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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윤 씨가 형형색색의 떡들이 가득 담긴 접시를 내려놨다. 미정은 떡보다 예쁜 접시에 눈길이 갔다. 약간 색이 바랜 흰색 접시에는 밝은 올리브색의 잎사귀와 이와 대조되는 선명한 붉은색의 앵두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미정이 도톰한 접시를 높이 들어 바닥의 로고를 확인했다.
"오! 로스트란드. 이거 빈티지 접시네요."
"접시 이쁘지? 내가 아끼는 거야. 그러니까 어디까지 했더라... 그래, 말도 마! 내가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려!"
"엄청 놀라셨겠어요."
"한밤중에 남의 거실창을 들여다보는데, 내가 얼마나 놀라!"
"혼자 계셨어요?"
"아니, 우리 아저씨는 방에서 자고 있었지. 이 나이에 지릴뻔했다니까."
"하하, 저도 그랬어요."
미정이 꿀떡을 입에 넣었다.
"어디서 맞춘 거예요? 엄청 맛있네."
"어서 하긴, 읍에서 했지. 읍에 떡집은 하나밖에 없어. 그땐 누군지 몰랐으니까, 누구냐고 하니까 이상한 소릴 내는 거야. 무섭잖아? 그래서 애 아빠 깨워서 오니까 가고 없더라고. 그러고 한 보름 지났나... 이번에는 우리 밭에서 쑥을 캐고 있는 거야."
"마 씨 할머니가?"
"응, 뭐 하냐고, 남의 밭에서 뭐 하냐니까, 대답이 없어. 이 여편네가 쑥을 커다란 검정 봉지로 두 봉지나 캔 거야."
"그분이 보청기를 안 하면 거의 못 들으니까..."
"몰랐지, 그래서 당신이 뭔데 남의 땅에서 쑥을 캐냐고, 봉다리를 달라고 했지. 우리도 쑥떡 해 먹을라고 내버려둔 거거든. 그러니까 쑥 캐던 과도로 삿대질을 하면서 웅얼거리는데, 무서워서 내가 비명을 질렀어... 그때 우리 아저씨가 달려 나와서"
윤 씨가 거실창밖 마당에 놓인 싸리 빗자루를 가리키면서,
"저걸로 마 씨 손목을 탁 내리쳤지. 그때부터 난리가 난 거야. 갑자기 우리 아저씨한테 달려들어서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데..., 내가 뜯어말리고. 내가 손등을 꽉 깨물었거든, 그래도 안 놓는 거야."
"와, 장난 아니었네요."
미정이 이번에는 콩떡을 입에 쏙 넣으며 장단을 맞췄다.
"이따가 좀 가져가. 농약 하나 안친 콩으로 한 거야. 우리 아저씨가 생긴 건 깡팬데 그래도 마음은 소녀거든, 여자를 때릴 수 도 없고... 나중에 보니, 머리털이 한 움큼은 빠졌어. 그 독한 년이, 경찰 올 때까지 안 놨다니까. 우리 바깥양반이 머리숱이 정말 빽빽했거든, 근데 그때부터 조금씩 빠지기 시작하더니, 지금 휑해진 거야. 아무튼, 그 일 있고 우리 아저씨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거야. 말도 말아... 가위는 또 얼마나 눌렸는지... 아휴~"
"아, 편찮으셨던 게 그때부터였구나... 꽤 오래갔잖아요?"
"그니까. 사람은 아프다는데, 병원을 여기저기로 다니면서 검사를 해도, 다들 멀쩡하다는 거야. 환장하겠데..."
"그래서요?"
"우리 동생이 절에 다니거든, 거기 스님이 보살을 소개해줬어. 그 양반이 푸닥거리 한번 하니까 멀쩡해지더라고."
"진짜요?"
"나도 놀랐다니까! 자기야, 나 모태 천주교 신자야. 내 세례명이 마리아야, 마리아. 오죽하면 푸닥거리를 했겠어. 지금도 우리 아저씨는 마씨집 근처에도 안 가잖아. 자기도 조심해."
"네. 그런데, 오는 사람 못 오게 할 수도 없고... 좀, 그러네요."
"어떤 김 씨? 나도 김씬디?"
"저기, 뭐야, 현리에 밤색집 있잖아."
"아! 그 동생. 글씨, 듣긴 혔는데... 하두 오래전이라..., 근디, 왜 묻는가?"
"아니~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분명히 봤거든! 그래서 뭐 하던 사람인가 해서."
"보긴 뭘 봐! 수작 부리지 말고, 관심 끊어~. 핸드백 새로 산 겨?"
혜영이 핸드백에서 은색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이거? 산거 아냐, 받은 거야. 오빠는 손님들 엑스파일 만들어 놓잖아. 줘 봐 봐. 그냥 궁금해서 그렇다니까!"
"귀찮은데..."
김사장이 소파에서 일어나 회색 철제 캐비닛을 열고 연도별로 정리해 둔 서류철을 뒤적였고, 혜영이 담배에 불을 붙여 크게 한 모금 빨아 들였다.
