니다."
혁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자동차로 걸어갔다. 태영은 마을 입구를 빠져나가는 그의 하늘색 비틀을 보면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외모가 중요하다고, 잘 생기고 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21년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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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 집이에요?"
"전 집에서 백 미터 이상 떨어지면, 그때부터 숨이 가빠져요."
"하하, 놀러 가도 돼요?"
"네, 설마 빈 손으로 오는 건 아니죠?"
소파에 앉아, 기타를 튕기고 있는데, 혁이 와인을 한 병 내민다.
"오늘 주말이에요?"
"아니요, 화요일. 오늘 휴가."
'요일도 모르면..., 너무 배짱이 같은가?' 태영이 후회했다.
"무슨 일 있어요? 피 같은 휴가를 그냥 쓰진 않았을 테고."
"날씨가 좋아서, 그냥 아프다고 핑계 대고 안 나갔어요."
"그러다 저처럼 되는데..."
"김형처럼 사는 것도 좋죠. 미정씨는?"
"위에서 무공 수련 중이에요."
태영이 오프너와 와인잔을 가져왔다. 2015년 산 까쇼인데, 처음 보는 브랜드다. 만 원 미만의 싸구려 와인만 구입하는 그로선 모를 수밖에.
"2015년이면, 꽤 오래됐는데... 비싼 거 아녜요?"
"누가 준 건데, 저도 잘 몰라요."
"그럼, 이건 수연씨랑 나중에 같이 마시고, 맥주나 한잔해요."
"괜찮아요. 집에 한 병 더 있어요. 오프너 주세요. 제가 딸게요."
"음... 그럼, 그렇게 해요."
"미정씨는?"
"우리 미정이는 술을 못 마셔요."
태영의 일렉 기타를 살펴보던 혁이 물었다.
"근데, 이거 깁슨 레스폴이네요? 고가품인데..."
"아녜요, 짭슨이에요."
"아닌데..."
'뿅!'소리와 함께 크로크 마개가 열렸고, 와인이 '꼴~꼴~꼴~' 소리를 내며 잔에 담겼다.
"음, 스멜~"
태영은 와인잔을 충분히 흔들어, 한 모금을 입에 넣었다.
"와~! 부케가 장난이 아닌데요. 묵직한 바디감에... 맛과 향이 다양해요. 짭짤, 새콤, 약간의 단맛... 스트로베리, 스모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들을 되는 대로 지껄였다. 기대에 부흥하듯 와인 맛이 발군이다. 언젠가 태영의 큰 처형이 보내준 고가의 와인이 생각나는 맛이다.
"네, 맛이 괜찮네요."
"잠깐, 와인에는 음악을 곁들여 줘야... 펫 매스니? 쳇 베이커? 김형이 좋아하는 제플린은 와인과는 좀 아닌 것 같고..."
"음, 쳇 베이커요. 근데, 핑크? "
그가 뒤집어 놓인 태영의 핑크색 갤럭시폰을 보고는 묻는다. 태영이 유튜브에서 쳇 베이커를 검색해서, 블루투스로 스피커와 연결했다. 쳇 베이커가 젊은 시절에 부른 '블루 룸'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사람의 발성 기관으로 만들어진 소리는 그 어떤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보다 훌륭했다.
"이거 갤럭시 10인데, 저희 큰 처형이 쓰던걸, 얼마 전에 받은 거예요. 핑크가 제 취향은 아니에요."
"그렇구나. 처형이랑 사이가 좋은가 봐요. 저는 처형이 없어서 부럽네요."
"아내가 좋은 거죠."
태영이 와인잔을 한 참을 흔들고는 부케를 빨아들였다. 언젠가 미정이 언니에게 태영이 중고 폰을 쓴다고 얘길 했는데, 그 이후로 처형이 폰을 바꾸면, 쓰던 폰을 태영에게 보내줬다. 그러면, 태영이 중고 거래가를 알아보고 처형 계좌로 보내줬다. 누구에겐 이런 상황이 굉장히 어색할 수 있겠지만, 태영에겐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김형, 저기 있잖아요..."
"네, 말씀하세요."
혁이 뭔가를 말하려는데, 무공 수련을 마친 미정이 일층으로 내려왔다.
"혁씨 오셨네요."
"네, 잘 지내시죠?"
"네. 덕분에요."
"안주도 없이 와인을 드세요? 이 양반아, 뭐라도 꺼내지."
"아냐, 와인은 곁들임 음식이 필요 없어. 그럼 와인 버리는 거야."
순간, 대화가 끊기고 어색해졌다.
"혁씨, 제가 어제 묘한 경험을 했어요. 아마 말해도 못 믿을 거예요."
"무슨 재미난 얘길 하려고요?"
태영이 다리를 꼬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저기 하사장님 댁에 '똘이' 있잖아요. 모르시나? 페르시안 찡코 고양이요. 알죠? 어제 점심 무렵 그 녀석이 부뚜막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살금살금 몰래 다가가서 똘이를 잽싸게 끌어안고는 괴롭혀주기 시작했거든요. 걔는 끌어안고 있으면 되게 싫어하거든요.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리는 게 무척 재밌어요. 순둥이라 물거나 할퀴지도 않아요. 똘이를 한참 동안 괴롭히고 있는데, 갑자기 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야, 그만 좀 해!' 이러는 거예요."
"예? 누가요? 똘이가?"
"예. 그렇다니까요, 저도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한 동안 '원래 고양이가 말을 했나?', '혹시, 꿈꾸는 건가...?' 이렇게 생각을 했다니까요. 우습죠? 한참을 멍 해 있다가, '에이, 잘못 들었겠지'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그 녀석의 찡코를 '통통통' 누르면서 괴롭히고 있는데, 똘이가 코 누르는 것도 엄청 싫어하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코 좀 누르지 마!" 이러는 거예요!"
