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혹시 몰라 쇼파 밑, 거실장 밑까지 열심히 청소했다. 그동안 하나하나 사두었던 장난감과 숨숨집, 쿠션 등을 거실에 쫙 펼쳐놓고, 남편과 다소곳이 쇼파에 앉아 젤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띵-동
중문을 열고 현관문을 열었다. 임보자 분이 젤리가 있는 이동장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오셨다. 이동장 문을 열자마자 젤리는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사실 처음엔 낯설어 이동장에서 안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도 했고, 거실장 밑, 쇼파 밑처럼 어둡고 컴컴한 곳에 몸을 숨길까 봐 청소도 더 열심히 했다. 그런데 웬 걸, 원래 제집인 양 집안 곳곳을 걸어 다니며 순찰을 시작했다. 임보자분이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찾아도 그러던가 말던가 집안을 탐색하느라 바빴다. 야... 그래도 너 눈도 못 뜰 때 데려오셔서 밤새가며 분유 먹이면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키워주신 분인데 너....
임보 집사님이 가시고, 젤리는 화장실을 찾더니 큰일을 봤다. 우리 집에 온 지 15분 만의 일이었다. 아이가 끙아가 마려워 차 안에서 조금 낑낑대고 방구를 뽕뽕 뀌었다고 했다. 낯선 집이라 안 싸고 참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화장실에 들어가 잘 누고, 모래로 잘 덮고 나왔다. 얘 뭐야. 남편이 조금 남다른 적응력을 자랑하는데, 젤리도 좀 그런 것 같았다. 어휴 벌써부터 우리 새끼라고 '아빠 닮았네~' 이러고 앉아있는 우리의 모습이 꽤나 웃겼다.
얼마나 잘 놀던지 사진은 찍을 수가 없었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나타난 젤리는 이케아에서 산 6,900원짜리 고양이 터널에서 미친 듯이 놀았다. 아침부터 이동하느라 힘들었는지 그렇게 신나게 놀다가 또 픽 쓰러져 잠들었다. 민들레 홀씨같이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몸뚱이를 하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조그마한 생명체. 우리 집에 이런 생명체가 있다니...! 가슴 한켠이 몽글몽글해졌다.
한 시간 뒤쯤, 캣타워 설치기사님이 방문하셨다. 인기가 많아 주문하고 설치까지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하던데, 우리는 운 좋게도 젤리가 오는 날 설치할 수 있었다. 짜식, 타고난 운은 있나 보다. 본가에 있는 묘르신은 초인종 소리만 들어도 납작 엎드려 쇼파 밑으로 직행해서 숨어버리는데, 설치 기사님의 방문에 젤리도 놀라면 어떡하나 걱정됐다.
우리의 걱정은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기사님이 방문하시자 손수 중문 앞까지 가서 손님을 맞이하고, 기사님이 상자를 풀러 캣타워 부품을 꺼내시는데 옆에 꼭 붙어서 구경하고 앉았더라 얘는. 마치 본인의 캣타워인 것을 아는 마냥. 그렇게 옆에서 드릴질을 하고 망치질을 해도 옆에 앉아 구경하다 꾸뻑꾸뻑 졸더니 아예 꿈나라로 뻗으셨다. 참내, 우리는 적응을 못하면 어떡하지, 일주일 동안 쇼파 밑에 숨어 안 나오는 애도 있다던데 (는 묘르신 이야기) 하며 둘이서 그렇게 걱정을 했는데, 그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젤리는 적응을 참 잘했다.
"기사님, 얘 오늘 왔어요. 기사님이 오시기 한 시간 전에요."
"..... 네? 몇 달은 된 줄 알았는데;;"
곤히 자는 젤리가 혹시나 깰까 봐 TV도 안 보고, 남편이랑 둘이 쇼파에 나란히 앉아 남편이 얼마 전 사놓은 고양이 육아 대백과 e-book을 읽고 있었다. (지금은 젤리가 자도 TV도 잘 보고, 영화도 본다.) 잠에서 살짝 깬 젤리가 쇼파로 폴짝 올라와 내 무릎 위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어느새 솜털 뭉치가 내 무릎 위에서 자고 있었다. 아악! 개냥이인가? 우리 지금 로또 당첨된 건가? 내 새끼가 무릎 냥이인가! 이게 무슨 일이야!
무릎이 따뜻하고 포근했다. 얘는 지금 날 몇 시간 봤다고 이렇게 내 몸에 의지하는 거지. 얘가 벌써 날 믿는 건가? 애초에 의심이 별로 없는 아이인가? 내가 자기 엄마인 건 어떻게 아는 건지, 앞으로 나랑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낼 걸 어찌 아는 건지 젤리는 신기하게도 꼭 내 무릎에, 내 몸 옆에 찰싹 붙어서 잠을 잤다. 그러다 내가 쇼파에 누워보았는데, 또 그땐 내 팔베개를 하며 내 품 안에 쏙 들어와 낮잠을 잤다.
