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면 남편은 여느 때보다 바쁘다. 평범한 직장인인 그가 뜻이 맞는 친구 몇과 함께 개최하는 나이트 비전스 투르쿠 영화제가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나이트 비전스 투르쿠는 부산국제영화제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처럼 그 도시만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영화제는 아니다. 수도인 헬싱키에서 매년 2회 열리는 나이트 비전스 영화제의 프랜차이즈 격이라고나 할까.
행사 타이틀을 공유하는 헬싱키 영화제의 작품들 중에서 상영작을 고르지만, 상영작과 전시장 데코, 매점(?)의 판매품목 등 크고 작은 의사결정을 내리는 조직위원회는 헬싱키 영화제와는 별도의 단체다. 남편과 친구들이 만든 비영리 단체는 매년 선정이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는 정부 지원금과 티켓 판매액. 참가자들의 선의에 기대 영화제를 연다.
영화제를 이끄는 사람들이 영화와 관련해서 뭔가 대단한 경력이 있는 건 아니다. 대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현재 영화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체의 대표는 세 아이의 아빠인 간호사이고, 미디어 업무를 맡은 남편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연동하는 법을 몰라 아내인 나에게 MZ 아니고 베이비부머 아니냐고 놀림을 당하는 40대 직장인이다. 아, 단체의 대표는 DIY 펑크록 레코드 레이블의 대표이며 에어 B&B를 운영하기도 한다. 남편은 소단퀼라 백야 영화제에서 자원봉사를 한 경력이 있고, 여가시간엔 온갖 영화를 끊임없이 보고 또 본다. 가뭄에 콩 나듯 도와주러 가는 나는 대학생 대상 모 잡지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대학생 기자로 활동한 적이 있긴 하다.
영화제가 열리기 전 두어 달 동안 남편은 조직위원회 회원들과 친목모임인지 회의인지 외부인의 눈으로는 구분하기 힘든 온오프라인 모임을 여러 차례 가졌다. 자전거를 타고 단골 술집과 대학가와 지역의 중고용품 가게에 도서관 등에서 직접 출력한 영화제 포스터를 전달하러 가기도 했다. 심지어 올해 상영작 중 하나인 <아키라>의 관람객들을 위해서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애니메이션 전시회에 가서 경품으로 지급할 A4 홀더들을 사 오기도 했다. 플라스틱 상자에 든 영화 필름을 가지러 헬싱키에도 다녀왔다. 이 모든 발품에 드는 시간과 노력은 수익은커녕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어려운 영화제의 특성상 조직원들 개인이 부담한다. 그동안 조직원의 배우자인 나의 집안일과 자녀 양육 부담이 증가하는 건 말해 무엇하겠는가. (뉴스: 올해는 좌석점유율이 거의 100%에 달한 <아키라>와 50%를 넘긴 <비틀쥬스>, 상영관을 찾아준 친구 및 친척들 덕에 수익이 조금 났다고 한다.)
It's Showtime!
올해는 나도 1988년에 개봉한 팀 버튼 감독의 <비틀쥬스>를 보기 위해 아이와 그 친구를 데리고 극장을 찾았다. OTT의 시대에 무려 36년 전에 개봉한 영화를 (디지털 리마스터링도 아닌) 필름으로 보려고 누가 올까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전예매와 현장구매로 약간 외딴곳에 있는 상영관을 찾아주었다. 오래간만에 서비스 모드를 장착하고 티켓 확인 및 스낵 판매를 조금 도운 다음 영화를 봤다. 미션임파서블 시리즈의 국장 역할로 친숙한 알렉 볼드윈이 안경을 쓰고 아주 선한 인상으로 나오는 영화이기도 하고, 위노나 라이더, 지나 데이비스 등 젊은 시절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 배우들을 보며 여배우들의 스크린 수명이 얼마나 짧은지 절감하기도 했다. 허옇게 칠한 얼굴과 과장된 표정이 <배트맨>의 진지한 모습과 매칭하기 어려운 비틀 쥬스 역의 마이클 키튼의 능글맞은 연기는 재밌긴 하지만 오늘날의 잣대론 코미디만으로 느껴지긴 어려운 면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어릴 때 재미있게 봤던 영화를 떠올리며 극장을 찾은 사람들이 모인 관객석에서는 종종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해진 시간에 극장을 찾아 상영시간을 기다리는 마음과 커다란 스크린이 선사하는 시각적, 청각적 경험은 집에서 TV로 영화를 볼 때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자원과 투자가 수도권 및 대도시로 집중되는 지방소멸의 시대에 아이가 성장해서도 투르쿠에 머물지, 수도권으로 이주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구 20만을 겨우 넘긴 이 도시의 시민들이 온라인 쇼핑이 아닌 가게를 방문해 원하는 물건을 직접 보고 살 수 있고, 수도권을 방문하지 않고서도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순간이 가급적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남편의 수지가 맞지 않는 취미생활을 조금 더 봐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