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용필아, 배사장이 뭐래?"
"형님도 돈이 씨가 말랐다고..., 코인에 때려 박아서 융통이 어렵다고 하네요."
"잔금도 치러야 하는데, 돌겠네... 월요일에 내가 직접 가봐야 되나... 월요일에 시간 괜찮아?"
"네."
어플 일정에는 2월 15일에 조 행장, 3월 15일은 윤 이사장. 줄줄이 원금을 돌려줘야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지난달부터 금희도 원금 상환을 요구했다. 채권자가 원하면 6개월 안에 원금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으니, 별 수가 없다. 가뜩이나 공사 잔금 독촉도 골치가 아픈데, 이젠 금희까지 앓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혜영아, 재혁이가 내년에 결혼을 하잖여?"
"응. 9월인가 한다면서?"
"8월이여."
금희가 슬며시 혜영의 손을 잡았다.
"시청옆에 새로 짓는 아파트 있잖여? 그 아파트 101동 1023호를 우리 재혁이가 분양을 받은 겨. 말혔지?"
"그래. 알아."
"근디, 5월 말에 잔금을 치러야 하는디... 돈 나올 구멍이 읎네..."
"잔금이 얼만데?"
금희가 혜영을 바라보지 못하고 우물쭈물한다.
"금희야, 그래서 얼만데?"
"사, 사억 오천이여..."
"와~, 그 동네도 많이 올랐네. 나도 다 때려치우고 아파트나 몇 채 분양받을까?"
"혜영아, 그래서 말인디... 나가 맡긴 돈 있잖여..., 그 돈을 돌려줘야 할 거 같어. 미안혀~."
혜영이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5월이면 딱 6개월 남았네. 중도에 원금 찾으면 육 개월치 이자까는 건 알지? 괜찮겠어?"
"알지. 혜영아, 미안혀."
"금희야, 뭐가 미안해. 살다 보면 급전 필요할 때도 있는 거지. 그래서 내가 밥 벌어먹고 사는 거야. 용필아~! 중도 해지 서류 좀 가져다 줄래."
용필이 카운터 안쪽 캐비닛에서 A4 용지 두 장과 인주를 가지고 왔다. 혜영이 '중도 해지 각서'라고 인쇄된 계약서를 내밀었다.
"금희야 읽어보고, 여기랑 여기에 서명하고 지문 날인해."
"그려."
"내가 요즘 자금 사정이 좀 그래서 바로는 못주고, 계약대로 4월 말까진 돌려줄게."
"그려, 부탁 혀."
"며느리 될 친구가 간호사라고 했던가?"
"그려, 시청옆에 의료원 있잖여? 거 치과 간호사여."
"우리 금희는 이제 임플란트는 걱정 없겠네. 부럽다, 얘~."
"부럽기는..."
재혁의 오피스텔로 찾아온 금희가 밤새 준비한 이런저런 먹거리를 작은 테이블에 차려놓았다. 소고기를 듬뿍 넣은 김밥, 어묵 볶음, 오징어 채 무침, 참치 김치 볶음, 꽈리고추를 넣은 소고기 장조림. 보온병에 담아 온 소고기 뭇국을 대접에 따랐다.
"아들, 언능 먹어."
"엄마도 같이 드세요."
재혁이 절뚝이며 의자에 앉았다. 식탁을 바라보며 금희가 농을 쳤다.
"아녀, 엄마는 울 아들 먹는 것만 봐도 배 부른디, 밥까지 먹으믄, 배 터지는 겨."
재혁이 빙긋 웃었다. 금희는 아들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지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배 터지면 안 되죠. 잘 먹을게요. 엄마."
