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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1
"똘이야~! 똘~!"
태영이 똘이를 찾는다. 똘이는 그의 이웃이 기르는 고양이다. 윤 씨가 현리로 귀촌하면서 지인에게 분양을 받은 고양인데, 똘똘해서 똘이가 아니라, 제발, 똘똘해지라고 윤 씨와 하 씨가 붙여준 이름이다. 정확한 이름은 '윤하똘이'다. 똘이는 페르시안 익스트리멀 고양이다. 찡코 녀석이라 1년 365일 눈곱을 달고 다니고, 생김도 좀 맹해 보이는 장모종 흰둥이인데 부분적으로 크림색이 섞인, 사람을 잘 따르는 강아지같은 고양이다. 성질이 어찌나 순하고 겁이 많은지, 윤 씨 부부가 없을 때면, 동네 길고양이들에게 쫓겨 도망 다니는 게 일이다. 하 씨는 볕 잘 드는 곳에 똘이를 위해 실외 아궁이를 넓게 만들어 녀석이 따듯하게 지낼 수 있게 해 주었고, 기둥을 세워 비가림도 해주는 등 똘이 사랑이 유별났다. 윤 씨의 말에 따르면 남편인 하 씨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아프고 나서부터, 똘이를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별일 없으면, 똘이는 항상 아궁이 위에서 '고롱고롱' 거리면서 잠을 잤다. 태영은 녀석을 괴롭히는 재미가 쏠쏠해서, 아침부터 녀석을 찾았는데, 똘이 녀석이 통 보이질 않았다. 안주인 윤 씨도 걱정하는 눈치다. 한 겨울임에도, 윤 씨는 뱀이 무서워 언덕으론 찾아볼 엄두를 못 냈고, 하 씨가 있었으면 벌써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며 똘이를 찾았겠지만, 직장에서 근무 중인 사람을 고양이 찾으라고 호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똘~! 아저씨 심심해~!"
전에도 한동안 사라졌다간, 어디선가 '냐냐냐'하고 나타나곤 했지만, 오늘은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졌고, 시커먼 구름도 가득한 게, 금방이라도 눈이 올 것 같아 이래저래 신경이 쓰였다. 태영은 뒷 언덕으로 올라가 보았다. 작년부터 고라니 피해가 심각해져 태영은 밭 주변과 집 뒤 언덕을 경계로 고라니망을 둘러쳤다. 아래쪽부터 고라니망을 살피며 뒷 언덕으로 올라가는데, 멀찍이서 '냐냐냐' 소리가 들린다. 후다닥 달려가니 녀석이 덤불 속에서 고라니 망에 엉망으로 감긴 체 바둥거리고 있다. 고라니망 뒤편으론 오랜 시간 돌보지 않아 엉망으로 망가진 무연고 무덤이 보였다.
"아이고, 이 녀석아!"
"냐~"
"잠깐만~, 잠깐 있어봐."
똘이의 털뭉치가 마른풀로 뒤덮여 풀뭉치가 되어버렸다. 태영이 이리저리 감겨버린 고라니망을 풀어보려 했지만, 엉킬 대로 엉켜버린지라 망을 끊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똘이의 피부가 상하진 않은 것 같다. 아무래도 창고에서 쪽가위를 가져와야 할 것 같았다.
"똘, 잠깐만 기다려. 아저씨가 금방 갔다 올게."
"냐~ 냐~ 냐~"
똘이가 태영에게 혼자 두고 가지 말라는 듯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눈치가 번개같이 빨랐다.
"잠깐만."
태영이 급하게 집으로 뛰어가 쪽가위를 챙겨 나오는데, 비닐하우스에서 나오던 미정이 묻는다.
"똘, 찾았어?"
"응"
"어디서?"
"고라니망, 잠깐만~."
'투둑, 투둑' 눈이 아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후다닥 올라가니, 녀석이 춘향이 이몽룡 만났듯 '냐냐냐' 거리며 반긴다. 태영은 쪽가위로 조심스레 망을 자르며 녀석의 콧잔등을 한 번씩 검지로 꾹꾹 눌러줬다. 평소 똘이는 콧잔등 누르는 걸 싫어했다.
"이 놈아, 아저씨가 언덕엔 오소리 있다고, 올라가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몇 번을 얘길 했냐, 이 놈아!"
