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퉁이 작은 카페의 여름 한낮
매년 기록을 갈아치운다. 기록을 깨고 신기록을 세우는 일이 전혀 반갑지 않다. 해마다 여름은 더 뜨겁고, 재작년보다 작년이, 작년보다 올해가 더 숨 막힌다. 이거야 원, 한 해가 지나면 또 기상 관측 이래 최고의 기온을 자랑하니, 이러다간 정말 죽을 맛이다.
연일 날씨가 유별나다. 볕이 좋다 못해 펄펄 끓는다. 한여름 해는 온갖 강짜를 부린다. 그나마 창틀 너머로 내려앉은 초록의 그림자가 작은 위안이 된다. 마침 쇼팽의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곁에 있다. 야트막한 언덕을 마주한 길모퉁이의 작은 카페, 그 한낮이 고즈넉하다. 이만하면 한여름 나기가 그리 애달프지만은 않다.
나는 다시 어설픈 캔버스를 마주한다. 한여름의 더위에 지친 풍경만큼이나 내 마음도 조금은 지쳐 있다. 그런 마음을 달래려 화실 원장님과 그림 이야기를 나눈다. 역시, 현자는 멀리 있지 않다. 가르침을 얻는 순간만큼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사막이어도 괜찮다. 마음속엔 조금씩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진다.
중년 남자의 '그림 그리기'는 말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붓을 들과 캔버스 앞에 선 멋진 장면을 떠올리지만, 안타깝게도 내 경우는 그것과 거리가 멀다. 무딘 감각과 굼뜬 손재주 탓에, 속이 답답하고, 푸념만 늘어놓기 일쑤다. 눈은 높아졌는데 손이 따라주질 않으니, 실망도 그만큼 크다. 그럴 때마다 "이젠 그림이 뭐고 다 싫다"라고 투정 부리는 모습은 꼭 철부지 아이 같다.
불꽃처럼 살다 간 남자
빈센트 반 고흐, 아마도 세계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일 것이다. 그건 그의 독창적인 화풍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는 지독히 외롭고 불행했다. 사랑엔 번번이 실패했고, 1,5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기고도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다. 동생 테오의 후원 없이는 버틸 수 없었던 가난한 화가. 38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 자체가, 그의 그림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갑자기 왜 고흐 이야기냐고? 너무 많이 아는 게 때론 병이 되기도 해서다. 고흐의 그림을 보고,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수없이 떠올리다 보면, 웬만한 작품에선 감동이 잘 오지 않는다. 게다가 색채와 화가에 관해 잡문이나마 끄적거렸던 나로서는 헛바람이 단단히 들었다. 그러니 내 손으로 그린 서툰 그림 앞에선 얼마나 자주 좌절하고, 얼마나 자주 붓을 던졌겠는가.
이쯤 되면 나도 인정한다. 내 시건방이 도를 넘었다. 흰소리나 해댄다는 핀잔을 바가지째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문득,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떠오른다.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카이레폰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물었다.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무녀의 답은 "없다"였다.
델포이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이 새겨져 있었다. 이만하면 잘난 척하고 뻐길만 한데 소크라테스는 이 말에 이렇게 자기 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내겐 그런 고상한 표현보다, 이 말이 훨씬 잘 어울린다.
“내 꼬라지를 알자!!”
"나는 내 수준을 안다!!"
고흐는 10년 동안 오직 그림에만 몰두했다. 처음 몇 년은 스케치만 그리며 기초를 다졌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붓을 잡았다. 그런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에, 그는 마침내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냈다.
고흐 같은 천재도 그토록 치열하게 살았다. 그런데 재주도 변변치 않은 나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결과만 바랐다.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통렬히 나 자신을 반성한다.
나만의 색깔
원장님의 조언에 귀가 번쩍 뜨인다. 기본기를 다지되, 남들이 하지 않는 영역을 탐색해 보라는 말이다. 처음엔 그 말이 다소 거창하게 들려 뜨악했다.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라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다른 장점을 그림과 엮어보라는 제안이었다.
글, 그림, 그리고 음악. 이 세 가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는 것이다. 글을 그림처럼, 그림을 글처럼, 그리고 음악을 입히는 일.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구현해 낼 것이냐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리고, 고민은 깊어지지만, 그만큼 새로운 열정이 솟는 것도 사실이다.
남보다 잘난 사람이 되기는 힘들다. 그러나 남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 '다름'은 억지로 만들어내는 특이함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나만의 색깔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남다름이 말처럼 쉬웠다면, 모두가 그렇게 했을 것이다. 운 좋게 다름을 타고난 사람은 행운이지만, 대부분은 깊은 고민과 끈질긴 정진의 결과물이다. 그건 오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이 1년이 될지, 5년이 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어김없이 태양은 있는 짜증 없는 심통을 한껏 부렸다. 그 더운 열기를 견딜 수 있는 것은,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한여름의 대화는 그 희망만큼이나 뜨거웠고, 그래서 즐거운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