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향이 없다.

by Henry


짧은 사랑과 긴 슬픔의 도시

짧은 빛과 긴 어둠, 짧은 기쁨과 긴 좌절, 짧은 사랑과 긴 슬픔, 그 도시가 내게 남긴 건 대체로 그런 것들이다. 서러움을 싫도록 안겨 준, 그런 기억만 남은 곳이다.


노모는 아픈 여동생을 간호하며 그곳에 머물고 있다. 피붙이라고는 먼 곳에 떨어진 나 하나뿐. 돌아가고 싶지 않아도, 끝내 절연하려 해도, 그럴 수 없다. 끊어지지 않는 인연으로 묶인 그 도시는 내게 슬픔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대 돌아갈 고향이 있는가? 내겐 고향이 없다. 고향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나는 돌아가고픈 고향이 없다.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내겐 아픔이고 눈물이다. 행복했던 기억보다, 기뻐했던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세 번째 돌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무렵 여동생은 태어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았다. 고생의 문은 커다란 괴물처럼 입을 활짝 벌렸고, 어린 내가 감당하기 벅찬, 신산한 세월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시골 살림이야 어디 내세울 만한 구석이 있었겠는가. 찢어지게 가난했다 해도, 그건 큰 흉이 아니었다. 누구네 집이건 하루하루 입에 풀칠 걱정을 하던 시절. 한 집 걸러 한 집마다 가난과 궁색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 시절, 가난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하루치 양식조차 넉넉지 않은 집에 가장마저 없으니, 그 황망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 이미 돌아가셨고, 할아버지, 삼촌, 어머니, 여동생에 아직 시집도 안 간 고모까지, 돌봐야 할 식구는 넘쳐났다. 손바닥보다 작은 논은 소출이 늘 모자랐고, 산비탈 참외밭은 큰돈 될 리 없었다.


변변한 농사도, 일거리도 없는 시골 형편이야 어디나 딱한 사정을 만들었다. 종일 일하고 살림까지 어머니 몫으로 남은 건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다. 미혼인 시동생과 시누이 뒷바라지까지. 시간이 지나도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직 20대 중반에 불과한 어머니의 삶은 무척이나 고달팠다.


지워버린 유년의 기억들

얼마나 많은 날을 고민했을까. 어머니 혼자 돈 벌러 도시로 떠나는 결단을 내렸다. 그것만이 그 질곡에서 나와 여동생을 건져낼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그녀의 삶은 오로지 나와 여동생에게 맞춰졌다. 젊음을 송두리째 우리에게 받친 것이다. 그녀의 헌신이 눈물겹게 고마우면서도 내게 평생 지울 수 없는 멍에로 남았다.


어머니가 그 도시로 떠난 뒤 후폭풍이 몰아쳤다. 근거 없는 소문이 들렸고, 그것은 나의 유년 시절의 기억을 스스로 지워버릴 만큼 깊은 상처로 남았다. 아마도 내 안의 방어기제가 그 시절을 덮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훗날, 그것이 모두 근거 없는 억측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명절 때 어머니는 시간을 내 그 도시에서 우리를 찾아 잠시 들렀다. 그런 날이면 집 안엔 갈등과 다툼이 어김없이 뒤따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머니의 눈물. 몰래 그것을 훔쳐보던 어린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저 마음 한가득 슬픔을 삼켜야 했다. 그때, 분연히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내게 있었더라면....


졸지에 나와 여동생은 천덕꾸러기로 남겨졌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이던 시절. 꽤 오랜 시간을 그렇게 버텨야 했다. 곧이어 삼촌이 결혼했지만, 한 입 먹여 살리기도 힘들던 시절에 조카 둘을 거두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런 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저 어린아이였던 나는 그런 이치를 헤아릴 능력이 없었다.


경제력이 넉넉지 않은 삼촌과 늘 지쳐 있던 어머니 대신 가난한 살림을 떠맡은 건 숙모였다. 그 밑에서 우리는, 어린 나이에 말하자면 시집살이 같은 삶을 겪었다. 주눅 들고, 눈치 보고, 제대로 항거하지 못하는 습관은 바로 그 시절, 몸에 밴 것이었다. 투정 부릴 대상조차 없었기에, 싫다는 말조차 한마디 해보지 못했다.


어머니와 헤어진 지 몇 년 뒤, 그 도시에서 다시 만났다. 하지만 살림살이가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혼자 감당하기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나, 세 사람이 다시 모였다. 행복했어야 할 시간이었건만, 그런 기억은 별로 없다. 궁핍은 여전히 나를 옥죄었고, 어머니의 희생 앞에 짓눌린 마음은 또 다른 위안을 찾아 방황했다.


반항보다 복종을 더 빨리 배웠고, 비루하게라도 살아남으려는 본능이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 피해 도망가려는 비겁함을 먼저 익혔다. 그 모든 건 결국, 훗날 내 영혼을 뿌리째 흔든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졌다. 한 시절의 사랑이 무너졌고, 내 청춘도 그렇게 끝이 났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야 한다.

지금은 그땐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래도 그때의 아픔은 여전히 아픔으로 남아 있다. 내게 화인처럼 각인된 '용기 없음'을 극복하기 위해 내가 쏟아부은 수고로움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인식이 제대로 싹튼 뒤로는, 닥치는 대로 심리학책을 읽었다. 거기서 발견한 문구들을 적어두었다가 수시로 꺼내 보며 마음을 달랬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적는 자만이 생존한다'는, 내 방식의 ‘적자생존’이 시작된 것은.


내 청춘은 많이 아프고 우울했다. 어디를 떠올려도 '고향'이라 부를 만한 곳엔 즐거움보다 그늘이 먼저 떠오른다.


사람들은 말한다.
“지금은 다 좋아졌잖아.”
“그만하면 성공한 거 아니야?”


그 말 틀리지 않다. 하지만 왜일까. 나는 아직도 상실의 시대를 지나지 못한 채, 그 언저리를 오래도록 맴돌고 있다.


나는 그 도시를 다녀왔다. 그곳에 남겨진 그녀들을 데리고 병원에 들렀다. 수시로 그렇게 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숙제가 되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곳. 그 도시는 내게 여전히 끝나지 않은 기쁨과 슬픔의 이중주로 남아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도시를 오가며, 과거와 화해하는 중이다.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 더는 도망치지 않는다. 아팠던 기억들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고, 나는 그 위에 이렇게 글을 쓴다. 살아 있으므로 그리고 또 살아가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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