뒷 언덕에는 오소리 한 쌍이 살고 있는데, 사납기가 호랑이 못지않다. 태영은 동네 길고양이들이 오소리에 쫓겨 도망 다니는 것을 몇 차례나 목격했다.
"너 인마, 고라니망 어쩔 거야? 아저씨 가난한 거 알지? 양심이 있으면, 낼부터 아저씨네 놀러 와서 청소도 좀 하고, 커피도 내리고, 그래야 한다."
태영은 정신없이 엉킨 망을 다 잘라내고, 마른풀 투성이인 똘이를 꼭 끌어안았다. 폭신하고, 따뜻했다. 다행히 비는 몇 방울 떨어지다 말았지만, 해는 이미 능선으로 가라앉아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똘, 이젠 여기 올라오지 마."
"몰라!"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똘, 너도 들었지?"
"냐~"
순간 등 뒤 무연고 묘에서 들려온 소리가 아닌가 싶어, 머리털이 삐죽 솟았다. 태영이 소리쳤다.
"귀신이다~!"
후다닥 언덕을 뛰어내려왔다.
"배고프지? 얼른 가서 밥 먹고 아저씨네 설거지하러 와라~"
"냐~"
태영이 똘이를 데크 위에 내려놓자, 녀석이 아랫집으로 쪼로로 뛰다가 뒤돌아 본다.
"어서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더니 집으로 들어간다.
"망에 걸렸었어?"
"응, 망을 조금 잘랐어. 망할 놈."
"씻고 와, 식빵 구웠어. 샌드위치 할 거야."
태영이 씻고 나오니, 미정이 짜주는 츄르를 똘이가 신나게 핥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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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촌읍 구사거리에는 읍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박 장구의 건물이 있었는데, 그 건물 1층에는 '쭈꾸미 김밥'이라는 식당이 있었다. 식당은 김밥 맛도 뛰어났지만, 그 못지않게 라면 맛이 뛰어났다. '라면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을까'하겠지만, 금희가 끓이는 라면은 맛의 깊이가 분명 달랐다. 금희가 만든 음식은 평범했지만, 어릴 적 엄마가 해준 음식이 연상되는, 그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묘한 매력을 가졌다. 그 덕에 장사도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문제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꾸미야, 김밥 두 줄에 라면 하나여."
"그려~"
"떡라여~ 떡라. 들은 겨?"
금희는 왼손 검지로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여그 귀때기 보이쥬?"
"라면은 미디엄 레어여, 글고, 떡은 푹 익어야 하는 겨~"
"니미, 라면 하나 처묵음서..."
금희가 냉장실에서 쌀떡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들은 겨?"
"귀때기가 있슨께, 들었겠쥬?"
금희는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많이 변색됐지만 잘 닦인 중간 크기의 양은 냄비에 물을 붓고, 화구에 불을 올렸다. 테이블 아래 두 번째 냉장고에서 김밥 재료를 꺼냈는데, 냉장고 내부는 정갈했고,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여섯 평의 가게는 청결했지만, 낡은 싸구려 집기들이 그녀의 노력을 상쇄해 버렸다.
"태식아, 맛나냐?"
구석 테이블에 앉아 핸드폰을 보던 정경장이 용식을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예, 누님 음식 솜씨가 워낙에 좋잖아요."
"싸가지 읎는 새끼, 으른이 말하는디..." 용식이 혼자 중얼거리며, 컵에 물을 따랐다.
"낙지는 어디 간 겨?"
"몰러."
"자슥이... 또 노름하는 거 아녀?"
"우리 서방님, 노름 진작에 끊었슈."
용식이 테이블 위에 놓인 종지에 간장을 조금 따랐다. 금희가 먹기 좋게 썰린 김밥 위에 통깨를 뿌리고, 김치와 단무지를 종지에 담았다. 보글보글 끓는 라면을 집게로 몇 번 휘졌고는 스텐 대접에 부었다. 쟁반에 담긴 라면 대접에 채 썬 파를 고명으로 조금 올렸다.
"안 바쁘면, 여 좀 와봐~"
"뭔 일 있슈?"
금희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용식의 앞자리에 앉았다.
"어따, 시원~허다. 이게 라면이여, 짬뽕이여?"
이번에는 김밥을 씹던 용식이 눈을 크게 뜨며 엄지를 척 세웠다.
"이건 김밥이 아닌 겨, 금밥인 겨."
"씰데없는 소리 말고, 할 말 있는 겨?"