"설마, 거짓말~!"
"진짜예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해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하니까, 똘이가 "야, 코 좀 누르지 말라고~!" 이렇게 짜증을 내는 거예요. 그때 마침 윤 씨 아주머니가 나오길래, '사모님, 똘이가 말을 할 줄 아나요?'하고 물어보니, '네?, 무슨 헛소리예요? 김 선생, 낮 술 했어요?'이러는 거예요. '아뇨, 사모님 잠깐 이리 와보세요.' 하고는 똘이한테 물었어요. '똘이야, 똘이야, 너 말할 줄 알지?' 하니까, 이 녀석이 너구리처럼 시치미를 뚝 떼는 거예요. 그래서 '똘이야, 아까 아저씨한테 한 것처럼 말해봐. 그럼 아저씨가 네가 젤로 좋아하는 '훈제맛 츄르' 줄게~.' 하면서 살살 구슬렸거든요? 그러니까 똘이 녀석 주둥이가 씰룩 씰룩 거리는 거예요. 옳커니! 이 놈이 실토를 하는구나! 윤 씨 아주머니도 뭔가 심상찮은 낌새를 느꼈는지, 잔뜩 긴장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래, 똘이야 아까처럼 말해봐. 아저씨가 츄르 줄게' 하니까, 이놈이 결심을 했는지, 드디어 주둥이를 여는데, '냐옹~ 냐옹~' 이렇게 고양이 소리만 내는 거예요. 윤 씨 아주머니는 '아휴~, 그러면 그렇지...' 이러면서 한심하게 쳐다보는데, 사람만 우스워졌죠 뭐..."
"하하하, 김형은 정말 별난 사람이에요. 종잡을 수가 없어."
"진짜예요. 사실 처음이 아니에요. 전에도 한 번 말을 했는데, 뭐... 어차피 믿을 거라 기대는 안 했지만, 혁씨도 한번 해보세요.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어요."
"진짜예요?"
"진짜라니까요."
잠자코 듣고 있던 미정이 말했다.
"혁씨, 이 양반이 하는 말은 9할이 뻥이니까. 그러려니 하세요"
"허, 참..."
기분 좋게 취한 혁이 돌아가고 미정이 물었다.
"뻥이지?"
"똘이? 진짜야."
"진짜라고? 정말?"
"그렇다니까, 나도 너무 놀랐어, 정말 정말 정말이야."
미정의 눈동자에서 확신이 조금 옅어지고 설마가 약간 자리 잡았다. 조만간 똘이와 대화를 시도하는 미정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언제 왔는지 똘이가 데크 위에 앉아 태영을 감시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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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박 씨가 농막 앞에 설치한 데크를 뜯어내고 있다. 데크 철거 통보를 받은 모양이다. 데크를 뜯던 박 씨가 망치를 팽개치며 주변에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진짜 어떤 놈이야~!"
분을 삭이지 못하는 그에게 인사를 하기도 겸연쩍어 슬쩍 발길을 옮기는데, 옆에 서있던 오 씨가 태영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아저씨는 아니죠?"
"네?"
"누가 신고를 했으니 단속을 나왔을 것 아니에요?"
"저야 모르죠. 가끔 불시 단속을 하기도 하니까요. 저희도 단속반 왔다 갔어요."
오 씨가 태영을 훑어보며 빈정 거렸다.
"하긴, 신고한 놈이 '내가 그랬슈'하면 미친놈이지..."
"아주머니, 그러니까 애초에 법을 지키셨어야죠."
"아니..."
그녀가 뭐라고 얘길 하는데, 태영이 못 들은 척 집으로 향했다. 태영을 쏘아보는 오 씨의 눈매가 매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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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다다~ 다다다다~' 멀찍이서 집배원 홍 씨의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비닐하우스에서 땅콩을 까고 있던 태영이 손을 털고 일어났다. 홍 씨가 우편물을 챙기며 집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데크도 파고라도 창고도 그대로였다. '뭐여~! 여즉 그대로 아녀?' 집배원 홍 씨가 우체통에 우편물을 넣더니, 우체통 문짝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려는 듯 거칠게 닫았다. 마침 집배원에게 불어볼 것이 있던 태영이 홍 씨를 부르며 다가갔다.
"저기 우체부 아저씨~"
태영이 제법 콘소리로 불렀는데, 헬멧 때문에 듣지 못했는지 돌아보지 않았다. 태영이 가까이 다가가 외쳤다.
"저기요, 우체부 아저씨!"
정표가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큰 소리로 지껄였다.
"아니 말여, 집배원으로 호칭이 바뀐 지가 언젠디..., 대한민국 국가공무원을 뭘로 아는 겨..."
머쓱해진 태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죄송합니다."
홍 씨가 태영을 힐끔 보더니, 오토바이에 올랐다.
"뭔 일이유?"
"저기, 제가 편지를 보내려면 매번 읍 우체국에 가야 하는데, 혹시, 편지를 우체통에"
태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홍 씨가 태영의 말을 잘랐다.
"일읎슈."
"예? 무슨..."
태영이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홍 씨가 오토바이의 액셀을 힘껏 당겨,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졌다.
"뭐지? 저 친구 오늘 굉장히 까칠하네..."
평소 서글서글하던 홍 씨였는데, 태영은 영문을 몰라 멀어져 가는 홍 씨의 오토바이를 멀뚱히 바라봤다. 시티 100에 올라탄 홍 씨의 백미러에 자신을 바라보는 태영이 비쳤다.
"씨부럴 강남 새끼. 누나는 내 거란 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