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로서 불행한 일이지만, 나는 공간 감각이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일본 여행을 할 때는 역에서 자주 길을 잃곤 한다. 역만큼 지나다닐 일은 많지 않지만 육교에서도 길을 종종 잃어버린다. 일본의 육교는 길이 여러 군데로 나있어서 꼭 거대한 거미 같다. 어느 다리로 내려가면 좋을지 도무지 감을 잠을 수가 없어서 허둥대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에노역은 육교와 한 몸으로 되어 있었다. 오! 우에노 마루이 쇼핑몰의 장구악보 같이 생긴 ‘○|○|’ 간판이 보이는데 어디로 내려가면 좋을지 몰라 헤맸다.
마루이의 무인양품과 로프트에는 주말나들이로 우에노에 나온 젊은 부부들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아기들이 높은 옥타브로 울어대는 통에 점내는 혼돈. 그 혼돈도 그들에겐 하나의 추억이 되겠지만, 역시 고생스러워 보였다. 마음속으로 그들을 응원하며 여행자는 홀로 유유히 쇼핑을 즐겼다. 한국에선 인터넷으로 샀어도 만원은 넘었을 미도리 MD 노트를 팔백육십엔에 손에 넣어서 기뻤다.
박물관 구경에 이어 쇼핑까지……. 고독한 미식가, 이노가시라 고로였다면 멈춰 서서 이렇게 말했을 타이밍이다. “배가… 고파졌다…” 그 다음 대사는 “좋아, 가게를 찾아보자”지만 근처에 이노가시라가 다녀갔던 가게가 있으므로, 맛집을 찾는 수고는 덜었다.
우에노역에서 남쪽으로 한 정거장 떨어진 오카치마치(御徒町). 한적한 골목길에서 식당을 찾아 헤매던 이노가시라의 시야 한편에 붉은 간판이 들어온다. 그 강렬한 색채에 이끌린 이노가시라가 멈춰선 식당, ‘양샹아지보(羊香味坊)’.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두 번째 성지 순례는 시즌6 제8화 〈도쿄도 다이토구 오카치마치의 양고기 파 볶음과 등갈비〉편에 등장한 양샹아지보로 정했다. 이노가시라 상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양샹아지보는 도쿄 칸다(神田)에 있는 유명 중화식당 ‘아지보(味坊)’의 오너가 개점한 세 번째 자매점이다. 중국 헤이룽장성(흑룡강성, 북만주) 출신의 오너가 경영하고 있기 때문에 본점 아지보와 마찬가지로 양샹아지보 또한 헤이룽장 풍의 중국요리를 표방하고 있다. 다만 양샹아지보는 상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고기(양羊)에 고수(샹香=샹차이香菜)를 곁들인 요리를 전문으로 한다. 때문에 메뉴판은 양떼들에게 점거당한 형국이다. 또 요리를 작은 접시에 조금씩 담아 팔기 때문에 퇴근길에 들러 술 한 잔 걸치기 딱 좋다. 몇 종류를 시켜놓고 맥주 한 모금 하면 이노가시라 고로의 표현대로 ‘오카치마치 양 축제’가 벌어진다.
오른쪽의 도마 앞에 앉았다. 다소 부담스러운 자리.
가게에 들어서자 친구들과 잔을 기울이며 주말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빈자리도 있었지만 고독한 여행자는 바를 안내받았다. 점내는 드라마에서 봤던 양샹아지보와 퍽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홀 담당이라는 의미일까, 혼자 다른 색의 티셔츠를 입은 키다리 남자 점원만 중국말 억양이 섞인 일본말을 쓰며 손님들 사이를 분주히 오갈 뿐. 바 안쪽의 좁은 주방은 예닐곱이나 되는 점원들로 북적였다. 아직은 한가한 시간대라 다들 중국말로 떠들거나 밥그릇을 들고 서서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바 앞에 선 무뚝뚝해 보이는 아저씨가 주방장인 모양이었는데, 내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다가 중화요리집답게 주문이 들어오면 큰 소리로 외치는 통에 특히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각양각색의 점원들을 관찰하고 있자니 적적하진 않았다.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중국말. 여기는 헤이룽장성 치치하얼. 이 또한 이 가게의 맛이 아니겠는가.
주문은 기본기를 보자는 의미에서 볶음밥과 양꼬치를 부탁했다. 지금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모험주문을 하나 정도는 더 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羊香炒飯. ‘양샹챠항’이라고 중국말 반, 일본말 반으로 읽어야 할까, 아니면 ‘양샹차오판’이라고 중국말로 온전히 읽어야할까. 불맛도 좋고 양고기 씹는 맛도 좋았던 볶음밥이다. 거기에 고수가 향을 도맡아 책임지고 있었는데,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고수를 썩 좋아하지 않는 여행자도 맛있게 먹었다. 볶은 고수는 이런 맛이구나. 새로운 발견을 했다.