우리도 웃겼다. 이 아이를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평생 자기밖에 모르고 살던 애들이 본인을 각자 엄마, 아빠로 지칭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해쥬께~ 아빠가 해쥬께~ 혀 짧은 소리는 기본 옵션으로. 젤리는 벌써 우리의 삶에 녹아든 것이었다. 어쩌면 젤리가 오기 전부터 우리는 젤리를 우리 가족으로 생각해버렸던 것 같다. 마치 원래부터 젤리가 우리 옆에 있었던 것처럼.
와, 나는 이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겠구나. 아니, 벌써 사랑하게 되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서 또 쌩쌩해진 젤리는 터널 놀이를 열심히 하더니, 밥 주니까 밥도 또 잘 먹고, 물도 알아서 찾아서 챱챱 마셨다. 이게 첫날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적응력을 보여주는 젤리를 보니 나와 남편도 맘이 한결 가벼워졌다. 엄청 걱정했단 말이다 이 녀석아. 고양이와 친해지는 법, 고양이 입양하기, 아기 고양이 입양 이런 영상과 글을 얼마나 많이 보고 공부를 했는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젤리는 첫날부터 우리에게 곁을 내어주었다. 누군가 나를 철석같이 믿고, 본인의 모든 곁을 내어준다는 감정이 이렇게 벅차고 귀한 것이구나.
평생 잊지 못할 하루를 맞이했던 우리도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혹시나 하고 침대에 누워 침대를 탁탁 치며 "젤리~ 자자~"하고 불러봤더니 또 침대 위에 폴싹 하고 올라온 젤리. 와, 우리 새끼 진짜 천재 아냐? 이렇게 도치맘이 되어가는 건가. 침대 위에 올라온 젤리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쩜 남편과 내 사이에 딱 자리를 잡더니 볼록한 배를 내보이며 잠에 들었다. 와, 진짜 얘를 어떻게 하지. 뭐가 이렇게 사랑스럽냐 정말...
앞으로 젤리와 함께할 나날들이 너무 궁금해졌다. 이 손바닥만 한 생명체가 우리에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렇게 우리는 설레며 잠에 들었다.
D+2
정확히 새벽 네시 반, 젤리가 침대 위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엄마 몸에서 아빠 몸으로 폴싹 폴싹, 침대 위에 있는 바디필로우에서 번지점프, 그러다 갑자기 아빠 다리를 깍 깨물더니 또 엄마 등 뒤로 숨었다가 침대 위에서 우다다다다다다. 젤리는 같이 놀아달라고 그 누구보다 구슬프게 '삐용빼용' 울었다. 아... 이것이 진정한 육묘의 시작이구나. 아까 우리는 분명 설레며 잤는데. 아직 아깽이라 새벽에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을 공부도 했고 영상을 봤으면서도 젤리의 천사 같은 미모에 다 잊고 있었다. 우리 아이는 다르다며 어쩜 이렇게 엄마 아빠를 안 괴롭히고 착하냐며 주책을 한 바가지 떨었는데. 그래, 이게 당연하지.
인간의 다리를 깨물며 놓아주지 않는 젤리를 떨어트려 놓으며 다른 장난감을 쥐어주곤 조금 잤다가, 또 발가락에 야금야금 다가가면 사람 다리 말고 깨물 수 있는 붕어 인형을 쥐어줬다. 한창 이갈이를 하는 시기라 그런가 보이는 족족 깨문다.
그 와중에 공평하다고 해야 하나. 나를 깨우고 나면, 그다음 차례는 남편이었다. 엄마 아빠를 번갈아가며 깨우고 열심히 놀더니 금세 또 뻗었다. 그렇게 놀고 자고 또 일어나서 장난치고 잠들고의 반복을 경험한 첫날밤. 그렇게 남편과 나는 둘 다 잠을 설쳤고, "와 이래서 애는 어떻게 키우냐"라며 이 세상의 모든 부모님이 존경스러웠다.
그래도 분홍색 젤리를 선보이며 새근새근 자고 있는 이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힘이 들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출근한 남편에게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피곤하지 않냐 했더니 (평소에 수면의 질이 엄청 중요한 사람인데도) 하나도 안 피곤하다고 (심지어 월요일인데) 했다. 엄마 아빠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건가.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의 여담+
젤리의 아가 때 사진이 다음 픽이었는지, 다음 메인에 소개되어 첫 번째 글이 꽤나 반응이 좋았다. (글 누적 조회수 1위 탈환은 물론, 현재까지 조회수가 26,000을 돌파했다. 충격과 놀라움의 연속....ㅎㅎ) 그래서 푸는 젤리 아가 때 사진... 꼬순내 물씬 주의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