"역시, 담배는 식후땡이야."
"야, 넌 하루에 담배를 몇 갑을 피는 겨? 적당히 펴. 뼈 삭어. 2017년 인께... 여 어디 있을껴... 글고, 니 어제도 술 처먹고 운전대 잡는다고 지랄혔다며? 미친 겨~? 니 지금 무면허여~"
"몰라~. 그래서 용필이가 대신 운전 하잖아. 오빠, 꼰대야? 잔소리는..."
"밤에 말여 밤에! 니 그러다 진짜 좆되는 겨."
서류철을 펼치며 김사장이 소파에 앉았다.
"보자, 보자... 응, 여 있네. 김 씨가 서울서 말여, IT 회사서 프로그래먼가 했구먼. 그래, 이제 생각나네."
"옴마! 그치! 거봐, 거봐, 내가 눈에 익다 했어. 그렇지, 그렇지!"
"뭐가? 진짜 아는 사람이여?"
"아냐, 아냐. 그런 게 있어. 키키"
김사장은 서울에서 땅을 보러 오는 손님들에게 가능하면 식사를 대접했다. 그의 사무실 옆에는 나름 지역의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이 있었는데, 청국장과 칼국수가 별미였다. 그에겐 나름 작은 투자인 셈이었는데, 식사를 하면서 손님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했고, 그렇게 수집된 정보는 부동산 계약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용식이 혜영에게 서류철을 내미는데, 이렇게 볼펜으로 끄적여 있었다.
'2017. 5월. 서울서 온 김태영이. 나이 서른일곱. 직업 IT 회사 과장이라 함. 프로그래머. 서울서 대학 졸업. 주소지 강남. 차량 BMW 세단. 고향 경북. 오백 평 정도의 땅, 예산 2억. 청바지에 티셔츠. 현 3리, 현2리 땅보고 감. 현3리 쪽 땅을 맘에 들어함.
'2017.8월. 둘이 옴. 마누라 강미정. 나이 동갑. 고향 모름. 까다로운 성격. 직장인. 강남 아파트는 전세. 둘 다 청바지에 티셔츠. 귀촌. 동서2리, 5리, 현 3리 땅 보고 감. 식사했음. 입성이나 씀씀이론 돈이 좀 있어 보임. 계약할 듯. 젊은 나이에 귀촌이라...
'2017.11월. 현 3리 계약.'
"직장이 어디였는지는 모르고?"
"거 읍쓰면, 내도 모르는 겨. 니가 뭐 땀시 동상 뒤를 캐는지 몰라도, 갸는 우더리랑 까라가 달러. 지분대지 말어~."
"이 오빠가 왜 이래? 뭐가 달라? 부부 사이는 괜찮나?"
"그 동상은 그런 까라가 아녀~. 둘이 잘 사니께, 신경 끊어."
"뭐래..."
"니는 말여, 물장사에 돈놀이가 몇 년 짼데 여즉 청맹과니여... 딱 보면 몰러? 저번에 내가 데리고 온 아 있잖여? 갸가 요번에 읍사무소 주사로 올 안디, 갸여~! 딱이여~! 당분간 혼자 산다카지, 생긴 것도 훤~하잖여. 남자가 땡기면 말여, 갸란 말여~. 서류 찾아줘?"
"아냐, 아냐, 그 오빤 내 스타일이 아냐... 그리고 남자 끊은 지가 언젠데!"
"미친년... 개가 똥을 끊지... 내가 엊그제도 모텔 드가는 걸 봤는디..."
"뭔 소리야, 나 아냐~."
"지랄 허네..."
"아니라고~! 진짜..."
혜영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려, 성내지 말고, 좋게 말혀~, 거 뭐여, 현리 간척지 있잖여. 니가 평당 백줬냐? 구십줬냐?"
"오빠가 구십이고, 난 백씩 줬잖아."
"아까 짱구가 계약 하나 혔는디, 이백 오십오에 도장 찍었어."
"아~씨, 그거 매입한게 언젠데, 아직도 삼백 안 됐어?"
"니는 참..."
몇 년 전부터 녹촌읍의 큰 손 박장구는 간척지 주변의 임야를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사들였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이 없듯, 당상관 부동산 김용식의 레이더에 장구의 움직임이 포착됐고, 용식과 혜영도 매입 대열에 합류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녹촌읍 큰 손인 장구가 비밀리에 야로를 부린다면, 그건 보통 건이 아님을 용식이 본능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이다. '찰칵' 정마담이 핸드폰을 꺼내, 김사장이 끄적여 놓은 태영의 개인 정보를 촬영했다.
