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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희와 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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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 che

민기가 서울로 이사 간 성일의 뒤를 따라 삼거리 다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이 계단도 참 오랜만

이여...'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디딜 때마다, 이젠 어디에 내놓아도 꿀릴 게 없는, 시청 공무원이 된 아들의

번듯한 얼굴이 떠올랐고, 동시에 사고의 순간도 머릿속에 펼쳐졌다.


8년 전.

민기는 삼거리 다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서둘러 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렸는지, 도기다시로 멋을 낸 계단은 반질 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오늘은 말여, 느낌이 좋단 말여~, 다 디진겨!"


레자 재킷 속 주머니엔 금희에게서 뜯어낸 오십만 원이 들어있었다. 다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금희다.


"시팔, 재수 없게..."


수화기 너머의 금희는 울먹이고 있었다.


"낙지야, 핵교 좀 가봐라."

"뭔 소리여? 지금 바쁜디..., 니가 가~"

"언넝 재혁이네 학교 좀 가봐. 내가 니한테 처맞아서, 허리가 빙신 아녀... 움직이질 못혀서 그려. 지발..."

"학교는 뭐 땜시?"

"글씨, 재혁이가 아덜 삥을 뜯었다는디... 아야야..."


담임선생도 평소 모범생인 재혁이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모르겠다며,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주의를 당부했고, 민기는 담임과 피해 학부모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교무실에서도, 집으로 걸어오는 지금까지도 재혁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큰길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민기가 입을 열었다.


"진짜 말 안 할 겨? 공부만 하던 넘이, 삥을 왜 뜯은 겨?"

"..."

"말을 혀 봐. 이유를 말해야 아부지가 어떻게 할 거 아녀?"

"..."

"니도 처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겨!"


성질 급한 민기의 손이 올라갔고, 재혁이 조소가 가득 담긴 표정으로 민기를 쳐다봤다.


"말하믄? 말하믄, 엄마 안 팰 겨?"

"뭐시여...?"

"안 팰 거냐고 묻잖여!"


재혁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니, 말하는 기, 그게 뭐여!"

"닌..., 쓰레기여."

"뭐여? 니 지금 애비한테 뭐라 한 겨?"

"엄마 대신 니 노름돈 마련했다고~! 이제 된 겨?"

"이 자슥이~!"


민기가 재혁의 뺨을 철썩 후려갈겼고, 재혁이 민기를 쏘아봤다.


"빙신아, 니 잘 봐라!"


아들은 민기가 말릴 새도 없이, 차도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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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기가 씩씩거리며 물컵에 냉수를 부어 벌컥벌컥 마셨다.


"환장하것네~!"

"뭐가?"


냉수를 한 잔 더 들이켠 민기가 숨을 크게 내뱉었다.


"아휴~"

"뭔데 그러는 겨?"

"좀 전에 삼거리 다방서 성일형을 만났는디..."

"뭐여~! 삼거리? 니, 미친 겨?"

"아녀! 내도 사람인디... 알잖여~. 노름 안 혀."

"그럼, 거긴 왜 기웃거린 겨?"

"성일형이 반갑다고 커피 한 잔 산다고 해서 간 겨."

"성일 오빠 돈벼락 맞고, 완전히 서울로 뜬 거 아녀? 건물주 라믄서? 그라믄, 혜영이네를 가야지, 뭐 할라고 삼거리 매상을 올려주는 겨."

"얘기 안들을 겨? 그만 혀? 승질나 뒈지겠는디..."

"아녀, 계속 혀 봐."

"성일형이 간척지에 땅이 많았잖어?"

"근디?"

"짱구가 성일형 땅 중에 쪼까난 거. 그거라도 하나 사놓으라고 했잖여, 사백 평 짜리. 기억나는 겨?"

"아러, 평당 구십인가했던 그 땅. 낙지 니가 지금 사면 상투라고, 혜영이한테 맡기는 게 낫다고 했잖여."

"아녀~. 난 그런 말 한적 없는디? 나 아녀~. 아녀, 아녀."

