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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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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 che

2022.05


"김 선생, 우리 차 타고 같이 가요. 설거지만 끝내고 갈 거야. 우리 아저씨는 오늘도 일찍 출근했어."

"아뇨, 오랜만에 자전거 좀 타려고요. 먼저 가세요."

"그래요. 그럼, 올 때는 같이 와."


미니벨로 두 대가 창고 천정 고리에 걸려 보관되어 있었다. 하나는 뮤 sl이고, 나머지는 커브 sl이라는 접이식 자전거다. 둘 다 10년이 훌쩍 넘은 자전거지만, 여전히 잘 달려주는 녀석들이다. 펌프로 자전거 바퀴의 바람을 빵빵하게 불어넣었다. 손으로 타이어를 눌러보면서 이 정도면 적당하다고 판단한 태영이 안장 높이를 조절했다.


"미정, 가자."


미정이 얇은 패딩을 걸치고, 흰색 벙거지 모자를 쓰고 나왔다. 태영이 비뚤어진 미정의 모자를 바로 씌워줬다. 이럴 때마다 태영은 '부모의 느낌이 이럴까?'란 생각을 하곤 했다.


"오랜만에 타는 거니까, 조심해. 안장 높이 맞추고."

"오키"


미정 부부가 마을을 빠져나가는데, 윤 씨의 흰색 자동차가 지나가며 경적을 울렸다. 집에서 5킬로 정도 거리에 위치한 현리 초등학교를 향해 열심히 페달을 밟는데, 저만치 앞에서 누군가 차를 막고는 삿대질을 하고 있다. 지나치면서 슬쩍 보니, 윤 씨의 차를 마 씨가 가로막고 있다. 미정이 자전거를 세우려 하는데, 태영이 그냥 가자고 손짓을 했다.


"그냥 가, 그냥 가."


태영은 눈앞의 상황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마치 보기라도 한 것처럼 확신했다. 분명히 이랬을 것이다. 현리 초등학교로 걸어가던 마 씨가 도로를 주행하던 윤 씨의 차량을 보고는 막무가내로 차를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는 무작정 차에 타려고 했을 것이고, 윤 씨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설마?"

"나중에 윤 선생님한테 물어봐. 나는 '내 추리가 맞다'에 손모가지를 걸 테니까. 나도 전에 당했거든."


초등학교 주변으로 접어들자, 길과 농로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대부분이 늙은 노인들이다. 자전거를 운동장 한편에 세우고 자물쇠를 채웠다. 다행히 투표를 기다리는 줄이 길지는 않았다. 선거인 명부를 확인하는 책상에 혁이 앉아 있었다.


"혁씨, 수고가 많아요."

"수고는 무슨. 선생님, 신분증 주시죠?"

"넵."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데, 윤 씨를 만났다.


"아휴~, 말도 마! 내가 진짜! 미정 씨, 기다려. 같이 가."

"네."


자전거를 트렁크에 넣을 수 있도록 접어놓고, 혹시나 마 씨 노인의 눈에 띌까, 투표소에서 멀리 떨어진 운동장 의자에 앉아서 윤 씨를 기다렸다.


"내가 읍에 갈 때, 이 길로 다니거든. 근데, 애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한 번도?"

"응. 조만간 폐교될 것 같아."

"그렇게 되겠네. 앗! 마 씨 할머니다!"


미정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보니, 마 씨가 흰색 자동차의 문을 힘차게 닫더니, 투표장으로 걸어갔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행패를 부려 차를 얻어 타고 오는 것 같다. 도무지 마 씨의 심술이 이해가 되지 않는 태영이었다. 미정이 물었다.


"마 씨 할머니는 누구에게 투표했을까?"

"그러네, 진짜 궁금하네. 당신이 나중에 물어봐."


윤 씨가 자동차 트렁크를 열어주며 분풀이하듯 말을 쏟아내는데, 표정이 여간 억울한 게 아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도로로 나와선 차를 막아서는 거야. 그리고는 문 손잡이를 잡고 흔드는데..."

