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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Feb 12. 2023

40초 만에 무하 스타일로 그린 '신라의 여왕'

신라의 여왕을 무하 스타일로 40초 만에 그린 AI

개인적으로 인터넷 검색을 많이 한다. 글을 쓸 때 필요한 자료를 조사하거나 인용문의 출처를 밝힐 때 구글링한다. 국내 자료가 필요할 때는 네이버 검색기가 편리해서 자주 이용한다. 인터넷이 주는 혜택을 최대한 누린다. 그런 점에서 네트워크 기술과 IT 기술의 순기능을 높이 평가한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아날로그 기술의 매력도 잊지 않는다. 매일 활자 신문을 보고 활자 책을 자주 읽는다. 물론 전자책이 주는 편리함도 인정하지만 아무래도 손때 묻는 종이의 감촉을 느끼는 데는 활자 책만 한 것도 없다. 책장에 꽂힌 책을 보면 흐뭇하고, 색색의 표지가 주는 시각적 매력도 무시할 수 없다. 손 닿을 곳에 있는 그들이기에 수시로 꺼내본다. 


매일 활자 신문을 보는 까닭은 뉴스의 속보성 때문은 아니다. 문학이나 예술 분야의 글을 쓴 전문가의 식견 때문이다. 자기 분야의 글을 쓰기 위해서 필자가 기울인 정성을 느낄 수 있다. 독자는 그냥 썩 흩고 지나친다 해도, 글을 쓰는 사람은 많은 시간을 번민했을 것이다. 전문가가 들인 공을 생각하면 한 달 내는 구독료가 참 싸게 느껴진다.    

  

오늘 오후, 매주 토요일 발간되는 중앙SUNDAY를 펼쳤다. 표지에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이 눈길을 확 끈다. 기사 제목은 ‘신라의 여왕 40초 만에 그렸다’이다. 그리고 옆에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의 그림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이 그림을 그렸다고? ‘AI 예술, 인간의 감성까지 학습해 모방’이라는 소제목까지 읽으니 이해가 된다.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니라 AI가 그렸다. 인공지능의 나날이 진화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사다.  

         

이거 참 점점 더할 말이 없어진다. 며칠째 수채화를 갖고 낑낑거리는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하긴 고성능 컴퓨터 칩과 인공지능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AI를 대적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다. 미국의 오픈에이아이(openai)가 선보인 챗GPT(ChatGPT)이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이제 AI 예술가가 세상을 뒤흔든다. 한 마디로 인공지능의 공습이라 할 만하다. 기술의 발전은 늘 수확체증이라 그 속도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챗GPT 이야기는 며칠 전에 간단히 글로 올렸다. 오늘은 40초 만에 선덕여왕을 그린 인공지능 이야기를 해보자. 기사 내용을 먼저 읽어보자. 선덕여왕 그림 밑에 달린 설명문을 보면 충분할 것 같다. 그림 아래 실린 기자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사진 출처 : 중앙SUNDAY(2023년 2월 11일~12일 제826호)



‘텍스트를 입력하면 그에 따른 이미지를 생성해 주는 인공지능 시스템 미드저니(Midjourney)로 40초 만에 그린 선덕여왕. “선덕여왕, 한국의 고대왕국 신라의 여왕, 붉은 한복 의상과 신라 금관 착용, 아르누보 화가 알폰스 무하 스타일로”라는 문구를 영어로 입력하고 이 결과물을 얻었다. 100년 전 체코 화가 무하(1860~1939)의 스타일을 지정한 이유는 수많은 한국 현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고품질 웹소설 일러스트레이션 같은 분위기를 얻기 위해서였으며, 그 의도는 충족되었다. 다만 AI가 신라 금관을 학습한 적이 없기 때문인지, 여왕의 관이 신라 금관 형태가 아닌 결과물이 나왔다. 신라 금관 사진을 업로드하고 다시 생성을 지시해도 반영되지 않았다.’          


여기서 체코 출신의 화가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 1860~1939)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체코 출신으로 1887년에 프랑스 파리로 가서 미술 공부를 하면서 잡지와 광고 삽화를 그렸다. 1894년 프랑스의 연극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1844~1923)를 알리기 위한 석판 포스터를 그렸다. 이 포스터는 당시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스타의 아름다운 포스터로 사람들의 큰 호평을 받았다.