"혜영이가 은행보다 안전하다고 말한 게, 낙지 니여! 그래서 집 판 돈 혜영이 한테 맡긴 거 아녀~"

"그건 니가 하두 혜영이, 우리 혜영이 하니께 그런 거 아녀~!"

"맞는 말 아녀? 지금까지 혜영이 한티 꼬박꼬박 받아 묵은 이자가 얼만디..."

"그게 문제가 아녀, 요즘 현리 땅이 을맨지 알어?"

"백사십인가, 오십인가 한다문서?"

"나두 그런 줄 알았지... 그 형이 직불금인가 뭔가 땀시 왔다가, 얘길 들었다는 겨..."

"긍께, 을매라는 겨?"


민기의 눈에서 이글이글 불길이 일었다.


"놀라지 말어~, 삼백이여, 삼백!"


금희의 길게 쪽 째진 눈이 번쩍 뜨였다.


"뭐시여~! 참말이여? 용식이 오빠는 암 말 안던디?"

"저그들 끼리만 신난 겨! 우덜한테 말하문 뭐 할 겨? 나두 괜히 들은 겨, 속만 씨리고... 성일이형이, '그때 안 팔고 갖고 있었어야 했는디...' 이라문서 후회를 하는디... 근디 말여, 잘 생각해보문, 그 땅을 혜영이가 4억을 주고 샀잖여, 그게 3년 전이란 말여~! 그라문, 그 4억이 누구 돈이여? 누구 돈이여~! 우덜이 김밥 말고, 라면끼리면서 천 원, 이천 원 모은, 우덜 돈이여! 우덜 피 같은 아파트 값이라 이 말이여~! 근디, 그 땅이 지금 세배가 뛴겨... 12억이여! 12억! 그때 우리가 샀어야 혔는디... 글고 보면, 돈 버는 넘은 따로 있는 겨."


금희는 잠자리에 누웠지만, 옆에서 드르렁 거리는 민기와는 다르게 잠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였다. 언젠가 백오십이란 얘길 들었을 때는 그동안 혜영에게 받은 이자와 큰 차이가 없어, 그러려니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12억이라니... 그 땅을 샀더라면... 그 돈을 혜영이한테 맡기는 게 아니라, 땅을 샀더라면...' 민기의 한 마디에 금희는 자신의 복권을 혜영이 빼앗은 것만 같았고, 그동안 혜영에게 고마워하며 받아왔던 연 14퍼센트의 이자가 우습게 느껴졌다. 어제와 오늘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씨... 그거 우리 재혁이 땅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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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0


레오폴드 벤치에 앉은 혁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김형, 종교 있어요?"

"아뇨, 없는데요."

"미정씨도?"

"우리 미정이는 무협지를 좋아하니까... 소림사 불교?"

"하하, 근데 항상 '우리'를 붙이네요?"

"아, 미정이 성이 '우리'예요. 그래서 본명은 '우리 미정'이에요."

"에이, 농담도. 저는 만약에 신이 있다면, 그건 엄청나게 진보한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 아닐까 싶어요."


혁이 멀찍이 손가락을 뻗으며 말했다.


"김형, 저기 저 커다란 구름 있잖아요."

"예?"

"전, 저렇게 커다란 구름을 볼 때면, '저 구름 속에 거대한 비행 물체가 숨어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저도 그런데. 크크"

"김형도 그래요? 와~! 이거 반갑네요. 우주가 압도적 크기의 공간이니까, 인류 이외의 문명도 분명 존재할 거란 말이죠. 우주가 말이죠, 여전히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팽창하고 있거든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압도적 크기의 존재가 압도적 속도로 더욱 커져가는 거죠. 이건 상상의 범주가 아닌 거예요."

"와! 엄청나네요."

"그렇죠? 저도 주워 들었는데, 그런 압도적 크기의 우주에서 태양계에 속한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하진 않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분명 존재하겠죠."


