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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gane Feb 14. 2023

달리기로 본 세상 읽기

권고사직


권고사직을 당했다. 작년 말 이야기다.

실업급여가 끊겼다. 올 초 일이다.

입학이 있으면 졸업이 있고

입사가 있으면 퇴사가 있고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퇴직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퇴출이다. 적폐도 아니고…

화가 난다. 슬프다.

마치 풀코스를 열심히 뛰고 있는데 제한시간 때문에 회송 버스에 강제로 태워진 느낌.


내가 잘 나가던 대기업 대리 시절인 1990년대 말에 IMF가 터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리 해고되어 회사에서 나와야 했다.

순식간에 직장을 잃은 많은 사람들은 차마 집에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출근하듯 집을 나섰다.

하릴없이 할일없이 양복에 구두를 신은 말쑥한 차림으로 근처 산에 올랐다.

나도 하릴없이 할일없이 길을 나섰다. 

다른 점이라면 구두가 아닌 운동화를 신었다고나 할까.


할일이 없어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10K를 달린다.

10K에 달하는 성내천길을 달리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회사에서 짤렸을까? “

“ 애가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데 뭐해 먹고살아야 하나? ”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달리는 내내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확산된다.


누구나 인생의 주인공이고 싶어 한다.

누구나 플랫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플랫폼이 되고자 한다.

달리기의 무수히 많은 좋은 점들 중 하나는 마음 풀어짐이다.

매일 아침마다 10K에 달하는 거리를 달리기 시작하니  육체적 힘듬이 쌓이는 만큼 서서히 감정의 응어리가 풀어진다.

누구나 삶의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다.

마라톤은 1등으로 들어온 선수뿐 아니라 경기를 완주한 모든 사람에게 갈채를 보내는 희한한 경기다.

1등이 아니어도 한걸음 한걸음 묵묵히 걸음을 내딛으면 많은 사람들의 응원 속에 결국 골인할 수 있다.


달리기는 분명 몸에 좋은 운동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달리기는 마음에 보약 같은 운동이다.

그래서 이젠 권고사직당한 것이 다시 제2의 인생을 살라는 기회처럼 느껴진다.

그래, 다시 뛰자. 제2의 인생을 위해....



마라톤 예찬


사람을 나누는 기준은 다양하다.

남과 여, 성인과 소인, 심지어 꽤 유명한 과학자인 김상욱 교수는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양자 공부를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이다.

나도 사람을 나누는 나름의 기준이 있다.

바로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사람과 안 한 사람으로.

혹자는 그러면 골프를 치는 사람과 안 치는 사람, 한라산을 오른 사람과 안 오른 사람으로 나누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고 한다.

내 기준에 마라톤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가장 단순한 운동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가장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마라톤은 걷기보다 육체적이며 등산보다 명상적이다.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첫사랑과 달콤한 입맞춤을 했을 때 이 세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희열을 느꼈다.

그녀와 헤어졌을 땐 이 세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고통을 느꼈다.

내가 마라톤 풀코스를 처음 완주했을 때도 이 세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고통과 더불어 희열을 느꼈다.

내가 첫 아이를 얻었을 땐 이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내가 첫 마라톤 완주 테이프를 끊었을 때도 이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내가 어머님을 잃었을 때 세상은 무너졌다.

내가 풀코스 마라톤 중에서 걸었을 때 또한 세상은 무너졌다.


마라톤은 인생이고 인생은 마라톤이다.



폼생폼사


모든 운동은 폼이 생명이다.

골프도, 테니스도, 축구, 야구도 폼이 중요하다.

이는 내가 좋아하는 마라톤에서도 마찬가지다.

마라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다.

그러나 모든 운동과 마찬가지로 폼이 매우 중요한 운동 중 하나이다.


우선 마라톤에서 바람직한 폼은 다음과 같다.

    1. 허리를 높게 유지하여 달린다.

    2. 엉덩이의 커다란 근육을 주로 사용한다.

    3. 무릎 궤도(軌道)를 일직선이 되게 한다.

(아래 사진은 퍼펙트 러닝에서 인용 )


폼은 다른 말로 태도다.

태도는 결국 자신을 드러낸다.

마라톤을 하며 다른 사람들의 달리는 폼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난다.

발을 질질 끄며 달리는 사람은 삶이 끈적끈적하게 질질 끌려가며 산다.

질질 끌며 달리기 때문에 케이던스가 좁아 결국 경기에서 좋은 기록을 남기지 못한다.

팔을 위아래로 크게 벌리며 위풍당당하게 달리지만 왠지 거만해 보이는 사람은 삶도 남 앞에서 뻐기고 싶은 태도로 거만하게 살아간다.

위세 좋게 거만하게 달리기 때문에 경기 초반에만 잘 달려 결국 경기에서 좋은 기록을 남기지 못한다.

좌우로 몸을 흔들며 지그재그로 달리는 사람도 있다.

이런 달림이들은 삶에서도 이것저것 기웃기웃하면서 산다.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직선으로 달리는 것에 비해 마라톤 거리로 보면 엄청난 손해를 보며 달리는 것이 되어 결국 경기에서 좋은 기록을 남기지 못한다.

결국 마라톤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바른 자세와 바른 태도가 필수적이다.


그럼 마라톤에서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일까?

불교에서는 팔정도라는 말이 있다.

불교 수행에서의 8가지 올바른 길이며 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견(正見)

팔정도의 첫째 덕목으로 이는 올바른 견해를 의미한다. 즉 자기와 세계를 보는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어떤 사업을 하는 경우의 전체적인 계획이나 전망이 정견에 해당된다.


둘째 정사유(正思惟)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현실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기의 처지를 언제나 바르게 생각하고 의지를 바르게 갖아 이치에 맞게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 정어(正語)

올바른 말을 뜻하며 정사유 뒤에 생기는 바른 언어적 행위이다. 망어(妄語:거짓말)·악구(惡口:나쁜말)·양설(兩說:이간질 하는 말)·기어(綺語:속이는 말)를 하지 않고, 진실하고 남을 사랑하며 융화시키는 유익한 말을 하는 일이다.


넷째 정업(正業)

올바른 행동을 말하며 정사유 뒤에 생기는 바른 신체적 행위이다. 살생을 하지 않고 방생하며, 도둑질하지 않고 보시하며, 음란한 생활을 하지 말고 청정하게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 정명(正命)

바른 생활이다. 이것은 바른 직업에 의하여 바르게 생활하는 것이지만 일상생활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수면·식사·업무·운동·휴식 등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건강이 증진되고 일의 능률도 향상되며, 경제생활과 가정생활이 건전하게 수행되는 것이다.