부부는 아침 일찍 시작한 땅콩 갈무리를 점심 전에 끝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얼룩콩이 조금 남았지만, 4월부터 시작된 부부의 한 해 농사는 이걸로 끝이다. 올 해는 유독 작황이 좋지 않았다. 힘들게 심은 고구마는 대부분 작고 가늘었고, 몇 줄기 달리지도 않았다. 판매는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상품성이 형편없었고, 땅콩도 마찬가지였다. 4년 차 어설픈 농부인 그들의 수확물은 항상 보잘것없었다. 태영이 점심을 준비하려 서둘러 땅콩을 정리하고 집으로 향하는데, 틀밭 옆에 흙이 소복하게 쌓여 있다. 두더지들이 구멍을 파놨다. 집 주변 잔디밭에도 여기저기에 흙이 소복이 쌓여있다. 창문 아래도 사과나무 아래도. 이 놈들을 어떻게 할 뾰족한 수가 없다.
"아, 진짜... 두더지 놈들..."
'오늘은 뭘 할까...?' 태영은 장갑을 벗으며 생각했다. '어제는 파스타, 그제는 떡볶이를 해 먹었으니까, 음... 카레?' 그는 치킨 조각을 고명으로 올린 카레를 무척 좋아했다. 곁들임 음식으로는 무생채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냉동실에 넣어둔 순살 치킨 열 조각을 꺼내, 오븐팬에 담아 난로 위에 올려놓았다. 정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타블릿으로 무협지를 보던 미정이 물었다.
"카레 하게?"
"응, 무생채 조금이랑."
"하오. 하오"
쌀을 씻어 전기 레인지에 올려놓은 태영이 틀밭에서 당근을 하나 뽑아왔다.
"얘는 당근이 노래, 교잡된 것 같아."
"응, 노란 당근이 달어."
갈무리해 둔 호박 조각과 고구마 하나, 감자 두 개, 양파 반 개, 양배추 등등을 적당한 크기로 썰었고, 생채용 무는 아주 얇게 썰어 다진 마늘과 섞었다. 적당한 크기로 썰어놓은 재료를 냄비에 넣고 삶다가 양파와 양배추, 카레 가루를 적당량 넣고 한소끔 끓였다.
"185도에 5분이면 되겠지?"
"응"
난로에 올려놓은 치킨 조각을 오븐에 넣었다. '보자...' 태영이 준비해 놓은 생채에 설탕, 매실액, 고춧가루, 진간장, 참기름을 넣고 버무린다. 이제 넓은 그릇에 밥을 담기만 하면 식사 준비는 끝이다.
"마 씨 할머니다!"
미정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니, 육십 대 중반의 노파가 파티오 도어 앞에서 손을 흔든다. 전기 레인지의 전원을 껐다. 마 씨의 손에 자주색 플라스틱 통이 들려있다. 미정이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마 씨가 의자에 앉으며 '흠 흠'하며, 코를 벌름 거린다. 미정은 마 씨와 의사소통이 조금은 가능했다. 태영은 무슨 의미인지 감을 못 잡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내인 미정은 어느 정도 의미 파악을 했다. 물론, 통역의 정확도 여부는 판별이 불가능했지만, 미정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거다. 미정이 받아 든 플라스틱통을 열어보니, 새빨간 양념이 잘 버무려진 김장 김치가 들어있다.
"김장하셨구나. 와! 맛있겠다~!"
엄지, 검지, 중지를 모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응으응"
"알겠다는데?"
"그 정도는 나도 알아들어."
'점심 식사는 했냐'는 태영의 물음을 미정이 마 씨에게 전달했고, 미정은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답을 태영에게 전했다. 얼치기 통역 같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낭패다. 후다닥 냉동 치킨을 다섯 조각 더 꺼내 오븐에 구웠고, 양파와 양배추, 카레 가루를 조금 더 넣어 카레양을 늘렸다. 넓은 접시에 밥을 나눠 담고, 오븐에 구운 치킨을 밥 주위로 둥글게 장식했다. 그 위에 카레를 붓고, 마지막으로 땅콩 가루를 뿌렸다. 달달한 무생채와 매콤한 카레는 무척 잘 어울렸다. 태영의 눈에 수저를 뜨는 마 씨의 곱은 손가락, 뭉툭하고 굵은 손톱이 들어왔다. 거친 사내의 것과 꼭 같았다. 그에게 그녀의 피로가 전해졌다. 카레가 뿌려진 치킨을 입에 넣은 마 씨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웅얼거렸다.
"응으응!"
"맛있다는데?"
"이봐~.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더 있냐는데?"
"이게 다야."
냄비를 가리키며 양 팔로 엑스 표시를 한다. 미정의 통역은 이런 식이다. 간결하다. 마 씨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쉽다는데?"
"어쩔 수 없지. 통역 안 해도 표정 보면 안다고..."
마 씨가 가져온 플라스틱 통에 귤을 담았다. 한사코 귤을 덜어내는 시늉을 하지만, 그렇다고 빈통으로 돌려보내면, 뒷 탈이 날 확률이 무척 높다. 이후로 마 씨 노파는 비슷한 시간에 몇 번 더 찾아와 점심 식사를 함께 했고, 태영은 어색한 점심 식사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