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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o Aug 20. 2024

미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결 I

낯선 외로움에서 살아남기

미국에서 머문 지 2주가 되었을 때, 왠지 모를 외로움과 후회가 밀려왔다.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며 매주 주어지는 개인 및 팀프로젝트, 영어 수업 과제 모두를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과정은 나를 더욱 지치게 했다. 삼박자도 아닌 오박자를 모두 맞추기란 정말이지 힘든 일이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이 맞다. 수많은 경쟁자률 뚫고 합격을 했지만 정말 이럴 줄은 몰랐던 일이 많았다.

동기가 5시간 넘게 진료를 봤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귀의 염증으로 인해 참다 못해 가이드에게 미국인 의사를 만날 것을 요구하였는데, 정작 가이드 본인은 빠진 채 현지 미국인 가이드와 함께 병원에 갔다고 하였다. 영어가 능숙하지 못한 동기는 파파고를 돌려가며 5시간 넘게 진료를 봐야 했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제이콥스 의과대학에 갔을 때도 자신은 전문용어는 잘 모른다며 통역을 하지 않았고, 가이드를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 공무원이기에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자신의 일을 미루기 일쑤였다. 가이드보다는 오히려 재단에서 보내온 ‘감시자’에 가까웠다. 이에 대해 재단측에서는 오히려 참여자들을 위해 보낸 가이드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며 책임감 없는 태도를 보였다. 기숙사, 비행기 왕복, 조식, 점심, 한 끼에 6,000원가량의 저녁 식비 지원으로 자신들의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것이다. 제3자가 보기에는 이 정도면 다해준거 아니냐는 시선도 있을테지만 참여자 입장으로서는 ‘보여주기 식’정책이었다는 점에 한계가 있었다. 모든 지원을 받은 것 같지만 그만큼 개인적으로 감수해야 할 일들도 많았다. 그것은 시간과 예상치 못한 금전적인 부분에 대한 손해였다. 그렇지만 잃는 것이 있는만큼 얻는 것도 있는 법.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한정된 자원에서 최대한 재단이 원하는 결과를 내야 했다. 이것은 면접이 아닌 애당초 지원자가 겪을 애로사항들을 먼저 안내해주는 것이 우선이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합격하고 난 다음에서야 받게 된 재단의 요구사항들은 갑이 아닌 을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불편불만만 늘어놓을 수만은 없었다.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네 말에는 책임을 지고 싶었다.


네가 미국에 오고 싶었던 이유는 '해외 간호사'에 대한 관심과 이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공유하고 싶었다. 그것이 네가 글을 쓰게 된 단 하나의 이유였다. 미국에 오기 전 전공선택으로 듣게 된 진단검사 수업에서 서로 인사를 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인사의 내용은 이름, 나이, 앞으로 하고 싶은 분야에 대해 자기소개였다. 다양한 나이대로 구성된 간호학과인 만큼 정말 다양한 이력으로 삶의 무대를 누리고 제2의 인생으로 간호사를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외에도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대 초반의 간호대학교에 오게 된 동생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의 현역들은 '해외 간호사'를 꿈꾸었다. 이유는 한국 간호 문화의 '태움과 대중들의 인식, 열악한 근로 환경' 때문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러한 단점들을 커버할 수 있는 곳은 바로 해외 무대였다.

(좌) 지역 축제에서 사먹게 된 맨소래담 맛이 나는 ‘Beer’다. 진짜 맥주가 아닌 알고보니 이름만 맥주인 음료였다. East Aurora에서 맛보게 된 아이스크림 (우)

해외 무대라면 분명 상황은 다를 거라는 생각에 나도 해외 간호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들은 '왜 이곳 미국까지 와서 간호사 일을 하는 걸까? '라는 질문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렇게 오게 된 미국에서의 답 찾기는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진행된 영어 프로그램 이후 버팔로 현지 시내 구경 및 식료품점 방문 등은 네가 미국에 오게 된 취지와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동기들은 '버팔로 경제 살리기'라는 말을 할 정도로 쇼핑센터를 자주 방문하곤 하였다. 네가 원하는 답을 찾기 위해서는 네가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했다.