용식이 면발 사이의 쌀떡을 집어, 간장에 살짝 찍고는 입에 넣었다. 라면 국물이 밴 쫄깃한 쌀떡엔 금희가
직접 담근 달짝 지근한 간장이 그만이다. 용식이 먹는 꼴을 지켜보던 금희의 입안에 침이 고였다.
"오빠는 먹는 거 보문, 그 뭐여... 기품이 있어. 늙어도, 도련님은 도련님이여. "
"언제 짝 도련님이여..., 나가 돌씽인께, 그 뭐여..., 진짜배기 고독한 미식가여."
"우리 민기는 밥 묵는 게 딱 머슴인디."
"금희야, 나가 말여, 내년 말에 현리에 식당을 하나 크게 할 꺼여, 니가 주방장 할텨?"
"현리? 현리 어디?"
"어디긴 어디여? 거 뭐여, 현리 초입에 유 씨네 빈 건물 있잖여."
"윤이 엄마?"
"그려 그 노인네. 그거 내년 말부터 3년 동안 쓰기로 했는디, 정확히는 내가 칠, 혜영이가 삼이여. 그거 적당히 손봐서 함바로 쓸껴. 우뗘?"
용식이 면발을 집어 올려, 왼손에 쥔 수저 위에 올리고는 수저를 대접에 살짝 담가 국물에 면발을 적셨다. 그리고 그 위에 김치 조각을 올렸다. 용식의 하는 꼴을 지켜보던 금희는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입을 벌릴 뻔하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야 좀 봐! 라면은 내가 묵는디, 니가 왜 침을 삼키는 겨? 점심 굶은 겨?"
"아직 식전이긴 헌디, 오빠가 하도 맛나게 묵어서 그런 겨."
"실은 혜영이가 니를 우선적으로다가 추천한 겨."
"그려? 근디, 첨단 도신지 뭔지, 참말로 하긴 하는 겨?"
"그려."
숟가락을 내려놓은 용식이 이번에는 젓가락으로 김밥을 하나 집어 라면 국물에 김밥의 절반 가량이
잠기게끔 담갔다.
"이게 말여, 절반이 포인트여. 이렇게 묵으면 처음에는 김밥 맛인디 나중엔 라면 국물에 밥 말은 맛이 나는 겨. '두 가지 맛을 느낄 수 있다' 이거여."
"참이여?"
"그려, 짱구 얘기론 늦어도 내년 중순에는 발표가 난다니께, 천천히 생각혀 봐."
"아니, 두 가지 맛이 참이냐고 물은 겨."
"이따 끼리서 묵어봐. 참인지 구란지 알 거 아녀."
"근디, 장사가 이렇게 시원찮아서... 지금 한창 식사 시간인디. 허긴, 나도 개점휴업이여."
"하루 이틀이여? 독감 돌고부턴 영 시원찮은 겨..."
"긍께, 언넝 첨단 도시 유치하고, 빨갱이들 몰아내야 하는 겨! 코로나가 어서 온 겨~, 중국 공산당이 전파한 거 아녀! 이번에 싹 바꿔야 하는 겨. 그래야, 고생 끝 행복 시작인 겨. 안그냐, 태식아?"
구석 테이블에서 보리차로 입을 헹구던 태식이 여전히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꾸했다.
"제가 그래도 공무원인데, 중립을 유지해야 하니까..."
"니미, 공무원은 넘에 나라 사람이여? 공무원은 말여, 애국심이 우선이여! 애국하라고 세금으로
월급 주는 겨!"
문이 열리고 젊은 사내 둘이 들어왔다. 둘 다 안전화에 두툼한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사내들의 작업복 여기저기엔 톱밥 가루가 묻어있었다.
"어서 와유~"
검정 야구 모자를 쓴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내가 자리에 앉더니 차림표를 응시했다.
"사장님, 김치찌개랑 비빔밥 주세요."
"그류, 딱 보니께, 저그 펜션 단지서 일하는 분들 같은디, 자주 좀 와유."
"네, 안 그래도 음식맛이 좋다고 해서 왔어요."
"그류, 지가 손 맛이 조응께, 이따 저녁에도 올 거쥬? 저녁엔 아재들이 좋아하는 쏘시지 반찬이유."
"하하. 그럴게요."
"용식 오빠, 고마워."
"나가 아니고 혜영이랑께."
