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냐고 묻거든...

by Henry



왜 사냐고 묻거든

오래된 시 두 편을 소개한다.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년)의 「산중문답(山中問答)」과 김상용 시인(1902~1951)의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다. 해석은 각자 알아서 하면 될 것이다.


「산중문답(山中問答)」

問餘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閒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기에

그저 웃을 뿐

답하지 않아도 마음은 한가롭다.

복숭아꽃 물결 따라 아득히 흘러가고

인간 세상이 아닌 별천지라네.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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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이는 예의가 없다?

“왜 푸른 산속에 사느냐”고 묻기에 "대답 없이 그냥 웃었다"는 이백. “왜 사냐고?”라고 묻기에 "웃지요 "라고 한 김상용 시인. 묘하게도 닮은 대답이다. "왜 사느냐?"라는 진지한 질문 앞에서 "그저 웃는다"는 대답은 생을 달관한 자의 것이다.


누가 내게 그렇게 물으면 나는 뭐라고 답할까. 과연 시인들처럼 그냥 웃고 말았을까. 모르긴 해도, 이래저래 꽤 길게 설명했을 것이다. 어쩌면 침을 튀겨가며 상대를 납득시켜 애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대답은 간결하고 깔끔하다. 군더더기 없이 한 칼로 매끈하게 자른 느낌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진짜 나는 왜 사는 걸까. 살아 있으니 그냥 살아가는 걸까. 평소엔 이런 생각, 해본 적 없으니 이렇게밖에 답할 수 없다.


그래 진짜 궁금하다. 나는 왜... 살고 있는 걸까?


그런 면에서 시인들이 부럽다. 그들의 답은 간결하다. 직설적이지 않고, 길게 늘이지도 않는다. 에둘러 말하고, 비유와 상상을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함축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압축적이라고 해야 할까. 천 마디를 한 마디에 담았으니, 상상의 나래는 결국, 독자의 것이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 '그저 웃고 만다'는 그런 은유적인 대답은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직설적이고 직선적인 소통이 요구되는 분위기 속에서, 그저 '씩 웃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분명한 메시지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그 웃음이 회피나 무시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반대로 다른 누군가에겐 뜻밖의 긍정의 신호로 잘못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더 짧게, 더 빠르게

SNS, 유튜브 영화 리뷰, 건너뛰기, 숏츠, 릴스. 현대인의 메시지는 직선적이고, 무엇보다 짧다. 에둘러 가는 법이 없다. 이제는 누가 더 짧게, 더 빨리, 더 자극적으로 올리느냐의 경쟁이다. 영화 한 편조차 끝까지 보지 않는다. 두 시간짜리 영화는 20분짜리 요약 영상 하나로 ‘때운다’. 요약본만 훑고, 결론만 알면 그만이다. 그 어디에도 비유나 상상이 끼어들 틈은 없다.


젊은 세대의 새로운 소통 방식을 탓하자는 건 아니다. 그저 시대적 흐름이 그렇다는 말이다. 오죽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성질이 급하고, 예의가 없다'라는 말이 이집트 벽화에 새겨져 있었다는 얘기까지 돌겠는가. 생각해 보면, 그런 푸념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사라진 적이 없다.


실제로 이집트 벽화에는 그런 말이 적혀 있지 않다. 시대를 불문하고, 젊은이는 기존 질서에 잘 순응하지 않는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뿐이다.


옛날이야기를 꺼내봤자, 지금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기는 힘들다. 왜냐면, 살아온 환경 자체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그건 변화를 싫어하는 꼰대들의 푸념으로 들릴 수 있다.


라떼를 들이켜 봤자

지금은 거대한 세대교체가 일어나는 시기이다. 과도기라고 할까, 한자 세대와 한글세대, 부모와 자식을 모두 부양했던 세대와 자식만 부양하는 세대, 장편 소설과 극장 영화를 즐기던 세대와 유튜브 요약본과 OTT로 문화를 즐기는 세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세대를 가르고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술이 우리의 환경과 삶의 방식을 그렇게 바꿔놓았다는 말이다.


