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지킨 카톨릭 신자들, 《키리시탄의 유품》 전시
본관 전시가 끝나는 곳에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가톨릭의 성화가 특별전시실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집안의 내력이 가톨릭과 얽혀있는 여행자로서는 뜻밖의 만남이었다. 전시 제목은 《키리시탄(キリシタン, 가톨릭 신자)의 유품》. 2018년, 규슈 나가사키와 아마구사(天草) 지방의 잠복키리시탄 관련유산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것을 기념하는 특별 전시로, 나가사키 봉행소(奉行所, 에도시대의 지방행정기구)가 가톨릭을 박해하면서 몰수한 성화와 성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2018년 12월 2일 전시 종료)
에도막부가 서구열강에게 개항한 지 11년째 되는 1865년 3월, 나가사키 내 프랑스인 거류지의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 프티장 신부는 따스한 봄날의 햇살을 맞으며 정원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 때 열댓 명 정도 되는 일본인들이 정원 밖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이 진기하게 생긴 ‘프랑스 절’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리라. 프티장 신부는 이들을 맞아들여 마음껏 견학할 수 있게 해주었다. 성당을 둘러본 그들은 기도 중인 신부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속삭였다.
“우리들의 마음[믿음]은 당신의 마음과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 상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말을 듣고 놀란 신부가 그들을 성모 마리아 상으로 안내하자, 그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1644년, 일본 최후의 선교사 고니시 만치오(小西 Mancio, 임진왜란 당시 왜군 선봉장이자 가톨릭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손자)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처형당한 이래 220여년만에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과 로마교회 간의 연결이 회복된 것이었다. 대륙의 동쪽 끝 섬나라에 수백년간 신앙을 지켜온 그리스도교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유럽인들에게 충격적인 뉴스였다.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은 막부의 칼날 앞에서 어떻게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었을까.
신도발견을 묘사한 오우라 천주당의 부조. 누대에 걸쳐 목숨으로 신념을 지킨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파도가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사진출처 : christian-nagasaki.jp)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은 이제 한국에서도 꽤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에 가톨릭이 전파된 것은 1549년, 예수회가 선교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은 포르투갈 등의 서양상인들과의 교역에서 이득을 얻기 위해 가톨릭의 포교를 허락했다. (특히 화승총의 수입이 주요한 목적이었다.)
고니시 가문의 문장 ‘하나쿠루스(花久留守, 꽃십자가)’. 키리시탄을 믿는 다이묘들은 십자가가 들어간 문장을 사용했는데 이를 쿠루스(久留守)라 부른다. 쿠루스는 크로스(Cross)를 일본말로 옮긴 것이다.
크리스천의 포르투갈어 발음을 따 ‘키리시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가톨릭은 빠른 속도로 교세를 확장했다. 키리시탄은 규슈, 교토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했는데 1582년경에는 전국적으로 15만의 신자를 확보했으며, 이 중 나가사키 일대에만 6만의 신자가 존재했다. 다이묘 중에서도 고니시처럼 독실한 키리시탄이 된 이가 많았으니 1582년에는 규슈지역의 다이묘들이 선교 원조를 받기 위해 로마의 교황에게 사절단을 파견한 일도 있었다.(덴쇼 견구사절단 天正遣欧使節. 이들이 가지고 돌아온 구텐베르크 인쇄기로 최초의 일본어 활판인쇄가 이루어졌다.)
이하의 사진들은 촬영 허가된 전시품만 촬영한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중요문화재 《성모자상》. 16~17세기경, 유럽에서 들어온 성화. 대단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마리아가 인상적이다.