금희는 서둘러 양은 냄비에 물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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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패딩을 입은 초로의 사내가 데크 위에서 커피콩을 볶고 있다. 사내가 중얼거렸다.
"아... 이 추운 날씨에 눈이 매워 눈물까지 흘려가며 무슨 궁상인가..."
사내의 발치에 놓인 화로대는 그가 열심히 캠핑을 다닐 때 사용하던 미니 화로대다. 잔가지를 주워 숯을 만들고, 다이소에서 삼천 원을 주고 구입한 스텐 메쉬망에 콩을 넣고 나무 주걱으로 휘졌고 있다. 왼손을 이용해 메쉬망과 화로대의 거리를 좁혔다 넓히면서 불조절을 하고, 오른손으로는 나무 주걱을 휘져으며 콩을 볶는다. 불조절에 실패하거나, 주걱 젓기가 서툴면 콩이 타버리거나, 메쉬망 바깥으로 튕겨나가 버린다. 한 참을 저으니, 녹회색의 콩들이 갈색을 띠기 시작했다. 사내는 불심이 약해진 것 같아 미리 만들어 놓은 숯을 화로대에 조금 더 넣었다. 너무 많이 넣으면 콩이 타버릴 염려가 있다. 잠시 후, '탁. 타닥.'거리며 하나 둘 콩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사내는 주걱 젓는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타닥 탁 타닥' 콩들이 팝콘 터지듯 일제히 터지기 시작한다. 메쉬망을 화로대에서 적당히 떼고 콩 터지는 소리가 잦아질 때까지 열심히 젓는다.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바닥에 떨어진 콩이 절반이고, 메쉬망 안의 콩들도 볶인 정도가 들쭉날쭉하다. 뒷정리를 마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추운 날씨에 원두는 이미 차갑게 식어있다. 사내는 손을 닦고, 핸드밀에 갓 볶은 원두 한 스푼 반을 넣고 손잡이를 돌렸다. 손잡이를 통해 원두의 배전 강도가 전해졌다. 턱턱 걸리는 것이, 배전 상태가 고르지 않다. '젠장...' 사내가 중얼거렸다. 바스켓에 에스프레소 굵기로 갈린 커피 가루를 탈탈 털어 담고 템퍼로 지그시 눌렀다. 머신의 마중물을 한 번 내리고, 포터 필터를 끼웠다. '웅~' 포터 필터의 주둥이로 찐득한 액체가 흘러내렸지만, 크레마가 부족한 게 사내의 맘에 들지 않았다. 끓인 물로 희석한 커피를 미정에게 건넸고, 미정이 코를 벌름이며 향을 맡았다.
"음~, 향은 좋은데?"
"마셔봐."
미정이 '호로록' 거리며 커피를 음미했고, 사내가 초조하게 그녀의 평가를 기다렸다.
"맛있어~! 야미, 야미!"
그제야 사내의 표정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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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
비닐하우스에서 땅콩 껍질을 까고 있는데, 혁이 하우스 문을 밀고 들어왔다.
태영이 귀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뺐다.
"바빠요?"
"왔어요? 바쁘면 안 되죠. 전 바쁘면 병나요."
혁이 담배를 꺼내며, 한 개비 권했다.
"뭐 들어요?"
"이거요? 책 읽어 주는 앱이에요. 일할 때 들으면 좋아요."
"아, 독서앱! 무슨 책?"
"좀 된 책인데... [레미제라블]입니다요."
"조금 된 게 아닌데요?"
"네, 가끔 읽는데 몇 번 읽어도 재밌습니다요."
"장발장이라... 알겠습니다요."
혁이 라이터를 꺼내 '챙~!'하고 뚜껑을 열었다. 맑고 투명한 쇳소리가 태영은 참 좋았다.
"어따, 소리 좋소~!"
"아버지 유품이에요. 김형, 당상관 부동산 있잖아요?"
"예."
"거기 김사장님이, 김 씨 맞죠?"
"예, 김용식이요."
태영이 좀스럽게 엄지와 검지로 담배를 집고 한 모금 깊게 빨아 당기고는 '후' 뱉는다.
"역시, 남이 주는 담배가 젤로 맛나네. 셋 방은 지낼만해요?"
"네, 좋아요. 저기 김 사장님이 집을 지어준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태영이 좀스럽게 담배를 한 모금 더 삼키고 입을 열었다.
"제가 김사장님한테 이런저런 신세도 많이 지고, 알고 지낸 지도 좀 돼서..., 말씀드리기가 곤란한데..."