"내 말이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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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김형은 누구 찍었어요? 뭐 누군지는 뻔하겠지만..."

"저야 우리 편 뽑았지요."


혁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리 편? 우리 편이 누구예요?"

"제가 농업인 겸 투자자니까, 노동자와 자본가를 편들어주는 사람이 우리 편이죠. 그리고, 엄연히 비밀 투푠데, 김형은 공무원이 돼가지고 자꾸 물어보면 어째요? 공무원 수칙 위반이에요."


혁이 태영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


"하하,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를 편드는 정당이 어디 있어요? 하여간 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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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배추는 유독 벌레 피해가 심해 손이 많이 가지만, 저장성이 좋고, 쓰임새가 많아, 미정 부부에게는 아주 유용한 먹거리다. 태영은 아침 식사로 양배추 달걀부침을 만드는데, 조리법은 간단했다. 굵은 방울토마토 10개를 적당히 썰고, 마늘 3개, 양파 1/8쪽과 양배추 100그램 정도를 얇게 채 썬다. 준비한 재료를 볼에 담고 달걀 2개와 소금, 후추를 적당량 넣는다. 준비된 재료를 기름 두른 팬에 부어준 후, 뚜껑을 닫고 약한 불로 15분 정도 조리하면 그럴듯한 요리가 만들어진다. 오늘은 그런 유용한 양배추 모종을 하우스에서 틀밭으로 옮겨 심는 날이다. 지금 옮겨 정식하면, 두 달 후에는 예쁘고 먹음직스러운 양배추를 수확할 수 있다. 태영이 하우스에서 한 뼘 크기로 자란 양배추 모종을 뿌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크게 떠서 틀밭에 옮겨놓으면, 미정이 오십 센티 정도의 간격으로 미리 준비해 둔 틀밭에 정식을 했다. 스무 포기 정도를 옮겨 심었을까, 깔끔하게 차례입은 두 명의 여성이 혁의 집을 지나 걸어오는 모습이 태영의 눈에 띄었다. 태영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미정, 청교도 십자군이야! 어서 피해~!."

"응? 그래."


둘은 후다닥 먼지를 털고,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몸을 숨기기 바쁘게, 십자군이 현관문을 '똑똑' 두드린다. 중세의 십자군이 칼과 방패를 들었다면, 지금의 십자군은 소식지를 들고 다녔다.


"계세요?"


아무 대답이 없자, 십자군은 좀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파티오 도어의 사각에 숨은 태영과 미정. 태영이 미정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쉿'이라고 속삭였다. 하마터면 미정이 웃음보가 터질 뻔했다. 양손으로 손그늘을 만든 십자군이 이교도를 찾으려 매의 눈으로 파티오 창을 통해 실내를 훑어본다. 부부의 집엔 커튼이 없었다. 다른 한 명의 십자군은 침실 창문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태영은 13세기 비잔틴 성벽에 숨은 동로마인이 된 것만 같았다. 창 주변으로 그림자가 몇 번 지나치더니,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간다. 방 창으로 슬며시 머리를 내밀어 보니, 이번에는 아랫집 윤 씨가 청교도 십자군과 공성전을 벌이고 있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격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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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닫힌 카페는 어두웠지만, 안쪽 자리엔 붉은 스탠드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카페의 구석엔 여러 사람이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소파로 좌석을 마련해 두었는데, 가끔 그곳에서 은밀한 술자리가 벌어지곤 했다. 이번에는 우체부 홍 씨가 넓은 소파의 중앙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이런저런 안주와 여러 종류의 술병들이 놓여있었는데, 30대 후반의 노총각 홍 씨는 이미 심하게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혜영은 유별나게 후각이 민감했는데, 정표의 독특한 체취는 혜영의 후각을 자극했고, 그러다보니 그를 대하는게 여간 힘들지 않았다.


"누님~, 지가 누님 사랑하는 거 알쥬? 풉!"

