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무진기행》에서 《헤어질 결심》까지

by Henry


다시 배우는 기타

올해 2월, 다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두 달쯤 손에 쥐어본 게 마지막이었으니, 이제 와서 새로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 익혔던 몇 개의 코드가 어렴풋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주법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오래전 연습했던 기억이 서서히 떠오른다. 어릴 적 익힌 악기나 운동은 몸이 기억한다더니, 정말 그렇다.


하지만 그때 배운 것만으로는 기타를 친다고 말하기 어렵다. 제대로 된 연주는커녕, 코드 하나 제대로 누르기도 버겁다. 결국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셈이다. 매일 연습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만, 틈만 나면 기타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손끝을 단련하다 보니, 어느새 연주할 수 있는 주법이 몇 개 늘었고, 어렵다고 소문난 F 코드나 Cm도 조금씩 손에 익는다.


용기를 내어 기타 치며 노래하는 영상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대부분 빈말이겠지만, “열심히 한다”는 격려가 돌아왔다. 아직 귀가 얇은 나는 덕분에 괜히 우쭐해진다. 이러다 언제 철이 들지,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하지만, 중년의 남자가 제대로 기타를 연주해 보겠다는 결심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안개

그러다가 문득, 멜로디를 연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는 시간,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마자, 연주곡을 하나 골랐다. 바로 2022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의 주제곡, 《안개》이다.


이 곡은 원래 1967년 가수 정훈희가 불러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송창식이 1970년대 초 리메이크했다. 작곡가 이봉조는 이 곡을 1967년 개봉한 김수용 감독의 영화 《안개》에 삽입했다. 영화 《안개》는 소설가 김승옥이 1964년 발표한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영화와 노래, 그리고 소설이 겹겹이 쌓여 하나의 안개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노래 <안개>의 뿌리는 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다. 오래전에 한 번 읽은 기억은 있지만 내용이 아득해, 다시 도서관을 찾아 책을 빌렸다. 40쪽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이야기라,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책은 언제 읽느냐에 따라 감상이 달라진다. 예전에 읽었을 땐 그저 무기력한 청춘의 방황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삶의 한 곳을 잃어버린 사람의 애잔한 울림이 스며든다. 그건 내가 이미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더 절절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종이책을 좋아한다. 마음이 움직일 때면, 책장 깊숙이 꽂힌 책을 꺼내 손끝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며 다시 읽을 수 있으니까. 그때마다 다른 감정과 기억이 떠오른다. 이런 여운은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아날로그 감성의 미학이다.


안개의 마을, 무진

《무진기행》은 서울에서 제약회사 이사로 일하는 주인공 윤희중이 승진을 앞두고 고향 무진(霧津)으로 머리 식히려 내려오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곧 전무 승진을 앞두고 아내의 권유로 고향으로 휴가차 내려왔지만, 그건 서울을 떠날 핑계일 뿐이다. 사실은 내면의 피로와 공허함이 그를 고향 무진으로 이끌었다. 그는 광주에서 기차를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그곳에 도착했다.


무진은 그의 고향이자, 과거의 감정과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안개가 짙게 깔린 이곳은 도시의 공허한 현실로부터 한발 물러설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그곳에서는 내면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 기울일 수 있다.


주인공 윤희중은 그곳에서 20대의 자신을 떠올린다. 그 시절에도 지금처럼, 무진은 안개에 싸여 있었고, 안갯속을 걷는 그는 언제나처럼 모호한 방황에 빠져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진의 안개는 그의 삶을 가로막고 감싸 안으며, 동시에 감추고 있는 것들을 은근히 드러낸다.


무진에서 그는 음악 교사 하인숙을 만난다. 예민하고 지적인 감성을 지닌 그녀는, 이 정체된 무진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인다. 그녀는 안개 외엔 내세울 것 없는 이 도시의 권태로움에 질려 있었고, 주인공에게 조심스럽게 말한다.


“서울로 데려가 주세요.” 하지만 이내, 그녀는 그 말을 스스로 거둬들인다. 마치, 자신이 꿈꿨던 탈출이 허망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주인공은 그런 그녀의 눈빛과 말투에서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린다. 한때 자신도 그런 불안과 막연한 기대 속에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했다는 걸, 그리고 결국 자신도 무진처럼, 어딘가 안갯속에 정체된 사람이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무진의 안개에 묻혔다.

짧지만 강렬한 감정 교류는,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그의 내면을 흔드는 작은 불꽃같았다. 무딘 일상에 잊고 지냈던 감성의 일부가, 그녀를 통해 다시 깨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그 만남은 허무하게 끝난다.


아내로부터 이사회에 참석하라는 전보가 날아오고, 그는 애초 일주일쯤 머물 계획을 접고 단 사흘 만에 무진을 떠난다. 무진을 떠나고 싶어 하던 그녀에게, 그는 아무런 인사도 남기지 않는다. 조용히,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난다.


무진은 안개의 마을이다. 모든 경계가 흐려지고, 모든 것이 잠시 유예되는 곳. 긴 방황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조용히 그곳을 떠난다. 밤새 온 세상을 덮었던 안개는, 아침이면 아무 일 없던 듯이 사라진다. 그는 결국 안개였고, 하인숙은 아직도 그 안갯속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 바로 김수용 감독의 《안개》이고, 주제곡은 이봉조가 작곡한 같은 제목의 노래 《안개》다. 이 노래는 1970년 도쿄 국제가요제에서 가수상과 "월드 베스트 10"을 수상하며, 국내 최초로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한 곡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그만큼 세련된 곡이고, 지금 들어도 서정성과 감각이 빼어나다.


그리고 55년이 지나,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이 노래는 다시 한번 짙은 감동을 선사했다. 원곡도 아름답지만, 영화 속 편곡은 전주와 중간 선율이 특히 애틋하고 인상적이다. 멜로디가 마음에 오래 남아, 나도 그 감정을 기타로 담아내고 싶다. 여전히 아득한 결핍에서 방황하는 나는 무진의 짙은 안개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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