"곤란하다면...?"
"음..."
"말씀하기 곤란하시면..."
"음... 집이라는 게 한 두 푼 들어가는 일도 아니고..."
태영이 잠깐 뜸을 들였다.
"그분이 좀 독특해요. 제가 판단하기엔 뭐랄까... 그분은 경계인...? 그래요, 경계인이 적당 하겠네."
"경계인이요?"
"그러니까, 불법과 합법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그런 타입이에요. 좋게 말하면 편법이고. 김사장님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나쁘냐? 그건 아니거든요. 정도 많고, 일처리도 깔끔하거든요. 부동산 거래하면서 느꼈잖아요?"
'챙', '챙' 혁이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물었다.
"예, 거래는 깔끔했어요. 근데, 그거랑 건축은 전혀 다르니까... 믿지 못할 사람일까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가령 이런 거죠. 만약에 김사장이 30평 건축 비용으로 1억을 제시했다 그러면, 그 비용이 여기 현리에선 가장 저렴한 건축 비용일 거예요. 이건 확실해요. 동일 자재로 시공해도 김 사장이 타 시공자에 비해 시공비가 낮고 공사 기간도 짧을 거예요."
"그럼 문제없잖아요, 동일 자재로 시공하는데, 비용이 더 저렴하고 빠르다면 오히려 좋은 것 같은데...?"
"그렇죠, 그런데, 일이라는 게 매뉴얼이 있잖아요. 김사장님은 매뉴얼을 무시하는 엿장수 스타일이라... 가령, 설계도에 터파기 깊이가 50센티로 되어 있어도, 30센티만 판다거나, 콘크리트를 양생 하는 기간이 삼일인데, 이틀만 한다거나, 전기나 수도의 설비작업을 사용자 편의가 아니라, 시공 기간을 단축을 우선으로 한다거나. 뭐 그런 거예요. 포장은 멀쩡한데, 내부 구성이 약간 부실하다는 거죠. 그런 식으로 인건비나 장비대를 줄여서 이문을 남긴다고 해야 하나..."
혁이 새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그럼, 불량 시공이 많다는 얘기네요."
"그게, 비현령 이현령이긴 한데... 불량 시공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한... 그래서 경계인이라는 거예요. 사실, 매뉴얼대로 시공하는 업자가 얼마나 되겠어요. 저기 하사장님 댁도 김사장님이 시공했는데, 아직까지 별문제 없이 잘 사시거든요. 이 동네에 김사장님이 시공한 집이 한 두 채가 아니에요. 다들 별 말 없잖아요. 이 동네 시공업자가 다 고만 고만해요. 여유되면 시청 쪽 큰 업체가 어떨까 싶어요. 뭐 크다고 믿을 만 한건 아니겠지만... 사람은 끼리끼리 알아본다고, 그래서 김사장님이 저한테 살갑게 대하는 거예요. 동류를 알아보는 거죠. 흐흐"
태영이 엄지와 중지로 담배를 잡고 검지를 튕겨, 담뱃불을 껐다.
"혁씨, 꽁초 주세요."
"제가 버릴게요."
"어서 줘요."
혁이 주저하다가 꽁초를 태영에게 건네며 물었다.
"김형은 직접 시공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저요? 저흰 비용을 줄이려고 직접 했죠. 여유 있음 안 했죠. 저희가 준비만 일 년, 시공에는 이 년 가까이
걸렸어요."
"설계도 직접 했다고 들었어요."
"예, 설계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걸로 설계하고, 군청 주변에 설계사무소 많거든요, 설계한 파일 건네주면 알아서 평면도, 측면도, 그런 거 만들어서, 구청에 허가 대행까지 해줘요."
혁이 라이터를 만지작 거린다.
"뭐 하나 쉬운 게 없네요. 막막하네..."
"길게 보고 천천히 가세요. 급할 것 없잖아요."
혁이 태영을 바라보고 빙긋 웃었다.
"김형만 믿어요."