"알지, 나도 동생 사랑해~"


비쩍 마른 홍 씨는 평소 삼대 칠 가르마로 휑한 정수리를 가렸는데, 지금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돈하지도 못할 정도로 취해, 연신 입으로 '풉! 풉!' 거리며 눈앞을 가린 머리카락을 불어 넘겼다. 그의 휑한 정수리가 그대로 드러나 버렸다.


"지가 누님을 위해서 라문 못 할게 읎은 싸나이유~ 알쥬? 지 맘 알쥬? 지발, 안다고 말혀유~!"

"알아, 그러니까 이렇게 동생이랑 둘이서만 한 잔 하는 거 아냐, 자 받아. 키키"


흘러내린 옆 머리카락에 홍 씨의 얼굴이 절반쯤 가려졌고, 그 꼴이 우스웠던 정마담은 킥킥 웃으며 빈 잔에 양주를 따랐다. 홍 씨는 기세 좋게 술을 들이켰고, 정마담이 다시 잔을 채웠다.


"동생 술이 장난 아니네~"

"누님~! 풉!"


홍 씨가 혜영의 어깨를 붙잡고는 그윽한 눈으로 바라봤다.


"싸랑해유~!"


어깨를 잡은 손을 당겨 정마담을 와락 껴앉은 홍 씨의 숨이 거칠어졌다. 혜영이 숨을 참았다. 멀찍이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검정 페도라 사내가 의자에서 일어났지만, 정마담이 손짓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누님 지가 더는 못 참아유~! 풉!"

"우리 동생이 그동안 힘들..."


혜영이 입을 여니, 그녀의 코로 홍씨의 체취가 훅 밀려왔다. '웁'하고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왔다.



"누님~! 푸~~~"


사내가 소파 앞 낮은 테이블 위로 스르르 쓰러지는걸 혜영이 붙잡아 소파로 밀었다.


"동생, 내가 진짜 남자 얼굴 안보거든... 근데, 동생은 진짜 내 취향이 아니야."


정마담이 홍 씨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휑한 정수리를 덮어줬고, 멀찍이 앉아있던 용필이 소파로 다가왔다.


"용팔아, 창문 좀 열고, 이따 깨어나면 한 장 넣어서 보내."

"네."


2022.06


3월 초부터 시작된 공사는 큰 탈없이 진행됐다. 혁에게 감리를 부탁받은 태영도 역할에 충실했다. 건축주가 고용한 감리직이지만, 현장의 지배자는 모름지기 작업반장이다. 그와 일일이 대거리를 해봤자 공사 진행에 좋을 게 없다. 태영의 감리는 이렇게 진행됐다. 하루의 작업이 끝나고 작업자들이 철수하면 현장으로 내려갔다. 터를 파고 다져놓은 잡석이 적당한 크기인지, 골조 작업한 철근 골조의 간격이 일정한지 체크했고, 철근 이음 시공을 한 경우, 이음 철근의 용접 여부, 엇갈림 시공의 여부등을 확인했다. 이렇게 확인한 것들을 간추려 혁에게 수정할 것들과 다음 작업의 신경 써야 할 것 등을 미리 알려주면, 혁이 출근 전에 작업 반장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감리가 이뤄졌다. 처음에는 건축주를 백면서생쯤으로 치부하던 반장도, 혁의 지적과 요구사항이 거듭되자, 건축주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고, 지적 사항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렇게 4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대부분의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이제 조경 공사만이 남았다. 삼백여 평의 대지위에 지어진 혁의 집은 정남향의 요철이 없는 층고가 높은 직사각형이었다. 박공 형태의 지붕은 진회색 징크를 씌우고, 외장은 붉은 벽돌로 마무리했다. 전면에는 커다란 파티오 창을 달았고, 창 앞 백여 평의 정원엔 잔디를 깔고 사과나무와 감나무를 식재할 예정이었다. 태영이 소파에 앉아 기타를 튕기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김 형~, 있어요?"

"예, 들어오세요."

"아뇨, 늦었어요. 잠깐만 나오세요."

"모기 있는데..., 잠깐만요."


기타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혁이 뒷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내민다.


"저기, 이거 얼마 안 되는데, 받으세요."

