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의 침묵
오후 2시의 지하철 2호선, 창밖에는 여전히 8월의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다. 냉방이 잘 된 지하철 안에는 흥미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낯선 옆 사람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옆 사람과 눈길을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을 지켜보면, 성별에 따른 차이가 눈에 띄는 경우가 많다.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낯선 사람과도 대화를 시작하지만, 많은 남성들은 나란히 앉아서도 서로 말을 걸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이는 절대적인 규칙은 아니며, 개인차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향성은 왜 나타나는 걸까? 남성이 낯선 사람과의 대화를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은 그 이유를 진화적 관점과 문화적 관점에서 함께 살펴보려 한다. 진화심리학은 흥미로운 설명을 제공하지만, 아직 완전한 증거를 갖추지는 못했다. 따라서 문화와 사회적 학습의 영향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아직 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 원시림 속 한 무리의 사냥꾼들이 매머드를 추적한다. 발소리 하나, 숨소리 하나가 생사를 가른다. 온 신경을 집중하고 오직 목표만 생각한다. 이때 옆에서 누군가 말을 붙이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사냥 실패가 아니라 일행 전체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아주 오랜 세월 많은 남성에게 말 많은 것은 적이었고, 침묵이 동지였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출현 이후 약 30만 년간,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인류가 나무에서 땅으로 내려온 500~600만 년 동안 이런 생존 전략이 유지되어 왔을 가능성이 있다
사냥의 법칙은 명확했다. 먼저 절대 소리 내지 말고 침묵하라. 소리는 사냥감을 도망가게 하거나 오히려 사나운 포식자를 불러들인다.
다음으로 오직 사냥감에만 집중하라. 한순간의 방심이 목숨을 앗아간다. 옆 사람을 쳐다보지 말고, 오직 목표만 쳐다봐라.
그러고는 사냥감을 향해 직진하라. 둘러 가면 공격 기회를 놓치니 앞도 뒤도 돌아보지 마라.
해결보다 공감이 필요해
사냥은 가장 완벽한 목적 지향적 행동이다. 오랜 세월 많은 남성은 목적을 해결하는 동안 다른 소리를 차단하는 집중 패턴을 발달시켜 왔다.
이런 경향은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많은 남성이 대화를 '문제 해결의 도구'로 여긴다. 긴 설명보다 간결한 설명을 듣기를 원하고, 빠른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나선다. 고민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으면 남자들은 이렇게 소리친다.
"그래서? 고민이 뭐야? 핵심만 말해!"
아내가 남편에게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어"라고 말하면, "그러면 이렇게 해봐" 혹은 "당신이 잘못한 것 아니야?"라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아내가 원하는 건 해결책이 아니라 공감이다. "정말 힘들었겠다", "나도 그런 적 있어"라는 반응을. 이것이 목적 달성을 중시하는 남편과 이해받기 원하는 아내 사이에 존재하는 생각의 차이다.
21세기는 남자에게 가장 가혹한 시대
산업혁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화였다. 불과 250여 년 만에 약 30만 년, 어쩌면 더 오랜 시간 지속되어 온 인류의 생활양식을 완전히 바꿨다. 사냥감이 뛰어놀던 야성의 사냥터는 사라지고, 공장과 사무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 더 이상 포식자는 존재하지 않지만, 남성의 뇌는 여전히 사냥꾼의 뇌로 남았다.
20세기 후반, 정보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상황이 빠르게 달라졌다. 제조업이 쇠퇴하고 서비스업이 부상했다. 물리적 힘보다는 감정 노동이, 위계보다는 수평적 협력이, 개인 성과보다는 팀워크가 중요해졌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같은 현대 기업들의 문화를 보라. 수평적 소통, 창의적 아이디어 공유, 감정적 지지, 이러한 것들은 전통적 남성성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남성들에게 복합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인 기대를 품고 있다. 여전히 강인하고 책임감 있는 전통적 남성상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감성적이고 다정한 태도, 적극적인 육아 참여, 가사 분담까지 요구한다. 이처럼 상반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많은 남성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
오죽하면 현대 남성의 이런 처지를 빗대어, 호주의 남녀 관계 전문가 앨런 피즈와 바바라 피즈 부부는 “21세기는 남자에게 가장 가혹한 시대"라고 말했을까.
더 심각한 것은 남성은 남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연구에 따르면, 남성은 여성보다 정신건강 상담을 받을 확률이 50% 낮다. 게다가 우울증 진단을 받아도 치료를 거부하는 비율이 2배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와 '약함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학습된 행동 패턴이 만든 결과다.
고민을 털어놓는 남자
많은 남성들에게서 흥미로운 행동 패턴을 관찰할 수 있다.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면 자신감과 만족감을 드러낸다. 그때는 말이 많아지고 성과를 자랑하기 바쁘다. 사냥꾼은 사냥감을 포획할 때 진가를 보인다.
반면, 목표 달성에 실패하면 급격히 위축되고 말수가 줄어든다. 또 복잡한 문제나 고민이 생겼을 때는 타인과 대화해 위안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고민한다. “아 괜히 말했다. 말해도 아무 답도 없는데”, 남자의 마음만 더 심란해진다. 그래서 남자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다른 사람한테 말하기 꺼린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뇌는 높은 가소성을 가지고 있어 환경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 현재 남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급속한 사회 변화와 오랜 기간 학습된 행동 패턴 사이의 일시적 부조화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적절한 지원과 노력을 통해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 집중력과 책임감은 살리면서,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핵심이다.
오후 2시, 2호선 지하철 안의 풍경으로 돌아가자. 나란히 앉았지만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 남성들. 많은 남자가 낯선 사람에게 쉽게 말을 걸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화적 성향, 사회적 학습, 문화적 압력이 만들어낸 학습된 침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