그나마 간호학과와 관련된 프로그램 중에 하나인 '제이콥스 의과대학'은 마지막 주로 미뤄지면서 과제 수행은 난항을 겪기 시작했다. 그저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직접 내가 나서기로 했다.  

이전 1기를 통해 얻게 된 내용을 바탕으로 만나게 된 현지 가이드 브루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영문 이메일을 쓰게 되었고 고맙게도 현지 한인 간호사와의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동기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도 했다. 한인 간호사와 엔지니어를 만나게 될 수 있는 기회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난 네가 제일 되고 싶고 관심 있어하는 NP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NP는 간호사와는 다르다. 처방권이 없는 간호사와는 달리 NP에게는 처방권과 정신과를 개업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는 데, 물리치료사였던 동기에게 들었던 말로는 미국에서 물리치료사 또한 6년간의 대학교 과정을 마치면 개업권이 주어진다고 하였다. 여담을 뒤로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다면 미국에서는 간호사 면허를 취득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NP 과정을 이수하면 전문간호사가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마지막 챕터에서 조금 더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NP를 만나고 싶었던 난 뉴욕한인간호사 협회와 연락을 취하였고, 유튜브에 한인 간호사 및 NP들에게 이메일을 보내어 인터뷰를 요청하였다. 감사하게도 몇몇 선생님께서는 바쁜 시간을 내어 정성스러운 답변을 해주시기도 했지만 일부는 답을 피하거나 나의 질문이 너무 세부적인 것이어서 오히려 컨설팅 비용을 받아야 한다며 크몽에서 결제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크몽에서 해외간호사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돈을 지불하고 관련 컨설팅을 받는 현장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시행착오를 겪어 쌓아 온 노하우이기에 그만한 대가를 바랄 수도 있겠지만 선한 의미로 와닿지는 않았다. 이러한 정보조차도 빈부격차를 느껴야만 하는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지도 모르는 한낱 전문대 학생을 위해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NP 선생님이 계셨다. 동기들과 동 떨어져 1인 독방 생활로 외로움에 하루하루 눈물로써 지새운 고단한 미국 생활을 견뎌내고 있을 때 만나게 된 선생님이 정말 감사했고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나왔던 질문은

어떻게 외로운 미국 생활을 견뎌내셨나요?'


였다. 외로움이 들었던 이유는 미국에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같이 여행을 가자고 했던 동기들이 있었지만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 놀고 즐기며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금전적인 여유가 필요했다. 금전적으로 많이 부족하다보니 사람들과 활동함에 있어 위축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첫째 주는 시차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2주차 때는 평일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주말에 캐나다 또는 뉴욕, 워싱턴주로 떠났다. 주말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고 자유 시간이었다. 이 시간을 틈타 모두들 사비로 미국 여행을 다녔다. 그럴 형편이 없었던 난 주말 미국 여행은 꿈조차 꾸지 못했다. 퇴직금 또는 부모님의 지원으로 여행을 가는 듯했다. 비교한다면 끝도 없겠지만 서른 살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학교 등록금내기도 빠듯한 상황에서 여행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그렇게 동기들은 서서히 나와 멀어져 갔다. 동기들과 함께 어울리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돈'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같이 어울리면서 사 먹어야 할 돈도 우버비도 이 모든 것을 감당해 내야 하는데, 독방 신세가 되는 순간부터는 1인분을 홀로 책임져야 하기에 미국의 비싼 물가를 감당하기 힘든 건 사실이었다. 그에 반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방은 반반씩 식료품비 등을 부담하기에 생활비 부담이 덜했으리라 생각된다.

미국에서의 독방 생활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너무나 높은 침대 때문에 항상 의자를 밟고 올라갔어야 했는데, 친절하고 상냥한 외국인 친구 덕분에 낙상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독방을 쓰게 되면서 멀어지게 된 팀원들과의 관계는 나를 더없이 외롭게 하였다.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면서 심리적 거리도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사람마다 상황은 다를 수 있지만 인종차별 또한 겪게 된 이후로 미국에 지내는 것에 대한 외로움이 훨씬 더 크게 와닿았다.


선생님의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영어를 좋아했어요


오히려 선생님은 내게 물었다.

"지효씨는 왜 NP가 되고 싶으세요?"

한국이었다면 바로 답했을 것을

미국에 온 지금,

답을 망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NP #해외취업 #인터뷰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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