"음..., 제가 안 받으면 혁씨도 불편하겠죠?"

"아마도, 매우?"


태영이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해요. 공사하고 남은 자재 있잖아요, 적벽돌이랑, 목재 말이에요. 전 그게 탐이 나요. 혁씨가 그거 써먹지는 않을 것 같고... 그거 처리하는데도 돈 들거든요. 목재랑 벽돌이랑 제가 적당히 챙겨갈게요. 콜?"

"남은 자재는 그냥 가져다 써요. 이건 다른 거예요. 하루 한 시간씩만 잡아도, 넉 달이면 몇 시간이에요. 어서 받아요."


태영의 표정이 굳어졌고, 목소리에 짜증이 약간 묻어났다.


"혁씨, 돈 엮여서 좋은 꼴 못 봤다고 했잖아요. 그만해요."

"화났어요?"

"네. 제가 없이 살아도 나름 가오는 있어요."


혁이 흰 봉투를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알았어요. 이번에 김형 신세를 크게 졌어요. 남은 자재는 필요한 만큼 사용하세요. 저 가볼게요."

"네, 잘 쓸게요. 들어가요."


다음날 태영은 손수레로 붉은 벽돌 백여 장, 스터드용 투바이식스 목재 15장과 자투리 목재를 챙겼다. 벽돌을 수레로 옮기며 중얼거렸다.


"이게 특수 벽돌이니까, 장당 천 원 잡으면..., 백장에 십만 원. 스터드 자재가 개당 만원 정도 잡으면 십오만 원..., 그럼 합쳐서 대략 이십오만 원인데..., 너무 많이 챙겼나..."


그러고는 손수레에서 벽돌을 두어 개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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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미정과 태영이 산책을 나섰다. 미정이 열쇠를 찾으며 중얼거렸다.


"열쇠를 어디다 뒀더라...?"

"금방 오는데 뭐. 가져갈게 뭐가 있다고 잠가? 그냥 가."


사실이 그랬다. 마을에서 가장 가난뱅이인 부부의 집엔 현금이나 돈 될 만한 게 거의 없다. 그래서 CCTV도 설치하지 않았다. 훔쳐갈 무엇도, 무언가를 훔쳐갈 사람도 없었다. 현 3리에는 사람이 없다. 이사 온 이후로, 도난 사건 따위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외지인 마을 진입로에서 우측은 현 3리 방향인데 조금 걸으면 읍으로 나가는 큰 길이 나오고, 좌측은 현 2리 방향으로 송 씨네와 마 씨네 집이 위치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현 2리 마을 회관이 나오면서 읍으로 가는 큰길과 연결된다. 오늘은 현2리 마을 회관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걸었다. 마을 회관 방향은 원주민들의 집들이 모여있어, 태영은 회관 쪽 산책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제 내린 비로 3리 쪽 길은 물고임이 심할 것이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이지만, 도로의 구배가 형편없어 비만 오면 물고임이 심했다. 송씨네를 지나 멀찍이 마 씨 노파의 집이 보였다. 마 씨의 집 건너에는 낡은 집 한 채가 방치되어 있었는데, 듣기로는 예전에 마 씨가 살던 집이라고 했다. 마 씨의 집과 가까워졌다.


"아마도, 마 씨 노인이 나올걸?"