여섯째 정정진(正精進)

올바른 노력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진은 이상을 향하여 노력하는 것이며, 그것은 종교·윤리·정치·경제·육체 건강상의 모든 면에서 이상으로서의 선(善)을 낳고 증대시키되, 이에 어긋나는 악을 줄이고 제거하도록 노력하는 것을 가리킨다.


일곱째 정념(正念)

바른 생각을 말한다. 의식을 가지고 이상과 목적을 언제나 잊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맑은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되 무상(無常: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고 변화함)·고(苦:모든 것은 불완전하여 괴로움)·무아(無我:나라는 실체가 없음) 등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잊지 않는 일이다. 이는 정사유와 함께 내면적인 마음을 확실하게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여덟째 정정(正定)

바르게 집중한다는 뜻으로 선정(禪定)을 가리킨다. 깊은 선정은 일반인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도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바른 지혜를 얻거나 지혜를 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해 필요하다.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이 흐림이 없는 마음과 무념무상과 같은 마음의 상태는 정정이 진전된 것이다.


따라서 마라톤의 바른 태도란 다음과 같다.

마라톤이 몸과 마음을 가장 건강하게 하는 운동이라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정견)

현재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바르게 알아 풀코스 목표를 합리적으로 세우고 (정사유)

동호회 사람들에게 진실되고 바른 말로 화합을 이끌어 (정어)

마라톤 훈련에 정기적으로 참가하여 바른 폼으로 운동을 열심히 하고 (정업)

마라톤과 더불어 일상생활과 직장생활을 바르고 균형 있게 하고 (정명)

수행자의 자세로 올바른 노력을 기울여 훈련하여 (정념)

대회에 나가 바르게 집중하여 몸과 마음을 모아 목표했던 시간대로 완주의 빛나는 경지를 달성하는 것 (정정) 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이 정견(正見)인 바른 견해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보는 견해, 즉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상, 내 것이랄 게 없다는 무아, 생로병사인 고로 보는 견해가 있어야 그런 인식을 토대로 나머지 수행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처럼

세상에 수많은 운동이 있지만 자신의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운동은 마라톤이 유일하다는 바른 견해가 첫 번째로 필요하다.

마라톤은 폼생폼사, 결국 바른 폼과 바른 태도가 중요하다. 불교신자의 팔정도처럼…





111


一切皆苦(일체개고)


제주 트레일 런은 이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대회였다.


집과 회사에 눈치가 보여 가능한 짧은 시간 동안만 대회에 참가하려고 타이트하게 비행기표를 예약하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일이 꼬였다.

대회 전날인 2018년 10월 19일 오후 6시에 제주대에서 오리엔테이션 있어 오후 4시에 출발하는 제주행 비행기를 예약하였다.

그런데 저가항공사라 그런지 출발시간이 30분 지연되어 5시 30분이 돼서야 제주도에 도착했다. 부랴부랴 버스를 타고 제주대로 향했지만 제주대 입구 버스정류장에 내린 시간이 6시 반에 훌쩍 넘어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오리엔테이션 장소인 제주대 운동장까지 가는 시간도 꽤 걸려 7시 반이 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당연히 오리엔테이션은 끝나 있었고 서둘러 장비 검사와 선수 등록을 마쳤다.


오리엔테이션을 받지 못해 찜찜했지만 프린트해 온 코스도를 보며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에 계신 작은 형님과 늦은 저녁을 먹고 형님댁에서 하루 신세를 졌다.

자기 전 배낭에 필수 장비를 넣으며 무사 완주를 기원하였다.

예상 완주시간을 20시간 전후로 계산하여 시간당 하나씩 먹을 요량으로 준비한 에너지 젤 20개, 헤드랜턴, 휴대폰, 호루라기, 서발이벌 블랭킷 등등..

저녁 겸 해서 먹은 반주 한잔, 늦은 시각까지 켜져 있는 거실 TV, 내일 대회의 설렘과 두려움 등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2~3시간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4시경 기상하여 출발지인 제주대 운동장에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벌써 세계 각국에서 온 달림이들이 머리에 핸드 랜턴을 켜고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6시 정각 출발시각에 맞추어 어둠을 뚫고 111K의 대장정의 막이 올랐다.



CP1 관음사 코스까지 약 10K를 1시간 10분에 뛰었다.

이젠 한라산을 오를 차례다. 삼각봉 대피소까지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다.

일본에서 온 참가자와 서로 가져온 캔디를 교환하고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삼각봉을 배경으로 사진도 한컷 찍었다.

 그 후 급경사의 길을 겨우 겨우 힘을 내 한라산 백록담 정상에 도착하였다.

고사목과 운해.. 모든 것이 내 발아래 있었다.

후딱 백록담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고 하산을 시작했다.

CP2 성판악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20분. 누적거리 27K.

여기서 라면과 바나나 등으로 이른 점심을 해결했다.

힘든 산행 후 먹는 컵라면 국물은 그야말로 꿀맛.


CP3 한남리 머체왓 숲길까지 비교적 평탄한 숲길을 여유롭게 달린다.

누적 거리 42K, 오후 1시 반이 다 되어 머체왓 숲길에 도착.


메밀꽃이 눈부시다.

이를 배경으로 예비 신랑 신부가 사진을 찍으며 행복한 시간을 만끽한다.

이를 배경으로 세계 각국의 달림이들이 저마다의 경주를 이어가며 고통을 자처한다.

귤과 음료, 과자를 허겁지겁 먹고 안 되는 영어로 외국 친구와 잠깐의 농담을 한 후 CP3를 출발한다.


CP4 수악교 도착 시간 오후 4시 16분, 누적거리 54K

점점 힘들다.

이젠 거의 뛰지 않고 걷는다.

오른쪽 발목이 뛸 때마다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CP5 돈내코 도착 시간 오후 5시 57분, 누적거리 61K

점점점 더더욱 힘들다.

이젠 계속 걷는다.

오른쪽 발목 통증뿐만 아니라 걸을 때마다 사타구니가  옷에 쓸려 따갑다.

풀코스를 뛸 때 한 번도 발생하지 않은 일이 50K를 넘어가면서부터 발생한다.

CP6로 가는 한라산 둘레길 산길에서 처음으로 길을 잃었다.

분명히 이정 표시를 보고 갔는데 갑자기 이정표가 사라졌다.