금희는 재혁이 시청에 근무하게 된 이후로 아들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이렇게 훤칠하게 잘났는디...' 얼굴을 바라보면 아들에게 미안해서, 절뚝이는 다리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부아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가끔 아들의 얼굴을 잊어버리면 어쩌나 싶어 슬쩍슬쩍 훔쳐보지만, 어김없이 닭똥 같은 눈물이 솟았다. 금희의 눈물샘은 도무지 마르질 않았다. 오늘도 재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흘끔흘끔 곁눈질하다 식탁에 놓인 김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런 금희의 마음을 아는 재혁은 말없이 식사를 했다.
"저기... 아들. 혹시라도 혜영이 이모가 물어보문, 엄마가 말헌대루 해야 하는 겨."
"엄마, 말씀드렸잖아요. 잔금도 2억 정도고, 대출은 은행에서 받기로 했어요."
"알어, 이건 다른 일이여. 아들은 몰라도 되는 겨, 엄마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겨."
"엄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이모한테 신세 진 게 많잖아요... 이 오피스텔 구할 때도 이모가 빌려줘서 구한 건데."
"알어..."
"저는 엄마가 이모랑 오래오래 친구로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려, 아들은 걱정하지 마러. 니는 은주 한티만 잘하면 되는 겨. 니 헌티는 은주가 잴이어야 하는 겨, 알재?"
"아닌디, 내는 울엄니가 잴인디?"
재혁이 농을 치고는 김밥을 입에 넣었다. 금희가 몰래 웃었다.
"엄마가 싼 김밥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가 않아요."
"내도 우리 아들 입에 밥 드가는 거 보잖어? 암만 봐도 좋은 거여~"
옆자리의 사내는 심하게 코를 골았다. 시를 벗어나 녹촌리로 향하는 버스 창밖으로 넓은 서해가 펼쳐졌다. 바다는 넓었지만, 그 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금희의 마음은 밴댕이만큼이나 점점 쪼그라들었다.
"우쨌든 우리 재혁이도 서울에 아파트 한 채는 있어야 하는 겨."
---------------
태영이 스위치를 눌렀고, 문이 스르르 열렸다. 실내로 들어서는데 진한 무스크 향이 태영의 코를 찔렀다. 하얀 페도라의 사내가 양팔을 소파 등에 올려놓고, 양다리는 쩍 벌린 채 앉아있었다. 검은색 기지 바지에 몸에 착 달라붙는 흰 와이셔츠를 입은 사내는 어깨가 떡 벌어진 게 보통 다부진 체격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접수를 마친 태영은 페도라 사내와 멀찍이 떨어져 간이 의자에 앉았다. TV에선 탈모제 광고가 흘러나왔다. 태영을 쏘아보는 페도라 사내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진료실에서 늙은 노인이 나오고 얼마 있으려니 간호사가 호명을 한다.
"정 용필 씨~"
진료실로 향하는 사내의 구두 뒤축에서 쇳소리가 울린다. '정 씨였구나.' 태영은 정마담과 페도라 사내를 남매 사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가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료실에서 '철썩, 철썩' 따귀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진료실 문이 열렸다. 걸어 나오는 페도라 사내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는데, 하필이면 태영의 눈이 그와 마주쳤다. 용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태영이 슬그머니 TV로 눈길을 돌렸다. 사내의 쏘아보는 눈길에 머리통은 이미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사내가 다가와 태영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형씨, 자주 보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손등에도 문신이 화려하다.
"누구신지...?
"나, 정용필이요. 나 알지?"
"모르겠는데요."
'모르겠다니...' 태영은 바보 같은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다.
"김 태영님~"
"네"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어깨를 누르는 힘이 어찌나 센지 도무지 옴짝달싹을 못하겠다. 용필이 손아귀 힘을 이용해서 태영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어깨가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이 전해졌다.
"아악! 아파요! 그만해요!"
슬쩍 힘을 빼는가 싶더니, 다시 그러쥐며 채근한다.
"김형, 자주 봅시다."
"윽~! 아야야. 그만해요!"
태영이 용필의 눈을 바라보며 소리쳤지만, 가슴은 '쿵쿵쿵' 방망이질 쳤다.
"다 큰 양반이 엄살은..."