태영의 말이 끝나기게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마 씨가 문을 열고 나왔다. 태영의 기억이 맞다면, 똑같은 상황이 세 번째 연출되고 있다. '이럴 것 같더라니...' 모른 척 지나치려는데, 어느새 코 앞까지 달려온 마 씨 노인이 미정의 손목을 낚아채 집안으로 끌어당겼다. 태영에게는 따라오라고 손 짓을 한다. 얼마 전 상황과 꼭 같다. 최근에 준공을 마친 마 씨의 집은 주변과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았다. 논 한가운데 넓게 펼쳐진 잔디 마당이라... 논의 경계에 보강토를 높게 쌓아 성토한 대지는 단단한 보루 같았다. 성토만으로도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 같았다. 마당의 잔디는 잘 관리되어 있었고, 보강토 경계에는 고급 방낄라이 목재로 성벽 같은 울타리를 둘러놓았다. 마당 귀퉁이에는 집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마을과는 잘 어울리는 비닐하우스가 남의 자식인 듯 뚝 떨어져 설치되어 있었다. 두꺼운 원목 현관문 위에는 노란색 부적이 붙어있는데, 그 문양이 상당히 독특했다. 태영은 별스럽게도 부적 아래를 지날 때마다 묘한 느낌을 받았다. 부부는 마 씨에게 끌려 들어가 넓은 소파에 앉았다. 갈색의 커다란 소가죽 소파는 아주 부드럽고, 적당한 밀도를 가지고 있었다. 얼마 전 처음으로 끌려와 앉았을 때, '설마, 라텍스?'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소파는 기분 좋은 밀도를 가졌다. 소파 앞 테이블 위에는 TV 리모컨과 돋보기 안경, 운전면허 문제집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엔 두꺼운 유리가 깔려 있었는데, 유리밑에는 가족사진 몇 장이 끼워져 있었다. 이번에도 마 씨 노파는 자신이 소파의 가운데에 앉고, 양쪽 끄트머리에 미정과 태영을 앉혔다. 노파는 소파에 앉아 몸을 통통 튕기며, 동시에 양 손바닥으로 소파 가죽을 쓸어대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러고는 소파 테이블 유리 아래에 놓인 가족사진에서 한 사내를 가리키고, 다시 소파를 가리켰다. 빛바랜 사진에는 아이들 셋이 오래된 초가집 앞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여자 아이 둘에 사내아이 하나가 있었다. 집 안 여기저기에 액자에 담긴 사진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자녀들의 유년기 시절 사진이었다.


"아, 아드님이 사준 거라고요? 소파가 엄청 좋아요!"

"응으응!"


미정이 엄지 손가락을 세우며 맞장구를 쳤다. '다음 순서는 아마도 TV를 켜는 것이겠지...' 태영이 생각했고, 동시에 노파가 리모컨을 눌렀다. '그럼 그렇지...' TV의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더니, 사진 속의 누군가를 가리킨다. 미정이 맞장구를 쳤다. 그런 식으로 냉장고, 침대, 싱크대를 자랑하고는, 다시 미정과 태영을 소파에 앉히고 믹스 커피를 타왔다. TV 옆에는 오래된 흑백 사진이 여러 장 담긴 큰 액자가 있었는데, 여러 장의 사진 중에는 살풀이를 하는 무속인으로 보이는 여인도 있었다. 지난번에는 네 개의 방을 하나하나 열어 보여주며 자랑을 했는데, 오늘은 생략인가 보다. TV에선 보험 광고가 방송 중이고, 노파의 양쪽에 앉은 미정과 태영은 커피를 홀짝거렸다. 가끔씩 노파와 눈이 마주치면 미정과 태영, 노파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이 양반은 보험 광고를 왜 틀어놓은 거야...?' 태영이 미정에게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알아챈 미정이 마 씨 노인에게 손발을 이용해 알 수 없는 의사소통을 시작했는데, 마 씨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배웅했다. 소나무 숲길을 걸으며, 태영이 미정에게 물었다.


"아까 뭐라고 한 거야?"

"응? '산책 가는 길에 잠깐 들어온 거라고 이제 가봐야 한다'라고 했지."

"그게 그런 의미였다고?"

"딱 보면 몰라?"

'아니, 왜 그게 그렇게 되지...?' 태영은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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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


"어머!, 오빠~!"


정마담이 태영을 발견하고 크게 반겼다.


"네, 안녕하세요."