라떼를 들이켜 본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당랑당거철(螳螂當車轍)이란 말이 있다. 작은 사마귀가 자기 몸의 수백, 수천 배나 되는 수레바퀴를 막겠다고 떡하니 앞을 가로막는다. 어떻게 될까. 역사의 수레바퀴는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굴러갈 뿐이다. 멈추지도, 돌아보지도 않는다.


인류는 혹독한 자연환경에 적응한 끝에 호모사피엔스로 살아남았다. 뛰어난 두뇌를 가진 호모 사피엔스는 기술의 진보를 무기로 더 이상 자연에 적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을 자신의 입맛대로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인간이 자연에 맞춰 적응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 맞춰 적응되고 있는 셈이다.


인내심은 짧아지고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생각은 짧아지고, 인내는 사라진다. 2주 걸리던 손 편지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고, 이제는 이메일조차 느리다. 그 자리를 실시간 메시지와 자동완성 문장이 채웠다. 게다가 AI가 등장해 우리의 사고마저 대신한다. 분석하고, 정리하고, 추론하고, 유추하는 일은 모두 생성형 AI의 몫. 우리는 단지 명령만 내릴 뿐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현존하는 최고 성능의 컴퓨터보다 1억 배 이상 빠르다는 양자컴퓨터가 기다리고 있다. AI와 양자컴퓨터, 이 두 기술이 결합하면 세상은 어디로 갈까. 인간이 자연에 적응하던 시대는 끝났다. 하지만, 이제는 AI와 양자컴퓨터에 길드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얼마나 더 나태해질까, 우리 생각은, 또 얼마나 더 짧아질까.


그럼 어떻게 하라고? 답을 구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렇다는 말이다.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반복해 왔다.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사상을 낳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IT를 넘어 AI와 양자컴퓨터가 어떤 세상을 만들지 수많은 말들이 오간다. 거역할 수 없다고 해서 그저 순응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평범한 내가 뭘 할 수 있겠느냐만.


가끔 주위에서 묻는다. 손주 볼 나이에 무슨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냐고. 또 웬 글을 그렇게 자주 쓰냐고. 곧 눈도 침침해질 텐데, 무슨 책까지 보냐고. 이제 좀 놀고, 쉴 때도 되지 않았냐고 채근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뭘 하고 놀지?” 속으로 말한다.


뭘 그리 하느냐고?

하긴 내가 하는 일이 많긴 하다. 거의 매일 글쓰기, 격주 수요일 독서 동아리 <오후의 글방> 참석, 매주 화요일 <더스케치화실>에서 그림 그리기, 일주일 3~4일 <쉬운 기타>에서 기타 연습, 주 3회 피트니스센터, 주 2회 야외 달리기. 격주로 대구신문 <AI야, 나랑 놀자!!> 기획특집 원고 보내기.


혹시 빠진 게 없나? 아, 사회복지사 자격 취득 마무리와 작년에 합격해 놓은 행정사 2차 준비가 남아 있다. 그건 취미가 아니라 '일'에 더 가깝다. 지금은 방학이라 다행히 수업이 없다. 학기 중에는 이렇게까지 하긴 어렵다. 그땐 횟수가 줄어들 뿐, 그래도 꾸준히 한다.


이런 나를 곁에서 지켜본 후배가 묻는다.

"형님은 뭔가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한가요?"


안타깝지만, 딱 부러지게 내놓을 답은 없다. 나도 그저 웃는다. 자격시험 준비야 일이지만, 나머지는 취미 생활에 가깝다. 그렇다고 후배의 말을 전혀 무시할 수도 없다. 어쩌면 어릴 적 결핍과 상실에 대한 보상심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이백과 김상용 시인의 시가 유난히 입에 착 붙는다. 따지고 보면 나도 디지털에 익숙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날로그에서 더 진한 사람 냄새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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