"다만, 은하들 사이의 거리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잖아요? 그래서 현재 인류의 기술력으론 아직 그들을 찾지 못한 거지, 우리가 찾지 못했다고 지적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블랙 스완은 우리가 찾지 못한 거지, 항상 등장했거든요. 그리고 미지의 지적 존재들이 인류보다 월등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아니라고 단정 할 수는 없는 없잖아요."

"맞아요. 저도 지구인과는 다른 형태의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거라 생각해요."

"만약, 그들이 문명이 엄청나게 진보했다면, 마음만 먹으면 지구를 관찰할 수 있을 것 아니겠어요? 반대로, 지구의 문명 수준은 그들에 비해 한 참 뒤떨어져 있다면, 아직 그들을 발견할 수 없는 거고... 김형, 제가 가끔 비슷한 꿈을 꾸거든요? 서너 번도 더 꾼 것 같은데, 엄청난 크기의 외계 비행체들이 하늘을 뒤덮는 장관을 목격하는 그런 꿈이거든요. 그리고 우주선에서 밝은 광선이 내려와서 사람들을 끌어올려요. 근데, 저는 데려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나도 함께 가~!' 이렇게 외치다 꿈이 깨거든요."



혁이 땅콩을 입에 털어 넣었다. 혁은 7월에 임시로 머물던 달 방의 세간들을 옮겨왔고, 9월 말에 그의 아내가 현리로 이사를 왔다. 언젠가 부터 혁은 주말 오후엔 태영의 집을 찾았다. 그 둘은 캔맥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눴다.


"근데, 혁씨는 어딘가로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은가 보네."

"네? 아... 모르죠. 꿈이니까..."

"누군가 꿈은 욕망의 일그러진 구체화라고 하던데요?"

"몰라요."

"그런데, 주말에 이러고 있으면 수연씨가 뭐라 안 해요?"

"그 친구는 주말이면 집에 없어요. 친구들 만나서 쇼핑하고... 저랑은 좀 달라요. 미정씨는 어때요?"

"글쎄요? 우린 주말이란 개념이 사라진 지 오래라... 우리 미정이는 집순이라, 주로 무협지를 보거나,

무공 수련을 하죠."


혁이 다시 땅콩을 한 움큼 집었다.


"혁씨, 땅콩 챙겨 놨으니까, 잊지 말고 가져가요. 이게 제가 수확해서 오븐에 구운 땅콩이에요. 맛이 괜찮죠?"

"엄청 고소해요.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근데, 김형은 발포 맥주를 좋아해요? 항상, 발포 맥주만 있네요?"


그가 캔 맥주를 들어 보이며 말한다.


"이거요? 싸잖아요. 그냥 싼 맛에 마시는 거예요."


순간 혁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런 애처로운 표정은 사양이에요."

"그런 건 아니고요. 김형은 뭐랄까... 가식이 없어요."

"저, 가식 덩어린데요. 지금도 혁씨 물음에 움찔했어요. 안 그런 척하는 거지. 모든 건 선택이잖아요."

"선택이라..."


"제가요, 서울 살 때 테헤란로 쪽에서 근무를 했거던요. 평소 업무 스트레스를 좀 많이 받는 편이긴 했는데, 하루는 갑자기 심장이 엄청 뛰는 거예요. '두근두근두근.' 순간 '이러다 죽는 거 아냐?' 이런 생각에 무작정 사무실에서 나왔어요. 나와서 천천히 거리를 걸으니까 조금 진정이 되더라고요. 다음날 근처 병원에 갔는데, 멀쩡하대요. 괜찮다고. 근데, 언젠가부터 계속 어딘가가 불편한 거예요. 여기 아팠다, 저기가 아팠다, 어떤 때는 잠을 못 자고. 그래서 생각했죠. '이러다가는 제 명에 못 죽는다.' 뭐, 딱히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요. 회사에서 뭘 먹으면 항상 속이 쓰리고, 거북하고."