밤이라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잘되지 않는다.

갑자기 길을 찾지 못하고 이곳에 낙오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겨우 겨우 길을 잃은 지점으로 돌아왔지만 헤맨 시간과 정신적 데미지가 꽤 크다.

CP6 법정사 도착시간 저녁 9시 9분, 누적거리 74K

CP6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따뜻한 죽을 2그릇이나 먹었더니 그동안의 추위와 배고픔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CP7 돌오름까지는 꽤 오르막이다.

한라산 밤공기는 차가웠고

내 다리는 점점 더 무거웠고

하늘의 별들은 무수히 반짝였다.


바위로 된 길을 가고 있는데 빛들이 움직인다.

처음엔 주최 측에서 표시해 놓은 이정표 등인 줄 알았는데 이내 빛의 정체를 알았다.

반딧불이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날아오르는 반딧불이의 영롱한 불빛은 황홀경 자체다.

이 세상이 아닌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CP7 가는 길에 2번이나 길을 헤매었다.

그나마 한 번은 주위에 여러 사람이 있어 금방 길을 찾을 수 있었다.

CP7 돌오름 도착시간은 하루가 지난 10월 21일 00시 17분, 누적거리 84K


CP8 가는 길은 지도상 내리막길이고 11K 정도지만 매우 힘들고 지겨웠다.

오른쪽 발목은 점점 부어 올라 걸을 때마다 통증이 느껴져서 이쯤 해서 대회를 포기해야 하는가 하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나만의 만트라를 외운다.

“ 별거 아냐”   

“ x팔, 별거 아냐”  

 “ x팔, 나는 할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욕이 자동으로 나온다.


어찌어찌 CP8까지 도착한 시간은  3시 13분, 누적거리 94K


이미 완주 예상시간 새벽 2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다.

이런 페이스대로 라면 아침 7시로 예약해 놓은 비행기도 놓칠 시간대다.


비행기 시간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CP9 관음사까지 코스는 그나마 길이 괜찮았다.

밤공기를 마시며 천천히나마 뛰어본다.

오른 다리 통증도 어느 정도 견딜만하다.

CP9 관음사 도착시간 4시 59분, 누적거리 103K


CP9에서 바나나로 허기를 채우고 마지막 결승점을 향해 거의 쉬지 않고 출발.

1시간 내로 제주대에 도착해야만 비행기를 놓치지 않는다.

그런데 거의 마지막 코스에서 길을 잃었다.

외국인 부부를 포함한 4~5명이 길을 찾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사이 날이 밝아왔다.

시간은 어느덧 6시를 넘어가고 결국 비행기를 놓칠 시간대다.

휴대폰으로 예약한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다.

비행기를 놓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일요일이라 비행기가 모두 만석이고 공항에 와서 대기자로 대기하여 비행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길을 잃어 본 코스보다 돌아 돌아서 결국 제주대 운동장 골인지점에 당도했다.

골인지점 도착시간 6시 52분, 누적거리 111K


꼬박 24시간을 잠도 자지 않고  달려 111K를 완주하였다.

완주의 기쁨을 누릴 여유도 없이 짐을 찾아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7시 20분쯤 공항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비행기는 떠나고 어쩔 수 없이 대기자로 등록하여 비행기표가 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내 앞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어 결국 오후 4시 비행기를 타고 제주를 떠날 수 있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 또한 달리는 시간만큼 힘들고 지겨운 시간이었다.


비행기 좌석에 몸을 뉘이며 다짐한다.

“ 다시는 이런 미친 짓 하지 말자 “


사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건 모든 것이 변한다는 단 한 가지 사실이라는 말처럼,

난 비행기 안에서 다짐했던 말을 까먹고 또다시 더 먼 거리를 달리는 꿈을 꾸고 있다.

다음에는 사막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250K를 달리는 꿈을...




Runner가 아닌 Walker라니..


나는 러너다.   

난 이 말이 참 좋다.


나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간지(?) 나는 말이기도 하고 또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해서. (물론 이렇게 나를 불러주는 이는 한 명도 없었지만)


또한 이 말은 자기 자랑이 50%쯤은 되는 아래의 마라톤 책 제목이기도 하다.



2018년 3월 18일 동마 아침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았으나 흐렸다.

7시 좀 넘어 도착한 광화문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옷 갈아 입고 짐 맡기고 화장실 다녀오니 벌써 출발시간.

죄송하게도 제이디님 등 오픈 케어분들과 C그룹에서 345로 뛰기로 한 약속을 못 지키고 B그룹에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앞쪽에 3:50 페메분들이 보여 이들을 따라가다 하프 지나 조금씩 속도를 내면 345를 달성할 것 같았다.

반대로 하프 지나 페이스가 떨어지면 최소 서브 4는 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광화문을 출발하여 덕수궁을 지나 청계천, 신설동까지 3:50 페메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렸다.

그러다 30k 지점에서부터 다리가 무거워지며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져 3:50 페메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31k 지점부터 생애 처음으로 마라톤 경기에서 걷기 시작했다. 1k 정도 걷다 보니 어느 정도 다리에 힘이 생겨 다시 뛰기 시작했지만 페이스는 처진 상태.


잠실대교에 진입할 때는 4:00 페메까지 나를 앞질러 간다.

결국 39k 지점에서부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말을 안 듣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 잠실운동장을 내달린다. 몇몇 오픈 케어분들도 보이고..

차마 잠실운동장 트랙은 걸을 수 없어서 종합운동장 들어가기 바로 전부터 뛰어서 간신히 골인.

4:24:06


여태껏 마라톤 풀코스를 뛰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상쾌했는데

이번 동마는 몸은 편한데 마음은 우울한 대회였다.


내가 왜 걸었는지 반성해 본다.


첫째, 마라톤은 정직한 운동이다.

운빨이나 재수가 통하지 않는. 자신이 땀을 흘린 만큼 기록이 나오는 순박하고 단순하고 정직한 경기이다. 춥다고 시간 없다는 핑계로 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은 나를 반성한다.


둘째, 마라톤은 정신력이 중요한 운동이다.

345를 목표를 하였지만 4:00 페메도 놓치고 나서는 목표를 잃어서인지 몸이 힘들어서보다 그냥 뛰기가 싫어졌다. 35k 이후 지점부터는 운동량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달리겠다는 정신력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자신을 믿지 못한 나약한 정신력의 나를 반성한다.


셋째, 마라톤은 걸으면 안 되는 운동이다.