용필이 씨익 웃는데, 오른쪽 송곳니가 누런 금니다. 태영이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진정하고 진료실로 들어가니, 늙수그레한 원장이 어색하게 웃는데, 양 뺨이 발갛게 부어있다.
----------
"김형, 지난달에 저한테 전화했었잖아요"
"네. 몇 번 했죠."
"아니, 빵 가져가라고요."
"아, 그랬죠. 전화했죠."
태영의 기억 속에 저장된 벌거벗은 몸뚱이와 무스크 향, 라이트 꺼진 자동차가 잇따라 떠 올랐다.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네? 아뇨, 빵만 전하고 왔는데요."
그들 사이에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예, 알겠어요."
"무슨 일이라도...?"
"아뇨, 수연이가 기분이 계속 안 좋은 것 같은데, 얼추 그즈음부터인 것 같아서, 혹시나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서 물어보는 거예요."
"아..., 제가 감정 빼고 드라이하게 말씀드리는데요, 문밖에서 식빵만 전달하고 바로 집으로 왔어요. 수연씨도 평소랑 다를 바 없었던 것 같은데..."
"네, 혹시라도 기분 상했다면 미안해요."
"아뇨, 아뇨, 기분 상할게 뭐가 있겠어요. 찜찜하면 물어보는 게 맞죠. 전화 잘했어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혹시, CCTV는 확인하셨나요?"
"그게 워낙 오래전이라, 녹화가 덮어씌워졌네요."
"그렇구나..."
"김형, 이만 끊을게요."
"네. 들어가세요.
핸드폰을 내려놓은 태영이 한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귤 먹을래?"
"응...? 그래"
미정이 싱크대에서 귤을 씻으면서 물었다.
"탱,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이런저런 생각."
귤을 씻어 건네는 미정에게 태영이 물었다.
"미정아, 만약에 말이야... 만약이니까 혹시라도, 오해하진 말고."
"탱, 뭔데 오버야?"
"처형네 사이가 좋잖아? 적어도 우리 눈에 비치는 모습은 그렇잖아?"
"뭐, 그 정도면 나이스지."
"그런데, 만약에 형님이 외도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언니한테 말해야지!"
미정이 조금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 순간, 당신이 말하는 그 순간부터 처형은 불행해질 거 아냐?"
"뭐, 당장은 그렇겠지?"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처형은 지금처럼 형님이랑 잘 지낼 텐데? 당신이 처형을 불행하게 하는 건데?"
"뭐, 그럴 수 있지만... 내가 말 안 해도, 언제 가는 알게 될걸?"
"아니지, 형님이 미래에 어떻게 행동할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어. 불륜 상대에게 실증을 느끼고 관계를 정리할 수도 있고, 처형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도 있겠지. 그 밖에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거야."
"아냐, 그래도 얘기할 거야."
"설사, 관계를 지속한다고 해도, 형님이 두 집 살림을 잘한다면, 처형은 모를 테고, 그렇다면 처형은 지금과 같은 안정적인 삶을 살 텐데?"
"아니, 그래도 난 말할 거야. 그런 관계는 오래 못 가."
"만약, 형님이 처형과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해도, 입 밖으로 꺼내기 전까지는 별 탈없이 지낼 확률이 높을 거야. 형님의 외도를 조금이라도 늦게 아는 게 처형에겐 좋지 않을까?"
"아니야."
"아니, 이유가 뭐냐고? 날 납득시켜 봐, 왜 말해야 하는지..."
"불결해! 무엇보다 약속를 어겼잖아!"
"'불결하다'는 당신의 관념속 가치 판단이지, 처형의 판단이 아니라고. 그리고 당신하고 약속한 것도 아니고, 처형과 형님, 둘 사이의 약속이잖아. 처형은 형님의 외도를 모른다니까?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아니지, 내가 알았잖아!"