태영이 명치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일 년 넘게 점심을 못 먹었다니까요. 그냥 카페 가서 커피 한 잔으로 때우고 그랬어요. 우리 미정씨도 직장 생활은 지긋지긋하다고 하니까, 나름 몇 년 준비한 다음에 직장 생활 접고 이렇게 사는 거예요. 겨우 자급하는 텃밭 농업인을 직업으로 선택했으니, 적게 쓰는 방법 말고 뾰족한 수가 없으니까... 근데, 그거 아세요? 제가 5년째 이러고 사는데, 저희 재정 상황은 5년 전과 거의 변화가 없어요."

"정말요? 아니, 어떻게...?"

"저도 몰라요. 그냥 적게 쓰는 거예요."

"에이~, 누군 뭐 펑펑 쓰나요? 저는 매달 월급을 받아도 적잔데... 비결이 뭐예요?"


"제가 계산을 해봤어요."

"무슨?"

"저희 자동차 운행 시간요. 저희가 어디 다니는 걸 싫어하다 보니, 마트 다니는 게 전부거든요. 1년 동안 차량 운행 시간이 3일, 그러니까 72시간이 안 되는 거예요. 놀랍죠?"

"겨우 3일?"

"1년이 8760시간인데, 고작 72시간을 이용하는 물건에 큰 비용을 쓴다는 것이 저희에겐 합리적이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차 바꿀 때는 중고로 450주고 경차를 구입했어요. 이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하면서 비용을 줄이는 거예요. 흐흐. 그래서 커피도 생두 사서 직접 볶고. 제가 좀 별나죠... 대신, 우린 시간 부자예요."


태영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두 손으로 원두 볶는 시늉을 했다.


"저는 그게, 뭐랄까... 그러니까, 사십 대에는 직장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는 돼야 하고, 차는 뭐고, 집은 몇 평이고..., 그런 거 있잖아요. 저도 모르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더라고요."

"다들 그래요. 제가 별난 거죠. 혁씨는 여유가 되니까, 그래도 되는 거고. 저는 가난하니까 그러면 쪽박 차는 거고. 저도 장모님 댁에 가거나 하면, 좀 그렇긴 해요. 처남이나 형님이 다들 커다란 중형차를 몰고 오니까. 근데, 잠깐이거든요. 집 나와서 배웅하는 그 잠깐만 버티면 되는 거예요. 남 보이려고 제 처지에 빚내서 차를 살 순 없거든요. 그렇게 되면, 저는 원치 않는 노동을 해야만 한다는 말이에요~!"


'칙!' 혁이 캔맥주 뚜껑을 당겼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다고요~!"

"혁씨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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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나가 성일이 형한테 들었는디... 벌써 삼백이라 하던디..."

"안 그라도 진태성이랑 통화 한 겨. 늦어도 내년 말에는 시마이여. 성이 뭐라 했냐! 넘들은 주워듣고도 샀는디... 삼백이 끝일 것 같어? 아녀~. 시작이여."

"내가 이럴 줄 알았나..."

"허긴, 니가 언젠 내 말 들었냐... 용식이성도 두필지고, 혜영이도 한 필지 챙겼는디, 읍에서 니만 없는 겨."

"긍께... 뭔 수가 없을까나?"

"전에도 말했잖여. 누가 팔아야 살 거 아녀. 판다는 넘이 없다니께. 용식이 성한테 물어봐, 읎서."


금희가 통깨가 뿌려진 김밥 접시와 스텐 대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스텐 대접에는 채 썬 파가 둥둥 떠 있었고 아래엔 넓적한 어묵이 먹기 좋게 썰려 있었다.


"많이 드세유."

"제수씨, 번거롭게혀서 미안 시롭네..."

"아녀유."


장구가 대접을 들어 어묵 국물을 들이켰다.


"어따~, 시원타~! 혜영이 땅이여. 거밖에 읎어. 혜영이 한티 돈 돌리 달라고 지랄을 혀. 갸가 요즘 돈이 씨가 말랐슨께, 갸를 조져서, 내한테 넘기게 맹그는 겨. 성이 먼 말 하는지 알아들은 겨?"