한번 걷기 시작하면 다시 뛰어도 얼마 못가 걸어가라는 악마의 속삭임을 이겨내기 힘들다. Runner가 아닌 Walker가 된 나를 반성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나도 진정한 러너가 되고 싶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 않는..




첫 경험


누구나 첫 경험의 기억은 선명하다.

나의 공식적인 첫 마라톤 대회 참가는 오세훈이 2006년도 서울 시장 시절에 개최한 마라톤대회였다.

청계천 일대를 도는 10k 대회에 1시간이 넘는 시간으로 힘들게 들어온 기억이 생생하다.

나의 첫 풀코스 참가는 2008년도에 조선일보에서 개최한 춘마였다.

몇 번의 10k 와 하프를 뛰고 나서 풀코스쯤은 이란 근자감(?)에 혼자 덜컥 참가신청을 하였다.  

당연히 LSD 훈련도 없었고 심지어 에너지 젤을 준비해야 된다는 기본 상식도 없이 출전하였다.

4시간 20분대로 거의 죽을힘을 다해 결승전을 통과한 기억이 선명하다.

완주 후 사우나를 가려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다리가 너무 아파 난간을 겨우 잡고 후들거리며 내려간 기억은 벌써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리고 2018년 4월 21일 난 처음으로 런엑스런이 주최하고 동두천시가 후원하는 코리아 50k 트레일 런 대회에 출전했다.  

집에서 8시쯤 출발하여 새로 뚫린 포천 고속도로를 타고 9시 좀 넘어 집합장소인 동두천 종합경기장에 도착했다.

편의점에서 사 온 삼각김밥과 우유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선수 등록을 하였다.

출발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콜럼비아에서 운영하는 테이핑을 난생처음 해 보았다.

11시에 출발장소인 오지개(?) 고개로 버스로 이동하였다.

다행히 미세먼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어 산속의 청량한 공기가 아닌 미세먼지만 마시는 레이스는 안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날씨가 예상외로 더워 꽤 힘이 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꽤 많은 외국인들이 보였다. 국적도 미국, 대만, 일본 등등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 같았다.

(배번 표에 국기가 새겨져 있어 대충 알 수 있었다.)

트레일런의 전설인 심재덕 선수도 27k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실물로 뵙게 되었다.

자그마한 키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심재덕 선수를 보고 있으니 저절로 고수란 느낌을 받았다.

심선수는 심지어 필수장비인 백팩도 없이 손에 생수 한 병을 들고 있었다.

(나중에 경기가 끝나고 알았지만 심재덕 선수가 2:28:30 기록으로 우승을 하였다)

점점 느끼는 거지만 고수는 강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부드럽다는 느낌이 든다는 거다.


심재덕 선수의 개회사가 있고 드디어 12시 정각에 출발하였다.

처음부터 가파른 언덕길이 이어지고 내리막길, 다시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산길, 숲길, 임도, 군부대, 계단길, 포장도로, 낙엽길, 진흙길을 뛰고 걷고 침 흘리고 물 마시며 겨우 겨우 움직였다.


오르막길의 아득함

내리막길의 짜릿함

숲 속 길의 청량한 바람

CP에서의 차가운 생수와 과일

흩날리는 꽃비

날 앞서가던 대만 여성 선수를 따라잡았던 쾌감

마지막 피니시라인에서 종을 울리며 응원해 주던 어린아이의 천진한 미소

힘든 레이스를 이들의 응원으로 감내하며 피니쉬 라인을 통과하였다.

4:06:08

목표했던 4시간 안에는 들어오지 못했지만 나름 뿌듯했다.

너무 차가운 물이 나오는 샤워장에서 간단히 샤워를 하고 주최 측이 제공하는 무제한 맥주와

안주를 먹고 대회를 마감하였다.

첫 키스의 달콤한 기억처럼 첫 트레일런의 경험도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123


123

내가 오늘 올라야 할 롯데월드 타워 123층은 안개인지 구름인지에 가려 잘 보이질 않는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운(?) 좋게도 롯데월드 타워 바로 맞은편이라 난 롯데월드몰이 건설되는 과정을 누구보다 실시간으로 알 수 있었다.

터파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골조를 세우고 공구리(?)를 치고 타워크레인을 설치하고 사람이 떨어져 죽고.. 한층 한층 쌓아 올려 결국 123층이 완성되는 과정을 회사 옥상에서 매일 보았다. 마치 롯데 월드 몰 작업반장처럼.


참가 접수를 하려 하니 나이가 40이 넘는 사람은 건강체크를 해야 한단다.

혈압을 재니 130이 넘게 나와 왼팔로 다시 재서 겨우 통과.

옷을 갈아입고 주위를 둘러본다.

우리나라 유통회사 최강자인 롯데답게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진다.

무료 커피 한잔하고 운 좋게도 2xu라는 운동 전문회사에서 선물 득템을 하고..

나이순, 더 정확히는 배번호순으로 출발을 한다.

10시 40분경 내 배번호대에서 10초 간격으로 출발을 한다.

분명히 수직 마라톤이라 뛰어올라야 하는데 뛰기에는 너무 힘들다.

최대한 빨리 걸어 오른다. 2계단식, 옆에 난간을 잡고

앞사람을 추월하기 위해서 바깥쪽으로 뛰어오른다. 체력소모가 심하다.

60층쯤부터 땀이 나기 시작한다.

얼굴의 땀이 안경에 떨어져서 안경을 벗고 땀을 닦으며 계속 나아간다.

오르다 보니 어느새 정상 123층.

전망대에서 본 잠실 일대는 예상대로 멋있었다. 석촌호수도, 한강을 가로질려 놓여 있는 잠실대교, 올림픽대교들도, 오픈케어 훈련장소인 잠실 보조경기장도..,

수많은 아파트들도… 멀리 가락몰이 보인다. 그 너머 내가 전세 살고 있는 가락동 아파트도 흐릿하게 보이고.

이렇게  많은 아파트들 중 내 집이 없다는 사실에 급 자괴감이 몰려온다.

세상 사람들이 남들보다  뛰어나고자 하는 욕망,  높이 오르고자 하는 욕망이 만들어낸 고층빌딩들.

그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 123층을 올랐다.

남들보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남들보다 빨리 달려야겠다는, 남들보다 앞서 나가겠다는 욕망.

그 욕망을 내려놓기 위해 123층을 올랐다.