"당신이 알았다는 게 왜 중요하지? 당신의 인지 여부는 사실, 처형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 그 사실을 처형에게 전할 때에만 영향을 주는 거지. 당신의 한마디에 처형의 삶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는 거야. 처형의 우주를 뒤흔드는 거라고. 그리고 당신은 그 결과에 대해서 상당한 책임이 있어. 그걸 알면서 언니에게 말하는 게 과연 옳은 행위일까?"
"그렇긴 하지만..."
"당신이 전하는 정보로 인해서 처형은 이혼을 택하거나, 아니면 형님을 용서하고 불신 속에 살아가겠지..."
"그렇겠지."
"갈라서면 지금보다 행복할까? 용서하면 지금보다 행복할까? 둘 다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아마도 그렇겠지만,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잖아?"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혼자 살거나, 더 좋지 않은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겠지. 그걸 바라는 거야?"
"글쎄..."
"미정, 결과적으로 당신이 언니를 불행하게 만드는 거라고."
"그래도, 알 건 알아야지"
"왜 알아야 하냐고? 이건 질병과는 달라... 알아서 좋을게 전혀 없는데? 마음은 고칠 수 없어."
"난 당신이 이상해."
미정이 양 손바닥으로 귀를 눌렀다 떼며, '아~' 소리를 냈다.
"아~아~아~ 안 들려~ 아~아~아~"
"당신이 처형을 사랑한다면, "
"아~아~아~ 안 들려~ 아~아~아~"
태영이 새빨간 미정의 입술에 검지를 붙이며 말했다.
"들어봐. 당신이 처형을 사랑한다면, 처형에게 사실을 전달할게 아니라, 우선 형님을 설득하거나, 형님의 외도가 한순간 지나가는 바람이길 바라는 게 조금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그럼, 아무것도 모르는 언니만 불쌍하잖아~!"
태영이 중얼거렸다.
"가끔은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어..."
삶이 숨겨둔 비밀들은 '비밀'로 남겨 두는 게 나은 경우도 있다. 태영이 그랬다. 대학 캠퍼스로 찾아온 친모는 그의 우주를 한 순간에 파괴했다. 미정은 시어머니 박 씨를 태영의 친모로 알고 있고, 박 씨도 태영이 자신을 친모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아서 좋을게 무엇이겠는가' 태영은 누구에게도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친모의 등장은 아버지를 증오하게 만들었고, 키워준 어머니를 불신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동생에게만...'이라는 편협함을 그는 가슴속에 새겼고, 어머니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은, 태영이 부모가 되길 거부하게 만들었다. 그의 알고리즘은 그렇게 작동했다. 단편의 정보만을 가진 태영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그가 아끼는 벗이 고통받지 않길 바랐고, 혁의 일상이 파괴되지 않길 바랐다. 수연의 외도가 '한 번의 실수 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그렇게 되길 바랐다.
-----------------
2023.02
'땅 땅 땅'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마 씨 노인이 파티오 도어 앞에서 엉거주춤 서 있다. 동네 토박이 마 씨 할머니는 장애인이다. 보청기 없이는 듣지도 못하고, '웅웅'거릴 뿐 말도 하지 못한다.
"무슨 일이세요?"
"응으응"
마 씨가 들고 있던 TV 리모컨을 가리킨다.
"리모컨? 리모컨이 왜요?"
리모컨으로 TV 켜는 시늉을 하고는, 손바닥을 휘졌는다.
"아, TV가 안 켜진다고요?"
"응으응."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기특한지, 태영의 등을 철썩철썩 때리면서 파티오 도어 밖으로 손을 잡아 끈다.
"넘어져요, 저 지금 밥 하는 중이에요. 이따 가볼게요."
태영이 손가락으로 밥솥을 가리키지만, 그가 뭐라 하던 '응응'거리며 태영의 손을 잡아 끈다. 이런 막무가내가 없다.
"그냥, 다녀와. 내가 마무리할게."