"그니께..."

"민기야. 단단히 듣는 겨. 그나마 작업이 가능한기 혜영이여. 근디, 작아도 시세가 12억이여. 너그가 혜영이 한티 4억 빌려줬다고 했잖여, 그럼 필요한 게 8억인디... 그건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다 이거여. 진태성한테 변통을 하던지... 여까지 이해한 겨?"


민기와 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말여, 혜영이가 땅을 팔게끔 해야 할거 아녀? 돈이 있음 뭐 혀? 팔 넘이 있어야지. 갸가 지금 돈이 앵꼬여. 갸만 없냐...? 아녀. 시 전체가 씨가 말랐다 이 말이여. 돈 나올 구녕이 없다 이거여. 일단, 맡긴 돈 달라고 지랄을 하란 말여. 동시에 여기저기 소문도 내고 그러는 겨. 뭐라고 소문을 내느냐? 혜영이가 돈 띠 먹는다고 내는 겨. 갸가 돈놀이로 먹고 살잖여? 신용이 생명인 그런 아란 말여. 그럼, 갸도 돈을 갚을라문 급전이 필요할 거 아녀? 그런데 돈 나올 구멍이 없단 말이지, 그랑께 땅이라도 팔아야 하는디, 지금 급매로 팔릴 땅은 간척지 필지 하나밖에 없다 이 말이여! 그럼 그 땅을 나가 받것다~ 이 말이여."


얘기를 마친 장구가 어묵을 집어 우적우적 씹었다.


"긍께, 혜영이를 조져서 형한티 땅을 넘기게 하라는 거 아녀? 그럼, 형이 나한티 삼분지 일을 지분으로 넘기고, 맞제?"

"그려. 그거여."

"혜영이가 딴 놈 헌티 넘기면 우짤껴?"

"녹촌읍에 그 물건 받을 넘이 있간디? 읎서. 평당 삼백인디, 빙신이나 받는 겨... 나는 확실한께 받는 거여... 모르곤 못 사는 겨. 긍께, 니랑 재수 씨가 부지런히 소문을 퍼트리는 겨. 혜영이 년 목심줄이 뭐다? 신용이여. 먼 말인지 알아들은 겨?"

"오케이여, 난 성만 믿는 겨."

"진즉에 믿었어야지~!"


장구가 돌아가고, 민기가 그릇을 치우며 금희를 돌아봤다.


"짱구 저 새끼, 지 좋자고 우덜 이용하는 거여."

"지발, 형 한티 말 좀 조심혀."

"형은 니미..."


'텅~! 텅텅 텅" 스텐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크게 울렸다.


"금희야, 할 수 있것어? 혜영인디..."

"혀야지... 그 땅은 원래 우리 재혁이가 임자여. 지금이라도 받아와야지."

"그려, 그 땅은 우덜 꺼여."


3년 전 장구가 간척지 주변의 땅을 사라고 했을 때, 민기는 코웃음을 쳤다.


"얼마 전까지 15만 원도 안 하던 땅을 백만 원에 사라고? 저그들은 15만 원, 20만 원에 사들이고, 너구리 맹코롬 암말 않다가, 이제 와서 백만 원에 땅을 사라고? 상투 잡으라는 겨~!"

"뭔가 있으니께, 땅 값이 계속 오르는 거 아녀?"

"도박이 별거여? 그러다 인생 조지는 겨, 원래 계획대로 하는 겨. 혜영이는 담보도 있잖여."

"우리 서방은 그 머시냐..., 그려. 바른 생활 홍보 대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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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지야, 야채 두줄이여~"

"그려~"

"꼬다리 좀 먹지 말고~!"