"오빠, 한 번 오라니까, 어떻게 한 번을 안 와! 저기, 용팔아, 먼저 가, 먼저 가~."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의 갈색 페도라를 쓴 남자가 태영을 흘깃 보더니 어깨를 튕기며 비켜 간다. 두 번 접은 소매깃 아래로 알 수 없는 문신이 요란하다. 쥐색 치마에 흰 블라우스를 타이트하게 차려입은 정마담은 구사거리에서 카페를 운영한다. 부동산 용식이 태영에게 귀띔하기론 사십 대 중반이라는데, 태영의 얕은 눈썰미로는 짙은 화장 속 그녀의 나이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이힐을 신은 정마담이 태영의 장바구니를 들여다보더니, 주변을 살피며 묻는다.


"언니는?"

"같이 왔어요. 은행에 있어요."


읍에 위치한 대형 마트와 은행은 한 건물에 위치해 있다.


"아, 그렇구나, 오랜만에 언니 얼굴 좀 봐야지."

"아니, 여기 말고, 저기 다른 은행에 있어요."


정마담이 태영의 표정을 읽더니, 배시시 웃었다. 웃는 그녀는 예뻤다. 태영은 그녀의 예사롭지 않은 외모가 두려웠다. '저 웃음에 얼마나 많은 사내들이 넘어갔을까...' 태영 역시 육체의 본능에 빠르게 반응하는 수컷일 뿐이다.


"오빠, 구라지?"

"저기요, 사장님. 오빠라고 좀 하지 마세요. 나이도 저보다 많다고 들었어요."

"아냐, 내가 오빠보다 더 어려."

"저보다 어리면, 반말하지 마세요."

"그럼, 자기?"


태영이 홱 돌아서서 정육 코너로 발길을 옮겼다. 포장된 구이용 돼지 목살을 살펴보던 태영이 중얼거렸다.


"너무 두꺼운데..."


정육 코너 직원에게 조금 얇게 썰린 목살을 한 근 달라고 주문했다. 항상 그렇지만, 한 근을 달라고 하면, 한 근을 주지 않는다. 한 근이면 가급적 600g을 맞추려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번에는 682g을 비닐봉지에 담아 건넨다. 쪼르르 따라온 정마담이 슬쩍 팔짱을 끼우려 했다.


"자갸, 혜영이 갈매기살 사주세요~!"


태영이 그녀의 팔을 피하려 잽싸게 몸을 비트며 말했다. 태영 스스로도 자신이 유난스럽게 정마담을 피하는 이유가 그녀의 외모가 그만큼 매력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외적 아름다움의 추구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였고, 스스로도 아름다움을 추앙했다.


"사 드세요."

"자기는 특별히 1부 보장할게. 월 1부~! 연 12 퍼센트야! 자기가 이뻐서 그러는 거야."

"저 같은 늙다리가 뭐가 이뻐요? 그리고 여윳돈이 없다니까 자꾸 그러세요."


정마담이 태영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눈을 찡긋했다.


"등기한다고 했잖아. 담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전 필요 없어요."


채소 코너로 발길을 돌린 태영은 미정이 부탁한 새송이 두 묶음을 카트에 넣고, 계산대로 향했다. 카트 안의 장본 것들을 계산대에 올려놓는데, 정마담이 쵸코렛을 슬쩍 올려놓는다.


"난, 초콜릿."

"제가 지갑에 여유가 없어서."


태영이 초콜릿을 집어서 제 자리에 놓았다. 정마담이 다시 초콜릿을 집어 계산대에 올려놓으며 계산원에게 말했다.


"언니, 그거 말고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태영이 내민 카드를 가로채더니, 본인의 카드를 계산원에게 내민다. 막무가내다. 영수증을 챙기고 박스에 장본 것들을 담는데, 소고기 살치살 한 팩이 포함되어 있다. 태영이 소고기 팩을 계산원에게 내밀며 말했다.


"저기, 이건 제가 가져온 게 아닌데요."

"아냐, 이건 내가 사주는 거야. 고맙지?"

"죄송한데, 이거 빼주세요."

"아이 정말! 그냥 내가 사는 거라니까!"


옥신각신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외친다.


"이봐요, 뭐 하는 거예요. 뒤에 사람들 안 보여요?"

"아, 죄송합니다."


카트에 담긴 것들을 트렁크에 싣고, 차문을 열면서 말을 건넸다.