소란에 잠이 깬 아내가 거든다. 마 씨 노파의 집은 태영의 집 뒤편 야트막한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데, 남동쪽 방향 직선거리로 대략 1킬로미터가 조금 넘게 떨어져 있고, 도보로는 빙 둘러가야 해서 20여분 거리에 위치한다. 태영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오니, 마 씨가 자동차 문 손잡이를 흔들고 있다.
"차 타고 가자고요?"
"응 으 응"
태영은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지만, 이런 경우도 있다.
"잠깐만요. 할머니, 문 떨어져요. 그만 좀 흔들어요."
차키를 가져와 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조수석에 앉은 마 씨가 양손으로 운전하는 시늉을 하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킨다.
"운전할 줄 안다고요?"
"응으응"
"아니라고요?"
"응으응"
"한 줄 안다고요?"
"응으응"
"뭐라는 거예요..."
혁의 집보다 조금 늦게 지어진 마 씨의 집은 이 동네와도 마 씨와도 겉돈다. 한식 상차림의 한 복판에 놓인 햄버거랄까? 농투성이들 무리에 끼인 선비랄까? 핑크색 고급 서양 기와며, 고급 석재로 마감된 외벽, 넓은 잔디 마당. 도무지 어울리질 않는다. 어색하다. 현관을 지나치는데, 역시나 어질 하다.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러봤지만 TV가 켜지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리모컨의 배터리를 꺼내 가리키며 여분이 있냐고 손짓을 하니, 전에 사용하던 건전지를 여러 개 가져온다. 개 중 몇 개를 바꿔 끼우고 전원 바튼을 눌러보니, 그제야 TV가 켜진다. 얼핏 보니, TV 옆 작은 바구니에 조제된 약이 한가득이다. 태영이 손 짓 발 짓으로 배터리를 새로 사라고 전달을 해보지만, 제대로 전달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미정이 있으면 편했을 텐데...' 테이블에 놓여있는 운전면허 시험집의 여백에 '건전지 새로 사세요.'라고 적어 보여주니, 고개를 끄덕인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마 씨가 양 주먹에 가득 쥔 젤리 캔디를 내민다. 태영이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저 먹으라고요?]
[응 으 응.]
[잘 먹을게요.]
미정 부부가 집 짓기를 시작하고 3개월이나 지났을까, 작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부부의 자동차 앞을 누군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가로질러 뛰어가는 것 아닌가.
[뭐야!]
[뭐였어?]
[몰라, 깜짝 놀랐네.]
[뭐지? 여자 같은데...]
그런 일이 있은지 며칠 지나지 않아, 낯 선 노파가 태영의 건축 현장에 나타났다. 타정기로 OSB 패널에 못 질을 하던 태영에게 다가오더니, 나뭇가지로 바닥에 그리듯이 천천히 뭐라 쓰기 시작했다.
"마, 수..., 아니, 순, 희"
"아, 마순희!"
그가 읽자,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린다. '입모양을 읽은 건가?' 태영이 생각했다.
"아, 할머님 성함이 '마순희'라고요"
"응으응."
'응으응' 이 소리는 바로! 그렇다 그날 정체불명의 괴인이 마 씨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아이의 옹알이 같은 소리를 낸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젤리 사탕이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내밀면서,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킨다.
"저 먹으라고요?"
"응으응"
"네, 감사합니다. 저는 김 태영이라고 합니다." 하며, 나무 가지를 집어 바닥에 이름을 적었다.
"응으응"
알아 들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그렇게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마을에서 가장 먼저 그들 부부를 환영해 준 원주민인 셈이다.
"어떻게 된 거야?"
"리모컨 배터리가 다 돼서 그런 거야."
태영이 주머니에서 젤리 캔디를 꺼내며 말했다.
"이제 보니 마 씨 할머니도 복용하는 약이 한가득이더라."
"그렇겠지, 그 양반도 종일 일만 하잖아."
미정이 젤리를 까서 입에 넣는다.
"이거 호박 젤리네! 하오취~! 하오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