과연 나는 그 욕망을 반이라도, 아니 10%라도 내려놓았는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2~3분 만에 내려온 월드타워몰의 명품들은 여전히 그 아름다음을 뽐내고 있었다.  



인듀어


인듀어를 읽었다.

503쪽에 달하는 인듀어를 읽는 데는 인듀어가 필요하다.

인간 한계에 대한 풍부한 사례와 실험 결과를 기술한 1,2부는 흥미로웠지만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기술한 3부는 좀 실망스러웠다.

예를 든 것 중에 흥미로운 사실 2가지를 소개하면

첫째로 울트라 마라토너 데런이란 인물이다. 구글링 해서 보니 60년생 할머니뻘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간질 발작이 있어 서른일곱에 측두엽에서 골프공 크기의 조직을 드러내는 뇌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했고 발작은 멈췄지만 방향감각 및 시간 감각 손상이라는 후유증을 남겼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후유증이 울트라 마라톤에는 꽤 큰 도움이 되었다.

Disoriented Express라는 별명처럼 그녀는 수백 마일을 달리면서도 종종 자신이 얼마나 오래 달렸는지 잊어버린다.

이런 사례를 통해 그녀의 특별한 지구력은 뇌와 연관이 있다고 이 글은 설명한다.

두 번째 사례는 세계적인 사이클 선수 옌스보이트 이야기이다.

통증을 잘 견디기로 유명한 그가 1시간 동안 사이클 신기록을 세우기 위해 의식의 한계까지 밀어붙였던 통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책에서는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게 너무 고통스러운 한계를 극복하고 그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성취를 이룬 세계 최고 선수들도 그 고통의 크기는 내가 풀코스 마지막 10K를 뛸 때의 고통과 그다지 차이가 지지 않아 보인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 안으로 소개한 마음챙김 기반 뇌 훈련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존 카밧진이 만든 8주짜리 마음챙김명상 (MBSR) 은 예전에 책과 CD로 학습을 해 보아서 어느 정도 신뢰가 가는 방법이다.


예전에 읽은  불교 관련 책에서 불교 명상을 오래 한 스님의 명상 시 뇌파와 마라톤에서 가끔 경험하는 러너스 하이 때 나오는 뇌파가 동일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즉 뇌의 섬피질을 단 련하기 위한 좋은 방편이 명상이라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走禪一味 (주선일미)

이는 불교 마라톤 동아리를 만들 때 어느 스님이 써준 휘호라고 한다.

달리는 것과 선은 같다 라는 의미.


또 하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은 믿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百尺竿頭進一步 (백척간두 진일보)

더 이상 한 발도 내딛지 못할 정도의 한계상황에서 자신이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한 발을 내딛는 용기와

자신에 대한 믿음


성경말씀의

처럼

훈련

명상

믿음

으로 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자.



하루키 따라 하기


권고사직을 당했다. 아니 아직까지 회사를 다니고 있으니 권고사직을 권고받았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행복해야 했다.

불현듯 소확행이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올랐고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이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실도 덩달아 떠올랐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를 따라 하면 그나마 이런 비참한 기분을 떨쳐낼 수 있을 거다.

그래서 하루키 따라 하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첫째, 글을 써보자.

개인적으로는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좋아하지만 그래서 하루키의 책들은 소설보다 에세이류를 더 많이 읽어서 에세이 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야구장에서 느닷없이 친 타구 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는 하루키처럼 회사에서 느닷없이 통보한 권고사직 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갑자기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글을 읽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의 차이는 내가 회사에서 일을 잘해 임원이 되는 것과 일을 못해  쫓겨나는 것의 차이만큼 크고 깊다.

하루키 소설은 다 읽고 나면 대개  결말이 허무하고 애매하다. 마치 더 할 말이 있지만 이쯤에서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결론을 내라는 느낌이다. ‘노르웨이의 숲’이 그랬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그랬고 최근작 ‘기사단장 죽이기’가 그랬다.

왜 하루키는 그런 열린 결말을 좋아할까?

또한 등장인물은 패션을 가지고 그 사람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묘사한다.

기사단장 죽이기에 나오는 맨시키의 캐릭터는 그가 입고 있는 새하얀 긴소매 면 셔츠와 카키색 치노 바지, 깔끔한 보트슈즈로 형상화되고 그와 썸을 타는 마리에의 고모 캐릭터는 그녀가 입고 있는 연파랑 원피스와 반짝이는 검은색 핸드백으로 입체화 된다.

왜 하루키는 그런 묘사를 즐겨할까?

반면에 그의 에세이는 깔끔하고 경쾌하다. 대중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하루키지만 그가 좋아하는 요소들, 예를 들어 고양이나 마라톤, 음악 이야기를 솔직하고 유쾌하게 묘사한다.

하루키처럼 매일 정해진 분량의 글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끝낸다는 성실함이 내겐 없다.

박완서 선생이나 곽재구 시인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선한 마음이 내겐 없다.

황현산 선생처럼 담백한 글솜씨도 김훈 선생처럼 서슬 퍼런 문체도 내겐 없다.

하루키의 글쓰기 따라 하기는 정말로 내겐 버겁다.


둘째, 마라톤을 하자.

‘저녁에 면도하기’라는 단편 에세이 모음집에서 하루키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달리기는 혼자 할 수 있고, 길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고, 적당한 운동화 한 켤레만 있으면 특별한 도구가 필요 없다. 특히 달리기는 여행할 때 좋은 것 같다. 낯선 외국의 도시에 가면 아침에 일어나 그 동네를 천천히 달려본다. 정말 기분이 좋다.”

위와 같은 생각은 ‘라오스에는 뭐가 있는데요_ 찰스 강변의 오솔길’이라는 여행기에서도 나온다. 하루키 마니아라면 아시겠지만 그는 매일 10k를 달리는 마라톤 애호가이며 풀코스를 완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가하고픈 대회인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6번이나 참가한 마라톤 고수이다. 이 글에서 그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의 매력을 하나만 꼽으라면 ‘누가 뭐라든 그곳에는 정경의 매력이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정경은 개념 설정(영어로 determination) 같은 것을 확고하게 품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나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determination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그 감정에는 동감한다. 그 누구의 도움 없이 결국 자기 자신의 두발로 한발 한발 내디뎌 완주할 때의 뿌듯함. 땀을 흘리며 완주 후 집에 돌아갈 때 결국 나도 다른 사람보다 아주 뛰어나지는 못하겠지만 그럭저럭 이 세상을 무난히 완주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셋째, 음악을 듣자.