중요문화재 《그리스도상》. 16~17세기경. 운반에 용이하도록 팔을 별도로 만들어 조립하게 되어있다. 재질이 상아인 것으로 볼 때, 포르투갈의 동방무역 거점인 인도 고아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중요문화재 《동패 무원죄의 성모》. 16~17세기경. 관음보살과도 같은 얼굴, 불교식의 후광과 구름 묘사로 보아 일본에서 주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국시대가 끝나고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막부가 권력을 장악하자 상황은 일변했다. 우선 막부의 권위가 덴노(天皇)와 신도(神道)에서 비롯되는 이상 유일신을 믿는 가톨릭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예수회의 배후에 있던 포르투갈 ‧ 에스파냐를 누르고 네덜란드와 잉글랜드가 신흥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따라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포르투갈 대신 네덜란드와 교역하기를 원했는데, 신교국가인 네덜란드는 교역조건으로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막부로서는 더 이상 가톨릭을 보호할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규슈의 키리시탄 다이묘들이 포르투갈과 교역하며 세력을 강화하고 있었으므로, 막부는 가톨릭을 위험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막부는 1614년에 가톨릭을 금지하는 금교령을 내렸다. 교회와 신학교는 파괴되었고 키리시탄은 해외로 추방되거나 처형당했다. 1873년,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야만적인 국가와는 평등한 통상조약을 맺을 수 없다는 서구열강의 압박에 메이지 정부가 굴복할 때까지 250여년간 가톨릭 박해는 계속되었다. 막부는 키리시탄들을 철저히 색출해내었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부모로부터 자식에게로 혹은 이웃끼리 끈질기게 믿음을 이어갔으니 이들을 ‘잠복 키리시탄’이라 부른다.
‘잠복 키리시탄’을 현상수배하는 1711년 5월의 ‘세사츠(制札)’. 세사츠는 관이나 사찰에서 법령이나 전달사항을 알리기 위해 만든 팻말을 말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키리시탄 종문은 이전부터 금지되었다. 만약 수상한 자가 있다면 고발하라.
상으로 파테렌(신부)를 고발하는 자에게는 은 500매.
이루만(신부보좌)을 고발하는 자에게는 은 300매.
겉으로만 신앙을 버렸다가 다시 키리시탄이 된 자를 고발한 자, 역시 은 300매.
협력자와 신도를 고발한 자에게는 은 100매.
위와 같이 하사한다. 일반 협력자나 신도라 하더라도 그 자의 지위신분에 따라 은 500매까지 하사한다. 키리시탄을 숨겨두었다가 다른 이에게 발각되었을 경우는 그 지역의 나누시(名主)와 고닌구미(五人組)까지 한패로 쳐서 함께 처벌한다.
*파테렌 : ぱてれん, 신부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padre를 일본말로 옮긴 것이다.
*이루만 : いるまん, 형제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irmão를 일본말로 옮긴 것이다.
*나누시 : 향촌의 장. 주로 지역의 유력한 평민이 맡았다.
*고닌구미 : 막부가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다섯 가구 내외로 조직한 연대책임, 상호감시, 상호부조의 단위
신부의 현상금인 은 500매를 금으로 환산하면 358냥, 약 6680g이다. 즉 현재의 금시세로 치자면 약 3억 2천만원에 이르는 거액이다.(2019년 2월 28일 국내시세 기준) 당대 일본의 대표적 미곡시장인 오사카의 1710년 시세로 계산하자면 약 279석의 쌀을 사고도 돈이 남는다.(1석=당시 성인 남성의 1년 쌀 소비량=180.39리터) 중범죄에 해당하는 방화범의 현상금이 은 30매였던 것과 비교하면 막부가 키리시탄을 얼마나 위험시했는지 알 수 있다. (사이타마현 현립문서관 자료 참조)
중요문화재 《마리아관음상》. 미륵이 올 때까지 중생들을 고통으로부터 지켜준다는 대자대비의 관음보살. 이 관음보살을 중국에서는 여성인 자모관음(慈母観音)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강했다. 일본의 키리시탄은 중국에서 수입한 이 자모관음상을 성모마리아상으로 삼았다. 불교로 가장하여 탄압을 피하면서도 신앙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중요문화재 《이타후미에 그리스도상(피에타)》. 17세기. 막부는 키리시탄을 색출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예수나 성모 마리아를 그린 성화, 동패를 밟게하였다. 이를 후미에(踏み絵)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곧잘 파손되었으므로 1630년경부터는 동패를 널판에 끼워 오래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를 이타후미에(板踏絵)라 한다. 위의 전시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의 시신을 끌어안고 비통에 잠긴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피에타 동패를 이타후미에로 만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밟아서 표면이 반들반들해졌다.
중요문화재 《놋쇠후미에 그리스도상(피에타)》. 주물사 하기와라 유사(萩原祐佐) 제작, 1669년. 이타후미에조차도 파손되었으므로 봉행소에서 직접 놋쇠로 후미에를 제작하였다. 나가사키 봉행소에선 놋쇠후미에를 사용하게 된 1670년 이래로 정월에 모든 영민을 모아놓고 후미에를 시켰다. 후미에는 정월의 연례행사가 되었고 그 때마다 장이 들어서고 축제처럼 북적였다고 한다.