민기가 지금은 금희의 잔소리를 들으며 김밥을 말지만, 그도 소싯적에는 번듯한 건물을 소유한 건물주였다. 미군 물자를 취급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읍내 사거리의 3층 건물을 형인 장구에게, 2층 건물은 민기에게 물려주었다. 민기의 건물에는 점포 3개가 딸려 있었고, 거기서 나오는 임대료만으로도, 세 가족이 그럭저럭 살만했다. 지금이야 '쭈꾸미' 혹은 '꾸미' 라고 불리지만,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금희를 '조 사모' 혹은 '조 사모님'이라고 칭했고, 다들 시집 잘 갔다고 부러워했다.


"저기, 홍석 언니, 5일이 셋 날인디, 벌써 8일이여... 이러면 곤란혀유."

"조 사모, 뭔 소리여?"


뽀끄레 미용실에서 머리를 말고 있던 홍석 엄마가 뚱한 표정으로 금희을 바라봤다.


"뭔 소리긴, 월세 달라는 소리유~."

"줬잖여?"

"은제? 뭘 줘유? 입금이 안 됐는디..."

"사장님이 5일 날 받아갔는디? 봐 봐, 확인증도 받았어."

"애들 아빠가? 참이여?"

"끄레야, 저기 내 가방. 파마약 조심해야 하는 겨."


미용실 주인 끄레가 안쪽 살림방에서 홍석 엄마가 애지중지하는 쇼퍼백을 가져왔다.


"보라고~"


홍석 엄마가 A4종이를 한 장 내미는데, 민기 필적이 맞고, 지장도 찍혀있다. 몇 달 전에 갑작스레 철물점을 그만둔 민기가 일 할 생각은 않더니, 이젠 금희에게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임대료를 받아갔다.


한 배에서 나왔지만, 형제는 달랐다. 이재에 밝고 약삭빠른 장구에 비해 남편 민기는 미욱하긴 했지만 나름 번듯한 허우대에 성실한 사내였다. 금희는 졸업도 하기 전에 덜컥 임신을 했고, 민기네 집에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민기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군입대를 했고, 전역한 후에는 아버지의 철물점에서 형과 같이 가업을 이었다. 장구는 돈과 거래처를 관리했고, 민기는 자재 관리와 잡무를 담당했다. 자연스럽게 장구는 아버지를 이어 동네에서 돈 좀 만지는 사업체 사장들과 교분을 나누며 어울리게 되었지만, 민기는 뒤에서 자재를 관리하거나 배달이 전부이다 보니, 이웃들과 가족들도 자연스레 민기를 철물점의 직원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부친의 사망 이후엔 민기의 상황이 더 안 좋게 돌아갔다. 민기도 뭐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조금씩 처우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하루는 읍에서 건설업을 하는 최 씨가 아침 일찍 사무실로 들어왔다. 최 씨는 장구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음에도 장구에게 '님'자를 붙였다.


"박 사장님, 100미리 파이프 어디 있슈?"

"그건 민기한테 물어봐유."


최 씨가 옆에서 대걸레로 바닥을 닦던 민기에게 물었다.


"야, 낙지야. 들었지? 파이프 어디 있냐?"

"형님, 지가 낙지라고 하지 말랬쥬? 형이 사장이고, 지는 작은 사장인디, 그렇게 막 부르면 돼유?"


최 씨가 장구를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인마, 니가 왜 작은 사장이여! 사장님 장남이 버젓이 있는디~, 연우가 작은 사장이지. 웃긴 넘이네. 껄 껄."

"뭐라는 겨? 짱구 성, 지금 이 형이 뭔 헛소리를 하는 겨? 내가 작은 사장 아녀? 글지?"


장부를 훑던 장구가 쳐다보지도 않고, 다른 장부를 꺼냈다.


"성? 그렇잖여?"

"일이나 혀~"

"아녀...? 말 좀 혀 봐!"

"어, 이 사장님~."


장구가 가게로 들어오는 이 씨를 보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음날 민기는 결근을 했고, 다음날도 출근을 하지 않았다. 민기가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데, 장구가 찾아왔다.


"지금 아침 먹는 겨? 전화는 왜 안 받는 겨?"

"밥 먹잖여."

"그려, 그려, 묵고 말허자."