재즈, 팝, 클래식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음악에 조예가 깊은 하루키에 비해 나는 록음악만 좋아한다. 하루키는 자신과 동갑 나기인 브루스 스프링스턴에 대해서 많은 글에서 애정을 표시해왔다. “브루스 스프링스턴이 이야기로 노래한 것은 그와 같은 미국 노동자 계급의 생활이며, 심장이며, 꿈이며, 절망인 것이다.”라고.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짐 모리슨에 대해서는 “도어스의 음악에는 사막 냄새가 난다.”라고 이야기한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주인공처럼 혹은 하루키처럼 나도 맥주 한잔을 마시며 턴테이블 위에 브루스 스프링스턴의‘The River’ 앨범을 듣고 싶다.


언제까지 난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조직생활을 할 것인가?

이 글이 공모에 성공한다면 하루키 1차 따라 하기는 성공하는 것이 되어 내가 직접 내 몸에 맞는 옷을 만드는 것이 된다.

하지만 하루키가 잘 쓰는 표현처럼 회사를 계속 다녀도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 것이고 회사를 그만두어도  나름 잘 버티는 삶을 살 것이다. 하루키의 아날로그적 삶을 계속 따라 하며..




108배가 아닌 109K, 24HR이 아닌 25HR


- 일시: 2023년 10월 21일 5시 ~ 22일 6시

- 장소: 서울 시청 광장

- 비용: 20만원

- 보상: ITRA point 5점, 노스페이스 자켓 (16만원 상당)


108배는 좋은 운동이며 훌룡한 수행법이다.

108K에서 1K가 많은 109K를 달리는 SEOUL 100K도 삶을 수행하기에는 마찬가지다.


올해 초 KOREA 50K는 대회 전날 아들 친구들이 집에 파자마 파티를 한다고 몰려와 밤새 떠드는 바람에 잠을 설쳐 엉망이었다.

그래서 이번 대회는 목요일부터 천천히 준비를 했다. 아들에겐 금요일 절대 파자마 파티 금물이라는 엄포와 함께.


입고 갈 복장부터 초반 레이스에 필요한 준비 물품, 50K지점에 놓아둘 드랍백에 들어갈 물품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혹시 몰라 준비물 목록을 공유한다. 노란색은 당일 아침 입고 가거나 휴대할 물품 목록들이다.

코스도 몇일 전부터 보고 또 봤다. 목표 시간은 24시간이내 이다.


새벽 5시에 출발이라 대회장까지 어떻게 가야하는지부터 고민이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카카오 택시를 불러 시청역으로 향한다.


새벽 4시에 도착한 시청광장에는 이미 많은 달림이들이 모여 있었다.

서약서를 제출하고 탈의실에 들러 옷을 갈아 입는다.


대회전 출발선에서의 설렘과 두려움과 흥분은 언제나 기본값이다.


출발이다.

인왕산을 거쳐 북악스카이웨이까지 12.9K를 달려 첫 U1 정릉분소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 이거 처음부터 힘들다.

이제 본격적으로 북한산을 3개나 넘는 고행길이 시작이다.


보국문을 거쳐 동암문까지 600m 넘는 봉우리를 오르는 두번째 CP 는 11.6K의 장미공원까지다.

후두둑 비가 내린다. 점점 심해진다. 뒤로 쓴 모자를 앞으로 가져온다.

그래도 내리는 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아직 셀카를 찍을 여유는 있다. ㅎㅎ


8.4K를 걷다 뛰다하여 U3 북한산성분소에 도착한 시간은 11시가 좀 넘었다.

뜨끈한 국밥이 기다리고 있다.


그 전에 한 번도 하지 않은 장비 검사가 있었다.비가 와서 안전차원에서란다. 긴팔, 긴바지가 있냐고 묻는다. 긴바지는 드락백에 넣어 두었다고 대충 애둘러 말하고 밥을 먹으며 한숨을 돌린다.


위문을 거쳐 북한산 백운대를 오른다.

예전에 많이 와 본 길인데 왜 이리 정상이 먼지 , 사람들도 왜 이리 많은지, 단풍은 왜 이리 고운지 모르겠다.

대서문 , 대동문을 지나 U4 우이동 만남의 광장에 도착한 시간은 예정보다 늦은 오후 2시 8분.


마지막 북한산을 넘으면 힘든 건 끝난다. 영봉을 지나 우이역을 거쳐 드랍백이 있는 U5 국립공원 산악박물관에 도착할때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U5에서 컵라면으로 이른 저녁을 먹고 옷을 갈아 입고 있는데 사람들이 호들갑이다.

멧돼지가 나타났다.

몇년 전 제주 트레일 100K에서는 한 밤중에 영롱하게 빛나는 반딧불이를 봤는데 서울 100K에서는 멧돼지를 보다니. ㅎㅎ.


내 눈 앞에서 어른 거리던 멧돼지가 없어지자 나도 길을 나섰다.



이제 반 왔다.

아니 이미 반이나 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헤드랜턴이 시원찮다. 머리에 쓴 헤드랜던은 이미 기능을 상실하고 혹시 몰라 여분으로 가져 온 헤드랜턴도 빛이 너무 희미해서 손에 들고 발 밑을 비추어야 겨우  조명 구실을 할 수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가야지 뭐.

가끔 동행하는 선수들의 헤드랜턴 불빛이 고맙다.


가뜩이나 밤눈이 어두운데 헤드랜턴도 맛이 가서 점점 알바를 하는 횟수가 늘어난다.

1K이상 길을 잃은 것만 2번, 짧게 길을 잃어 되돌아 온 것까지 합치면 10번이 넘는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라는 말은 트레일러닝에서도 정확히 적용된다.


지리한 밤길을 걷다가 뛰다가 졸다가 조그만 언덕들을 오르 내리다가 보니 U6 불암약수터까지 어찌어찌 도착했다.

불빛이 환해 다행이다 싶어 오른 불암산도 산속부터는 깜깜한 돌길이다. 겨우 겨우 정상을 찍고 내려와 철길이 길게 늘어진 철도 공원을 지나 나들이 공원 U7에 도착한 시간은 요일이 바뀐 일요일 새벽 1시.


DNF를 선언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심지어 의자에 앉아 코를 골며 자는 사람도 있고.

이제 마지막 CP인 아차산만 넘으면 된다.

그나마 자주 와 본 아차산은 조명이 어두워도 대충 갈만 하다.


U8 아차산 생태공원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3시 반.

뜨듯한 스프와 커피 한잔이 추위와 배고픔을 덜어준다.