초기의 후미에는 매우 효과적인 키리시탄 적발 수단이었다. 그러나 키리시탄들 사이에서 신앙만 지키면 후미에를 해도 괜찮다는 사고방식이 퍼지면서 적발률은 급격히 떨어졌다. 후미에를 밟으면서 속으로 가만히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올렸던 것이다. 봉행소에서 만들어 성물이라 부를 수도 없는 놋쇠후미에는 더더욱 적발률이 떨어졌다.
동양관의 엘리베이터에 놓인 의자. 일본은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부터 고령사회에 발맞춰나가고 있었다.
‘키리시탄의 유품’ 전시에 이어, 제국박물관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동양관의 한국 유물들을 씁쓸한 마음으로 둘러보고 국립박물관 관람을 마쳤다.
박물관 마당에서 겨울의 귀중한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았다. 수채용구를 들고 나온 할머니의 화판을 슬쩍 보니 표경관의 푸른 돔을 그리고 계셨다. 할머니의 그림도 고왔지만 그림을 그리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림처럼 고와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걸었다가는 이 고운 그림을 망치고 말 것 같아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도쿄국립박물관의 표경관(表慶館). 1909년 개관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관. 지금은 기획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중요문화재)
우에노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국립서양미술관의 마당에 있는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지옥의 문》과 그 일부를 확대주조한 《생각하는 사람》,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 《아담》, 《이브》. 국립서양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모든 예술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로댕의 대표작들도 가와사키 조선소의 사장이었던 마쓰카타 코지로(松方幸次郎)가 1910~20년대에 수집한 것이다. 그 중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칼레의 시민(Les Bourgeois de Calais)》이었다.
원래 마쓰카타 코지로의 발주로 1919~1921년 경 주조된 《칼레의 시민》은 마쓰카타가 아닌 미국의 수집가에게 매각되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인 1926년에 주조된 《칼레의 시민》이 마쓰카타의 손에 들어와야 했겠지만, 이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독일이 가져가버리고 말았다.
2차대전이 끝나고 1926년 주조 《칼레의 시민》은 프랑스 파리로 돌아왔지만 마쓰카타는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칼레의 시민》뿐만 아니라 유럽에 남아있던 마쓰카타의 모든 콜렉션이 적성국가의 자산으로 프랑스정부에 몰수되었던 것이다. 일본 또한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이었으니까 말이다.
1926년에 주조된 《칼레의 시민》, 프랑스 파리 로댕 박물관 (사진출처 : musee-rodin.fr)
일본정부는 1951년부터 마쓰카타 콜렉션을 반환 받기 위해 프랑스정부와 교섭을 시작했고, 그 결과 많은 예술품들을 프랑스정부로부터 ‘기증’받을 수 있었다. 다만 《칼레의 시민》은 파리의 로댕 박물관이 기증을 강력하게 거부했기 때문에, 1953년 일본정부의 자금으로 새로이 주조되었다. 현재 일본 국립서양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칼레의 시민》은 1953년에 새로 주조한 것으로 전세계에 있는 12점의 《칼레의 시민》 중 9번째로 주조된 것이다. (삼성 일가가 마지막 12번째 에디션을 소유하고 있지만, 지금은 전시하고 있지 않다.)
신념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지만 한편으로는 목전에 다가온 죽음을 바라보는 인간의 고뇌. 인물의 표정과 자세, 근육과 옷의 주름 하나하나가 그러한 정념을 향하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힘이 너무나 강렬해서 동상 주위를 세 바퀴는 돈 것 같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슴속에 품고 있는 목숨보다 무거운 마음을 헤아려 보며……. 이 작품의 배경이 된 칼레의 일화가 사실은 과장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로댕이 표현하려고 했던 정념만은 진실한 것이리라. 문득 로댕의 인물들 위에 박물관에서 본 키리시탄의 이야기가 겹쳐보이기도 했다.
다만 로댕의 의도와 달리 높다란 단 위에 작품을 올려둔 것은 아쉬운 점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그 점이야말로 일본적인 감각일 수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