반찬으로 시킨 램 숄더 양꼬치(ラムショルダー). 잘 구운 양고기 위에 커민과 참깨를 듬뿍 뿌렸다. 커민이 향뿐만 아니라 씹는 맛까지 풍부하게 만들어줬다. 하오츠, 하오츠!
양샹아지보에서 늦은 점심을 먹은 터라 밤이 되니 배가 고파왔다. 게다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갑자기 돈가스 생각이 무척 간절해졌다. 허겁지겁 검색, 또 검색. 늦은 시간이라 근방에 문을 연 곳을 찾기 어려웠지만 있긴 있더라. 머릿속이 돈가스로 가득 차서 어깨 위에 돈가스를 올려놓은 꼴이 된 여행자는 숙소가 있는 신바시에서 긴자까지 속보로 나아갔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수상쩍은 커플이 더러 보이는 밤의 긴자. 그런 주변 분위기와 일절 상관없이 돈가스에 대한 일념 하나로 긴자역에 다다른 여행자는 ‘긴자 카츠이치(銀座 かつヰチ)’라는 이름의 작은 체인점에 들어섰다.
금빛 찬란한 간판 밑으로 들어서자, 인심 좋아 보이는 동남아 출신의 아주머니가 맞이해주었다. 실내는 부러 올드한 느낌으로 꾸민 듯, 팔십년대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네모난 벽시계가 인상적이었다.
일본에서는 처음 가보는 돈가스 전문점이었다. 돈가스를 시키면 되겠지, 메뉴를 뭐 볼 필요가 있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사람 고민하게 만드는 메뉴였다. 돈가스마다 돼지고기의 산지와 브랜드를 표시해두고 가격차를 두는 상술을 구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처음 온 식당은 가장 기본메뉴부터 정찰하는 게 낫겠지? 그런데 사쿠라지마 비유돈이라니 들어본 적 없는 돼지고기 브랜드인데……. 모처럼 긴자까지 나왔으니 유명하다는 가고시마 흑돼지를 시켜야 할까. 하지만 비싼 메뉴가 맛이 없으면 어쩌지? 삼만원 돈인데 말이야……. 저 매직으로 쓴 안주카레라는 것도 궁금하네.’
장고 끝에 사쿠라지마 비유돈이란 돼지고기를 사용하는 것들 중에 가장 비싼 ‘특상 히레가스(特上ヒレかつ)’로 부탁했다. 사쿠라지마 비유돈(桜島美湯豚)은 가고시마현 타루미즈시(垂水)의 돼지고기 브랜드다. ‘아름다운 온천(美湯)’이란 이름대로 지하 천삼백 미터에서 길은 천연온천수를 먹였다나 뭐라나. 이야기와 이름이 붙은 돼지의 머리 위에 ‘상’이니 ‘특상’이니 ‘특선’이니 하는 각각의 관을 씌워서 손님에게 내놓는다. 이처럼 소비에 등급을 매겨 늘어놓는 일, 대접에 차별을 두는 일은 인간의 욕망을 주무르는 데 아주 유용한 전략이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그걸 잘 이용할 줄 안다.
좌우간 한번 내린 선택에 후회는 없으니…… 주문 마감시간도 맞췄고, 저온에서 십오분 정도 튀기는 방식이라 느긋하게 점내를 구경했다. 한 무리의 동남아 관광객들이 점원 아주머니와 그들의 언어로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타지에서 동향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또 서로 응원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
이 아주머니는 일본말도 잘하고 싹싹해서 여행자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영업시간을 알려주며 다음에 또 오라고 웃는 모습을 보아하니 영업에도 일가견이 있는 듯. 그러나 일본인 주방장과 의사소통이 썩 잘 되는 콤비는 아닌 것 같았다. 내 뒤에 온 손님은 주문이 늦게 들어갔다. 젊은 주방장이 한 소리 하려는 눈치였는데, 아주머니는 능청스럽게 잘 넘어갔다.
마침내 히레가스! 별로 유명한 브랜드의 돼지고기는 아닌 것 같았지만 고기맛이 아주 좋았다. 소스보다는 소금과 와사비를 곁들여서 고기맛을 느끼는 편이 좋았다. 아무데나 골라잡아 들어간 체인점 치고는 만족스러웠다. 좁은 매장임에도 질을 고집하여 시간이 오래 걸리는 조리방법을 택한 것도 체인점의 방식이 아니고…….
늦은 밤, 맥주를 한 잔 걸친 여행자는 카츠이치의 다국적 콤비와 기분 좋게 헤어졌다. 두 사람의 미소가 글을 쓰는 지금도 떠오른다. 더 맛있는 돈가스 집도 많겠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고 그리하여 내일의 도쿄를 걸을 힘과 마음을 다시 얻었으니 그것으로 족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