"카드 주세요."

"응? 아, 여기."


정마담이 조수석에 타려 하는데, 태영이 잽싸게 도어락 버튼을 눌렀다. 정마담이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자갸. 장난하지 마~. 문 열어."


글러브 박스를 뒤지던 태영이 비상금으로 넣어둔 봉투에서 육만 오천 원을 꺼내더니 창을 조금 내렸다.


"결제금이 십일만 칠천 백십원인데, 쵸코렛이 이천 오백 원, 고기가 오만 원이에요. 그럼, 드릴 돈이 육만 사천 육백 십원인데, 동전이 없어서 육만 오천 원 드릴게요. 나중에 삼백 구십원 돌려주세요."


창 틈으로 쵸코렛과 고기팩, 그리고 지폐를 내밀었다.


"어서 받으세요."

"자갸, 그거 얼마나 한다고, 괜찮아. 쵸코렛만 줘."


정마담이 쵸코렛을 집어 들었다.


"나중에 딴 말씀하지 마세요. 블랙박스 켜져 있어요."

"저기, 카페까지 콜?"

"아내 태워야 해서요. 미안해요. 가까우니까 걸어가세요."

"자갸! 자갸!"


룸미러에 뭐라고 소리치는 정마담이 반사됐다. '덕분에 소고기는 잘 먹겠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미정 부부가 귀촌을 하려 땅을 알아보던 6년 전이다. 태영과 미정이 부동산 김사장의 사무실에서 계약을 마무리하자 김사장은 미정 부부에게 커피를 대접한다며 사무실 옆 건물의 카페로 데려갔는데, 그 카페의 사장이 정마담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그들 사이에 정마담이 슬쩍 끼어들더니 돈놀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장님, 이 장부 좀 보실래요? 여기 농협 조합장님, 상가 사장님, 수협 이사 사모님."


정마담이 장부를 펼치며 설명을 시작하는데, 옆에 앉은 김사장이 추임새를 넣는다.


"정사장이 돈거래는 확실해요."

"제가 배당 사업을 하는데, 월 배당도 하고, 년 배당도 하고. 기본이 작은 거 다섯 장부 턴데, 그게 년 8프로 이자고, 큰 거 한 장부터 월 0.83%, 일 년이면 10%, 괜찮죠?"

"예, 상당하네요. 은행 이자가 연 2~3% 정돈데..."


본인 소유의 땅을 투자자한테 담보로 넘기는 형태의 투자라 떼일 염려는 없다고 했다. 태영이 생각했다. '사기는 항상 그럴듯하지...' 커피를 홀짝거리던 김사장이 참견했다.


"김사장, 정마담이 배당 사업해서 동네 노른자 땅을 많이 샀어요. 나름 마을 유지예요."

"지금이야 '뭘 믿고 투자를 해'라고 생각이 들겠지만, 이 동네서 2~3년 살아보시면 믿을 만하다는 걸 아실 거예요. 그때 연락 주세요. 미리 깔아 두는 거예요. 키키."


서울로 올라오면서, 미정이 말했다.


"카페 사장 상당히 미인이더라, 근데, 연 10% 이자면... 요즘 은행 이자가 3%가 안 될걸?"

"세상에 공짜가 없어."

"공짜가 아니지, 돈을 맡기는데. 그래도 10%면 정말 엄청난 거야. 당신 주식 수익률을 생각해 봐!"

"어허, 이 사람이. 투자는 길게 봐야 하는 거야. 두고 봐."


태영이 현리로 이사 온 이후로도 용식의 사무실에서 정마담을 몇 번 만났지만 지나가는 소리로 얘기할 뿐, 지금같이 지분대진 않았는데, 최근엔 뭔가 조급함이 느껴졌다.


"아오..., 이쁘다 이쁘다 하니까, 사람을 졸로 보네..."


정마담이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용필아, 마트 앞인데..., 그래?"


주차장 모퉁이의 검정 세단의 문이 열리고, 갈색 페도라의 사내가 정마담에게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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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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