<사라 베르나르(1896)> 알픈스 무하, 석판화 포스터


무하의 그림 스타일은 새로운 화풍을 창조했고, 아르누보(art nouveau, New Art)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널리 알려졌다. 젊고 건강한 아름다운 여성이 네오클래식 양식의 옷을 입고 꽃으로 장식한 그림이다. 무하의 아르누보 스타일은 많은 사람이 흉내 내었다. 19세기 아카데미 예술의 반작용으로 탄생한 화풍이 아르 누보다. 여기서는 꽃이나 식물 덩굴에서 따온 장식적인 곡선을 작품에 많이 사용하고 있다.      


“선덕여왕, 한국의 고대 왕국 신라의 여왕, 붉은 한복 의상과 신라 금관 착용, 아르누보 화가 알폰스 무하 스타일로”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한 게 다였다. 그러자 그 짧은 시간에 머리에 화려한 꽃장식을 하고, 신라의 전통 의상을 현대적으로 화려하게 재해석한 옷을 입은 여왕이 탄생했다. 바로 알폰스 무하 스타일의 그림으로 말이다. 다만 AI가 아직 신라의 왕관에 대한 전혀 공부하지 않은 탓으로 신라 왕관이 빠지긴 했다.      


AI가 공부하지 않은 왕관을 빼먹은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다. 몇 개의 키워드만 가지고 약 2,000년 전 신라 여왕의 모습을 재현한 AI의 그림 실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처럼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야 뭐 당연히 놀라 자빠질 노릇이다. 몇 날이고 밤을 새워도 제대로 된 그림 하나 못 건지는 내 처지로서야 그냥 AI에 다 맡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건 내 그림이 아니라 AI의 작품이니 아무 의미도 없다.      


그래서 아날로그 감성이 중요하다.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뀐다. AI 챗봇이 어떤 질문에도 순식간에 척척 답을 해주지 않나, 수십 초 만에 그림을 뚝딱 완성하지 않나, 생각하면 눈이 핑핑 돌 지경이다. 귀 막고 눈 감고 있으면 그만이지만, 뻔히 보이는 걸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AI는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다.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기술혁신의 도도한 물결이다.      


여기서 갑자기 컴퓨터의 초당 정보 처리 속도가 궁금해졌다. 구글링하려다가 오픈아이의 챗GPT에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답했다.      


‘컴퓨터의 초당 정보 처리 속도는 매우 다양한 요소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의 프로세서 속도, 메모리 크기, 운영 체제 및 소프트웨어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의 고성능 컴퓨터는 수천 개의 연산을 초당 수행할 수 있습니다. 또한, 특정 애플리케이션에 따라 처리 속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디지털 영상 처리에는 많은 연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애플리케이션에 비해 높은 처리 속도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 처리 속도는 매우 빠르게 진화하고 있으며,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서 더 높은 속도를 가지는 컴퓨터가 제조되고 있습니다.‘     


이상이 챗 GPT의 답변이다. 이번에는 한글로 질문했더니 한글로 답했다. 질문의 조건을 더 구체화해야 구체적인 답이 나올 모양이다. 질문을 워낙 두루뭉수리로  했으니 답이 덜 구체적이다. 어쨌든 초당 수천 개의 연산을 한다니 빠르다는 답을 얻었다. 컴퓨터의 기술이 진화하면 속도가 더 빨라질 거라는 말도 덧붙인다. 이만하면 AI 챗봇 실력이 꽤 좋다고 칭찬할 만하다.      


이런 친구들하고 어떻게 경쟁하면 될까? 속도와 분량을 따라잡을 길 없다. 초당 수억 비트의 속도로 연산하는 기계의 속도를 인간이 따라잡기는 불가능하다. 작품성과 예술성도 빠르게 예술가를 따라온다. 그렇다면 이들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진다.


AI가 약한 부분이 무엇일까? 바로 감성이다. 여전히 컴퓨터가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 우리 마음이다. 우리 마음이 뇌의 시냅스와 신경 연결망이 창조하는 것이라 해도 AI가 여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학습의 영역에 들어간다고 해도 변화무쌍한 마음의 변화와 상호작용을 AI가 흉내 내기는 당분간 쉽지 않다. 사랑하고 배려하고 격려하는 아날로그적 감상이 인간의 강점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굳건히 버텨낼 아날로그 감성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굳이 내가 활자 신문을 손에 놓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면 지나친 감정의 비약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소박한 시도를 통해 디지털 기술에 소심하게 저항하고 있다. 매일 활자 신문을 읽고, 글의 출처를 밝히기 위해 인쇄된 책을 읽어본다. 비록 아무 대답 없는 미세한 메아리에 불과하지만, 아날로그 감성을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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