"네? 엉뚱한 소리 말고, 점심이나 하고 가요. 비빔국수 할 건데, 좋아해요?"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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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3
공사하기에 좋은 시기는 아니었지만, 혁의 건축 공사가 시작됐다. 김사장이 혁을 구슬리려 몇 차례 시도를 했지만,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군청 건축과에서 근무하는 지인의 소개로 나름 탄탄한 업력의 시공사에 건축을 맡기게 되었다. 그리고 태영이 감리를 맡게 되었다. 설계 단계에서 태영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많은 조언을 해주었고, 혁은 태영의 의견을 받아들여 설계에 반영했다. 그리고 항상 매뉴얼을 강조하는 태영에게 감리를 부탁했다. 혁이 태영을 알고 지낸 시간은 짧았지만, 믿음과 시간은 비례하지 않았다.
"제가요? 제가 뭘 안다고요?"
"김형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김형은 원칙주의자잖아요."
" 아닌데요? 제 호[號]가 신숙주예요."
"김형, 밭만 봐도 알아요. 틀 밭도 칼각이고, 작물들 심어진 간격도 칼간격이에요. 낭중지추예요."
"엥?"
태영은 누차 사양했고, 혁은 누차 권했다. 지난한 밀고 당김이 계속됐고, 어느 날 결론이 났다.
"그러니까, 무보수로 조언하되, 하자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이거죠?"
"제가 아는 선에서 살펴보기는 하는데, 책임은 못 진다는 뭐 그런 거죠... 하하하."
"당연하죠, 제가 아쉬워서 부탁하는 건데요. 다만, 무보수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데요..."
"저도 무보수가 마지노선이에요. 돈 엮여서 좋은 꼴 못 봤어요. 더 이상은 협상 결렬입니다."
혁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제가 을이니까, 콜~!"
"콜!"
그렇게 혁의 건축 공사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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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5
'붕짜자 붕짜~!' 요란스러운 노래가 유세 차량의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온 마을에 쩌렁쩌렁 울렸다. 집권 세력의 유세 차량과 집권을 노리는 세력의 유세 차량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마을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태영이 감자밭에서 김을 매는데, 아랫집 하 씨가 똘이를 가슴에 안고 슬쩍 묻는다. 하 씨는 태영보다 한참 연배가 높았다. 헌병대 하사관 출신인 그는 허우대가 좋았는데, 몇 년 전 전역을 하고 지금은 읍에서 건물 관리일을 하고 있다.
"김사장은 누구 뽑을 거요?"
"비밀인데요."
"비밀은 무슨... 요즘같은 세상에."
"그래도 전 비밀이에요. 똘아, 너한테만 말해줄까?"
"냐냐냐."
"하여간, 싱겁기는... 누굴 선택하든 투표는 꼭 하시오."
"그래야죠."
차량들이 동네를 한 바퀴 다 돌았는지, 외지인들이 모여사는 미정의 마을로 들어온다. '붕짜자 붕짜~!' 소리가 더욱 커졌다. 하 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휴, 시끄러워. 그럼 수고하시오."
하 씨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트럭이 태영의 집 앞에서 멈춰 섰다.
"잠깐 와보게~!"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당상관 부동산 용식이 개조된 유세 차량의 난간에 기대 마이크를 잡고 있다.
"내가 바빠서, 경황이 읎네."
트럭 앞으로 온 태영에게 김사장이 명함을 내밀었다. '녹촌읍 선거지원단장 김용식'
"봤는가? 우뗘?"
"와~! 단장이면 엄청 높은 거 아녜요? 축하드려요. 사장님. 그런데 당원이셨어요? 그건 몰랐네요."
"뭐래는 겨! 나가 지역위원장인디~. 이번에는 누가 뭐래도 우리 자유 애국당이여! 자네도 내 말 안 들어서, 지난 5년 동안 개고생했잖여. 이제 정신채리고 자유 대한으로 전향하는 겨~! 알것는가?"
"저는 지난 대선땐 서울 살았는데...? 게다가 지난 5년 동안 나름 괜찮았어요. 주식으로 재미도 좀 봤고. 국격 올랐다고 다들 그러던데..."
태영이 실실 웃으면서 대꾸했다.
"긍께 자네가 시뻘건 빨갱이라는 겨~! 괘안킨 뭐가 괘안어? 나라가 작살이 났는디! 요즘 살판났다고 씨부리는 종자덜은 다 빨갱이여! 싹~다 잡아다 북으로 보내야 하는 겨~. 빨갱이 후보 찍을라문 투표도 하지 말어, 종이 아까운께. 무조건적으로 다가 자유 애국당 후보여! 나가, 바빠서 이만 가네~!"
"하 하, 들어가세요."
'붕짜자 붕짜~!' 요란스러운 노랫소리가 마을에서 조금씩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