민기가 미역국을 몇 번 뜨더니, 수저를 놓았다.


"가만 생각을 해봤는디 말여, 나가 전역하고 꼬박 10년을 일했단 말여, 근디, 이제 보니께 암꺼도 아니더란 말이여. 공구점 명의도 성이고, 철물점 명의도 성이고... 난 뭐여? 그냥 직원인겨? 월급 받는 직원인겨?"


장구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길게 들이마셨다.


"말 돌리지 말고, 결론만 말혀."

"나 부사장이여, 아녀?"


장구는 올게 왔다는 생각으로 말했다.


"아녀. 니 조카가 부사장이여. 연우 내년에 고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일 시작할 겨."

"진짜 이럴 겨?"


밥상을 세게 내려치는 민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닌 부장혀~. 니가 서열 삼위여."

"성이 내한티 이럴 수 있는 겨! 전부 해서 셋인디, 서열 삼위면 젤 꼬라비 아녀... 지금 장난하는 겨?"

"상황 봐서 한 두 사람 더 고용할 겨."

"마지막으로 묻는 겨, 누가 부사장이여?"

"닌, 부장이여."

"니미, 조까라마이싱이여~"


민기가 밥상을 뒤집었고, 장구의 얼굴에 미역 조각이 튀었다. 장구가 얼굴에 달라붙은 미역 조각을 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데, 민기가 소리쳤다.


"야! 박 장구. 퇴직금 준비혀라~! 10년이여!"


이후로도 장구와 금희가 몇 차례 민기를 달랬지만, 결국엔 철물점을 그만두고 반년 넘게 빈둥거리던 민기가 언젠가부터 삼거리 다방을 들락거리기 시작했고, 그즈음 금희는 월세가 밀리던 월드 오락실을 내보내고 그 자리에서 '쭈꾸미 김밥'을 시작했다.


"민기야, 홍석 언니가 월세 받아갔다는디, 돈 우쨌냐?"

"몰러"

"돈 우쨌냐고 묻잖어~! 또, 노름혔냐?"

"몰른다는 말 몰러? 긍께, 퇴직금을 내놓으란 말여!"

"퇴직금 좋아허네~. 야! 니가 진작에 다 닦아 썼잖여!"

"뭐여~!"


'철썩'.

민기의 오른손이 금희의 뺨을 후려쳤다. 금희는 얻어맞은 뺨이 아니라, 마음에 생채기가 생겨버렸다.


10여 년 전, 혜영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금희는 장구의 6층 건물의 1층에서 분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희의 든든한 뒷배였던 2층 건물은 장구의 소유가 되어 버렸다. 민기는 건물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렸는데, 그 돈은 노름판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금희도 몇 번이나 이혼을 생각했지만, 재혁의 장래를 생각하면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려, 재혁이 결혼 까정은 참는 겨' 금희의 세계에선 자신이 빠진 재혁의 결혼식 풍경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장구가 금희의 흑기사가 되어주었다. 장구는 민기의 건물을 인수하는 대가로 민기의 노름빚을 갚아주었고, 방 두 개짜리 읍내의 작고 낡은 아파트를 금희의 명의로 얻어 주었다. 그리고 새로 인수한 6층짜리 상가의 1층 점포 중 하나를 무상으로 임대해 주었다. 금희에게 남은 돈은 장구에게 받은 민기의 퇴직금 삼천만 원이 전부였는데, 금희에게 그 돈 삼천만 원은 아들 재혁의 대학 자금이고, 멀리는 결혼 자금이었다. 몇 년이 지나 혜영이 돈놀이를 한다고 했을 때, 금희의 삼천만 원은 적금 통장에서 혜영에게로 건네졌다. 다달이 들어오는 삼십육만 원에 금희는 숨통이 트였고, 아홉 평짜리 낡은 아파트도 재개발 바람으로 시세가 조금씩 올라 새로운 희망이 보이나 싶었는데, 아들 재혁이 덜컥, 절름발이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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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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