이제 하프코스 길이의 로드만 뛰면 끝이다.

강변 고수부지를 새벽에 달리는 일은 예상과는 정반대로 전혀 상쾌하지 않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로드길.

청계천이 이렇게 길게 이어져 있는 줄 처음 알았다.

홀로 걷고 있는데 날은 이미 밝아온다.


터덜터덜 걷고 있는 나를 누군가 앞질러 뛰어간다.

이미 목표한 시간보다 2시간 가까이 늦었다.

25시간 안에는 들어와야 하지 않을까?


정신이 버쩍난다.

몸 안에 바람이 충전된다.

남은 골인지점까지 뛰자. 3k 도 안된다.

하나도 힘들지 않다.

몸에 바람이 인다.






100K를 뛰고 나니 가뜩이나 많은 주름이 더 늘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왜 잠도 안자고 이런 힘든 일을 하냐고?


누구나 버킷리스트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나의 버킷리스트는 UTMB 참가다.

이런 힘든 일을 하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UTMB대회 출전을 위한 포인트 획득 때문이다.


그럼 내면적 이유도 있을까?

나 자신에 대한 내면 정화, 또는 수행법 중 하나라고 말해도 말이 되려나...



UTNP80K를 완주 했는데 실격이라니


일시: 2024년 10월 26일 ~27일

장소: 울주 영남알프스 복합센터

대회 : UTNP80K

비용: 23만 (참가비 얼리버드 17만+ 교통비 10만 + 숙박 5만)



UTNP80K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산이 많았다. 간월재, 천황산, 영축산, 신불재, 신불산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아래 산 세개를 넘는 동안 갈까 말까를 하루에도 수십번 고민했다.


첫째 산인 산더미 같은 회사일에 눈치보며 금요일에 휴가를 쓰고


둘째 산인 집안 싸움을 나 몰라라 하고 겨우 숙소와 교통편을 잡았다.


그런데 목요일 저녁에 전혀 예상치 못한 세번째 산이 나타났다. 숙소 예약했던 여기어때에서 모텔이 예약이 되지 않았다고 환불 해 주겠다고 연락이 왔다.죄송하다며 5만원 쿠폰도 챙겨주겠단다.

갈까 말까 고민 중에 이런 연락이 오니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쉬운 마음에 사정 이야기를 해서 겨우 숙소를 다시 잡을 수 있었다.


금요일 저녁에 난생 처음 울산역에 도착했다. 할일이 없어 분위기 좀 볼겸 선수 등록도 할 겸 대회 장소인 영남알프스 복합센터에 셔틀버스를 타고 가보았다.


셔틀버스는 20~30분마다 운행된다는 공지글과는 다르게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되었다.



분위기 좋다.


대회장을 둘러보고 선수 등록을 하러 등록본부로 향했다.


이때까지 사전 선수 등록이 이번 대회 불행의 시작이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선수등록을 마치고 옆에서 바로 장비 검사를 했다.숙소에 짐을 두고 왔다고 하니 안전 장비를 철저히 하니 사진을 찍어 가란다.


다 챙겨 온 것이라 대회 중이나 끝나고 나서도 장비 검사를 할 수 있다는 말에 별 걱정없이 의례하는 말인 줄 알았다.


다시 숙소로 돌아 와 늦은 저녁을 먹고 짐을 싸고 12시 다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드디어 대망의 대회 당일.


휴레분들 만나 단체 사진을 찍고 심재덕 선수의 환영사를 듣고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선에 섯다.


얼굴이 안보이니 사진빨이 괜찮아 보인다. ㅎㅎ


참 이번 대회 중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코오롱스포츠에서 무료로 해준 테이핑을 했다는 것이다. 대회 중일때도 끝나고 나서도 다리 아픈 줄 모르겠다.


앞으로는 혼자라도 테이핑을 해봐야 겠다.


올해 서울 100k 우승자 심재덕 선수가 대회 축사 후 출발 종을 울린다. 자랑스런 동갑 내기 심재덕 선수의 우승을 축하하며 힘차게 발걸음을 옮긴다.


배내봉까지는 무난히 도착했다. CP1 배내고개까지는 껌이다.


1시간 반정도 걸려 10시 30분 CP1에 도착했다.



문제는 CP2에서 부터 발생했다. 초반 오버페이스를 해서 인지 갑자기 온 몸에 힘이 쭉 빠진다. 휘청거리며 너덜길을 오르내리며 오늘 완주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DNF란 말이 떠 올랐다.


모든지 자기 확신이 없으면 중도 포기란 말이 떠 오른다. 포기는 배추 셀때 뿐이라고 맘 먹으며 마음을 다 잡아 길을 재촉했다.


천황산 억새를 배경으로 한컷. 입술에 묻은 사탕 가루가 피곤한 얼굴에 선명하다.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걷뛰를 하다보니 주암계곡 CP2에 오후 1시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힘든 코스는 거의 다 지났다. ㅎㅎ


CP2엔 스폰서인 코오롱 스포츠에서 준비한 스포츠젤이 한 가득이다. 별도로 안 챙겨도 될 정도다. 야채 죽을 먹으니 속이 편해진다. 속이 편하니 완주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뿜뿜댄다.



CP3 신불산 휴양림까지는 비교적 완만하다. 이런 길에서는 달려야 한다. 물결치는 억새와 화이팅을 외쳐주는 등산객들과 높고 외롭게 몰아치는 바람과 함께 달리다보니 CP3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은 오후 2시 26분. 예정보다 2~3시간 빠른 페이스다.



CP4 가는 길은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에 숲속 둘레길에 배내천을 옆에 끼고 달릴 수 있는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배내천 억새 너머 깨 터는 소리가 난다. 깻잎에 삼겹살 생각이 간절하다. 막걸리도.


에너지를 에너지 젤로만 얻는 줄 알았는데 숲속 상쾌한 공기를 뱃속까지 마시니 저절로 완충되는 느낌이다. 자연은 에너지 덩어리다. 몸과 마음과 영혼의 에너지 저장고다. 이 모든 것이 공짜다. 자연을 보호해야 우리 인간이 산다.


트레일 러닝이 추구하는 이상도 그러하다. 그래서 일회용 컵과 용기는 사용 금물이다. 내가 트레일 러닝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드랍백이 있는 CP4까지는 힘들지만 그럭저럭 왔다. 시간은 오후 4시 24분.


