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안의 낯선 풍경
한낮의 따가운 햇살이 유리창을 따라 미끄러진다. 지하철 2호선, 오후 2시. 출근길의 북적임도, 퇴근길의 피로도 한발 물러선 시간. 좌석 사이엔 여유가 있고, 사람들의 숨결도 한층 조용하다. 이는 내가 본 지하철 풍경이다. 개인의 경험이지만, 어쩌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하철 안을 둘러보면, 곳곳에 중년 남성과 여성의 얼굴들이 보인다. 중년 남성과 중년 여성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듯하다. 무뚝뚝한 표정의 중년 남성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낯선 사람에 말을 건네는 일이 없고 눈길마저 피한다. 반면 여성들은 밝은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말을 건다. 모르는 상대와도 스스럼없이 일상 이야기를 나눌 자세가 되어 있다. 가벼운 안부 인사가 어느새 삶의 이야기로 번져간다
이러한 모습은 나이가 들수록 더 뚜렷해진다. 오죽하면 "남자는 나이 들면 집으로 들어오고, 여자는 밖으로 나간다"라고 했을까. 나이가 들수록 여성은 점점 씩씩해지고, 남성은 점점 조용해지는 경향이 있다.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도 오히려 남성들이다.
자녀들이 장성해 독립하면, 여성은 가사노동에서 벗어나며 바깥 활동을 시작한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고, 모임에도 자주 나간다. 반면 남성은 직장에서 물러나면 만날 사람이 확연히 줄어든다. 직장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연결망이 사라지면, 세상과의 관계도 함께 끊어진다. 자신도 모르게 고립되어 결국에는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가장 큰 이유는 호르몬 변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몇 가지 사회심리적 요인이 있다. 그 내용은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오늘은 지하철 한 칸 안에서 벌어지는 서로 다른 두 풍경을 먼저 살펴보자.
풍경 하나, 침묵하는 중년 남성들
맞은편 정장을 입은 남성이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다. 업무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일까? 눈빛은 날카롭지만, 눈 밑의 그림자는 깊다. 헐렁한 재킷과 풀린 넥타이가 요즘 많이 피곤한 모양임을 말해준다. 그는 밀려드는 업무와 떨어지는 체력, 중년의 무게에 눌려, 홀로 싸우는 듯하다.
출입문 근처에는 살짝 어깨가 굽은 남성이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 그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그 어깨에는 수십 년간 쌓인 책임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은 무기력하게 하루를 힘겹게 버티는 모습이다. 은퇴 후 갈 곳 없는 오후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좌석 끝자락에는 헤드폰을 낀 남성이 앉아 있다. 영어 회화일까, 인문학 강의일까. 아니면 음악을 듣는 것일까. 수첩에 무언가를 메모하는 손끝에서, 아직도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늦은 배움에 대한 간절함이 그의 집중된 손끝에서 읽힌다. 하지만 그에게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일 것이다.
중년의 남성들은 나란히 앉아 있지만, 서로를 보지 않는다. 말도 없고, 눈길마저 피한다. 침묵 속에서 자기 삶의 무게를 끌어안고 있다. 마치 저 먼 암흑의 우주 공간을 홀로 떠다니는 고장 난 인공위성들 같다.
풍경 둘, 대화하는 중년 여성들
반면 같은 칸, 반대편 좌석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50대로 보이는 여성 세 명이 앉아,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어머, 그 드라마 봤어요? 남자 주인공이 진짜…”
“나 요즘 무릎이 시큰해서, 글루코사민 다시 먹기 시작했잖아요.”
웃음이 터지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처음 본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이미 대화가 흐르고 있다. 처음엔 옷 하나, 가방 하나를 계기로 시작됐을 것이다.
“이 색깔 예쁘네요.”
“이거요? 세일할 때 샀어요”
그 말 한마디로 낯선 이들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남편 이야기, 자식 이야기, 병원 이야기, 날씨 이야기, 그리고… 남자들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하지 못할 말도 나눈다. 이들에게 대화는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니다. 누군가의 걱정은 다른 이의 공감이 되고, 누군가의 푸념은 다른 이의 위로가 된다.
"우리 진짜 나이 들었나 봐요."
그 말에 웃음이 터지고, 그 웃음은 체념이 아니라 수용이다. 나이 듦이란 결국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같은 칸 안의, 서로 다른 두 개의 풍경이다. 남성들은 고요히 침잠하고, 여성들은 대화를 나눈다. 한쪽은 침묵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다른 쪽은 말속에서 위로를 건진다. 여성들은 용감한 투사처럼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 낯선 이에게 자연스레 입을 연다. 반면 남성들은 말없이 각자의 세계에 갇혀 있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 누군가는 먼저 대화를 시작하고, 누군가는 시선을 외면한다. 중년 이후의 삶이란, 어쩌면 그 작은 차이에서부터 갈라지는 또 다른 여정이다. 과연 이 풍경들은 운명일까, 아니면 선택일까. 호르몬의 변화일까, 사회가 만든 역할의 흔적일까. 답은 앞으로 찾아가야 할 길 위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