소고기 죽을 한그릇하고 이온 음료로 목을 축이니 전반부를 잘 마무리했다는 안도감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양말을 갈아신고 방풍자켓을 입고 헤드랜턴을 챙겼다. ~~ 고 생각했는데 하나만 챙긴 것이다. 안전을 위해 배낭엔 항상 헤드랜턴이 2개 있어야 하는데.


CP5 엄수산을 힘겹게 지나 도가지 고개에 들어서니 어둠이 내려 앉는다. 헤드랜턴을 켜니 사위가 밝아진다. 무지(無知)에서 깨어난 느낌. 돈오돈수 (頓悟頓修) 다.

CP5 오룡길 도착시간 7시 27분.


마지막 CP6 영축산 임도 12K는 임도라 달리기 좋은 길이다. 하지만 달리기 싫다. 걷기도 힘들다. 그래도 반 정도는 달려 밤 10시 전에 CP6 영축산 임도에 도착했다.


이제 가장 큰 고비 영축산만 넘으면 완주다. 새벽 1시전에 완주하는 걸 목표로 길을 나섰다.


역시 만만찮다.

나는 대회 때 한번도 스틱을 쓴 적이 없다. 적당한 스틱도 없을 뿐 더러 왠지 걸리적 거려 보였기 때문이다. 계륵(鷄肋)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번 대회처럼 스틱이 필요한 대회는 없어 보였다. 오를때 힘들어 주변에 스틱 될 만한 나무를 찾아 들고 겨우 겨우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한밤 중에 산 정산 중간 지점에서 일어나 선 않되는 일이 벌어졌다.

마지막 고비 영축산을 오르는 중에 핸드랜턴이 갑자기 꺼진 것이다.

보조배터리에 충전케이블을 연결하니 헤드랜턴 불이 들어온다. 안심이다.


줄이 짧아 한 손으로는 헤드랜턴과 보조배터리를 머리 위로 들고 한손으로는 주운 스틱 나무를 쥐고 정상을 향해 다시 출발이다.


그런데 얼마 못가 다시 꺼진다.

큰일이다.

어쩔 수 없이 배낭에서 여분의 헤드랜턴을 꺼내야 한다. 여분의 헤드랜턴은 성능이 별론데.

그런데 아무리 찾아 봐도 여분의 헤드랜턴이 안 보인다.


미치겠다.

DNF를 해야 하나 어찌해야 하나 고민이다. 그런데 헤드랜턴 없이 내려가는 것도 일이다.


천만다행으로 내 페이스와 거의 비슷한 휴레 동호인을 만나 헤드랜턴을 구했다.


생명의 은인이다.

빌린 헤드랜턴은 그렇게 밝지 않아 영축산 정상을 오른 후 하산길에 길을 잃었다.


충전 중인 헤드랜턴을 잠깐 켜서 길을 찾지 않았으면 절벽으로 떨어져 골로 갈 뻔. 왜 헤드랜턴을 2개 챙겨야 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영축산 정산에서 올려다 본 밤하늘의 북두칠성은 선명했다.

영축산 정산에서 내려다 본 울산 시내 도로 불빛은 영롱했다.

영축산 정산 곳곳에 설치된 텐트 불빛은 찬란했다.


바람은 차지는 않지만 계속 불어대고 신불재를 지나 신불산 정산까지 가는 길은 어둠 속에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두워서 달릴 수는 없었지만.


신불산을 내려와 피니쉬까지는 거의 임도다. 길을 헤매던 나를 추월한 주자가 뛰기 시작한다. 나도 따라 뛰기 시작했다. 막판 앞 선 주자를 추월하고 피니쉬까지의 흙길에 몇몇을 더 추월했다.


드디어 피니쉬에 골인. 새벽 1시 53분.


피니쉬 후 바로 장비 검사를 했다. 헤드랜턴 미 소지로 실격이란다.

국제대회라 규정이 엄격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다.

다 내 잘못이니까.


완주했지만 기록은 DNF 다.

새벽 2시

잘곳도 씻을 곳도 없고 택시를 불러도 오지 않는 새벽녁에

남들로 부터 받든 나 스스로 하든 항상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울산까지 내려와 밤을 새워가며 산길을 달렸을까?'


대부분의 직장인은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회의 많다고 회의를 줄이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회의에 참석해서 하나마나한 실행안을 억지로 발언하고,임원은 커녕 팀장도 아닌데 임원 발표를 위한 발표자료 만드는데 야근을 밥먹듯 한다. 월급만을 바라보며 점심시간만이 유일한 기쁨인 직장생활은 자유의지가 1도 없다.


그러나 트레일러닝은 오로지 내 의지에 의해 참가를 하고 내 판단에 의해 코스 공략법을 계획해서 내 현재 몸상태에 따라 달린다.

가다가 힘들면 그만두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오로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결과에 책임진다.

완주 후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은 덤이다.

이것이 내가 트레일러닝을 하는 가장 큰 이유다.


트레일러닝을 하는 두번째 이유는 몸을 힘들게 하여 마음을 평안케하기 위함이다.

나보다 멋지고 잘 뛰고 좋은 아이템으로 장착한 러너들이 넘쳐나는 SNS 세상에는 시기 비교 열등감은 현실이다. AI가 내 비서에서 에이젠트가 되었다가 곧 내 직업을 빼앗아 갈것이라고 떠들어대는 인공지능 시대가 내 미래다.


생각이 많아지면 불안이 몰려온다.

남과 비교하게 되고 그러면 불안은 더욱 심해진다.

생각을 멈추려면 몸을 힘들게 하면 된다.

트레일러닝은 산을 뛰기 때문에 주위 집중을 더 해야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생각도 멈추고 불안도 소멸한다.


트레일러닝은 자연스럽게 자연에서 햇빛을 맞으며 달리기 때문에 불안과 우울증과 기안84가 앓았다는 공황장애에 특효약이다.


트레일러닝을 하는 세번째 이유는 주위 도움때문이다.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화이팅을 외쳐주는 등산객들과 밤새 자원봉사를 하는 분들의 응원을 받으면 하일없이 완주를 하게 된다.

코스를 짜고 마킹을 붙이고 CP음식을 준비하고 후원사를 섭외하는 주최측의 노고가 있었기에 내가 달릴 수 있었다. 한밤중에 실격을 무릅쓰고 헤드랜턴을 빌려 준 동호회 분의 도움이 없었으면 완주는 커녕 DNF도 힘들었을거다.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 기브 앤 테이크를 해야 복 받는다는데 난 받기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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