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국립박물관
도쿄 국립박물관은 하루에 다 둘러보기도 힘들더라는 말을 듣고 이른 아침부터 숙소를 나서 우에노로 향했다. 토요일이었으므로 우에노 역에는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우에노 동물원으로 향하는 젊은 부부의 뒷모습이 눈부셨다. 여행자는 역사 내의 식당에 혼자 앉아 무스비(주먹밥)를 먹었지만, 우설과 명란의 힘으로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도쿄국립박물관 입장권과 우에노 역 기념품점에서 파는 도쿄 야마노테선 전동차모양 카드홀더. 카드홀더에는 삿포로에서 구입한 키타카 교통카드를 넣어서 남은 여행기간 동안 요긴하게 썼다. 요즘도 항상 카드홀더를 가방에 달고 다닌다. 출근길에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여행자의 마음.
느긋하게 배를 채우고 역을 나섰건만 박물관 개관까지는 사십 분은 족히 남은 시간이었다. 너무 일찍 도착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줄을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국립서양미술관의 루벤스전을 보려는 사람들이었다. 이 미술관도 분명 국립박물관가 같은 시간에 개관할 터인데…….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장사진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지만, 미술관이나 박물관 전시를 개관 전부터 줄서서 기다리는 광경은 살면서 처음 보는 진기한 광경이라 셔터를 눌렀다.
국립서양미술관
그림자의 바다 깊은 곳으로 잠수하는 흰긴수염고래. 국립과학박물관 앞에 있는 실물크기의 모형이다.
개관까지 우에노 공원을 산책할 생각이었으나 미술관의 줄을 보고는 곧바로 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개관 삼십 분 전의 박물관 앞에도 줄이 생겼다. 회원, 비회원 도합하여 못해도 일흔 명은 서있었으니, 여행자 또한 재빨리 비회원 어르신들 뒤의 쉰 몇 번째쯤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입장할 때는 내 앞으로 회원 기백명이 우르르 먼저 입장했다.
개관 전부터 줄을 늘어선 관람객들. 도쿄 국립박물관은 1872년 문부성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한 일본 최초의 박물관이다. 최초의 전시품들은 다음 해인 1873년에 열릴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에 출품 예정인 물건들이 중심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 볼 때 문부성 박물관 또한 서구 열강의 근대를 따라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국박물관(帝国博物館),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의 이름을 거친 이 곳은 전후인 1947년 제국이란 관을 벗어버리고 도쿄 국립박물관이 되었다. 사진 정면은 본관으로 1937년 완공되었다. 철근콘크리트 건물에 일본식 기와지붕을 얹은 모양새인데 이러한 건축양식을 제관양식(帝冠様式)이라 한다.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릴 때 한 가지 불상사가 있었으니…… 푸른 눈의 외국인 남자가 내게 다가와 여기가 매표소 줄이 맞는지 묻는 것이었다. 이 자도 자기 딴에는 개중에 비교적 젊어서 영어를 좀 할 것처럼 보이는 치에게 물어본 것이겠지만…… 이봐요 같은 외국인끼리 왜 이러십니까, 소인은 일어도 못하지만 영어는 더 못하구요, 저도 어쩐지 저기 회원접수창구라고 써진 곳의 줄은 아닌 것 같아 남들 따라 섰을 뿐입니다. 공황 상태에 빠져서 무참히 토막 난 단어들만 간신히 내뱉었고 그럴수록 이 자의 표정에선 불안이 피어오르고. 그 와중에 내 입에서는 어째서 ‘Yes’라는 말 대신 ‘하이, 하이(はい、はい)’만 자꾸 튀어나오는지. 누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주변의 어르신들은 우리와 거리를 조금씩 벌리는 느낌이었다.
삼분 영어지옥이 끝나고 박물관회원들이 먼저 입장하는 사이 나와 John(?)의 줄은 매표소 앞으로 향했다. 매표소 앞에 다다르니 박물관 직원이 나와 퍽 복잡한 설명을 시작했다. 일 · 이 번 창구는 발매기인데 특별전 표를 팔지 않고, 어디는 일반관람객 창구고, 어디는 단체관람객 창구이니 알아서 줄을 잘 서시라. 그런데 왜 영어로는 설명을 해주지 않는 것일까. 특별전을 보지 않을 여행자는 일찌감치 발매기 창구에 줄을 서서는 노파심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멀찍이 단체관람객 창구에 줄을 선 John과 눈이 마주쳤다. John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여행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John. 창구 직원이 도와주겠지요.
입장까지 기다린 것에 비해 입장 자체는 일사천리였다. 대다수의 관람객들은 특별전을 보러 몰려갔으므로 상설전시는 여유롭게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기대감을 품고 관내에 들어왔으나, 작은 입을 가진 짐승이 거대한 먹이를 눈앞에 두고 어쩔 줄 모르는 꼴이라…… 일단 욕심을 버리고 본관의 상설전시와 동양관 5층의 한국유물들을 보기로 하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일본미술을 주제로 하는 본관에는 불상과 탱화, 일본도와 갑주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지만 여행자의 관심은 에도시대의 서민문화에 있었다. 그 중 흥미로웠던 몇 점을 소개할까 한다.
이하의 사진들은 촬영 허가된 전시품만 촬영한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에도시대, 19세기경의 ‘카지바오리(火事羽織)’, 즉 화재시 입는 겉옷(하오리)이다. 목면을 누벼 물을 잘 흡수하게 만들어 불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일종의 소방복이다. 그런데 소방복에 왜 이렇게 화려한 ‘라이진(雷神)’―번개의 신을 장식한 것일까.
우왕좌왕 도쿄 여행기를 쓰는 내내 화재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목조건축이 주를 이루는 일본에서 화재는 심각한 재난이었다. 이를테면 중세의 촌락사회에는 ‘무라하치부(村八分)’라 하여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를 집단으로 따돌리는 풍습이 있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촌락생활의 열 가지 공동행위 중에 여덟 가지는 도와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라하치부를 하더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이웃에 손해를 끼치는 두 가지 일은 도와주었는데, 그 중 하나는 장례를 치르는 일이고(돌림병을 막기 위해) 다른 하나는 불을 끄는 일이었다. 그만큼 촌락에서도 화재는 무서운 재난이었는데, 다이묘(大名, 영주)의 성 아래 목조건물들이 다닥다닥 밀집해있는 도시의 화재에 대해 더 말하여 무엇 할까.
촌락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도시에는 '마치(町)'라 불리는 일정한 자치권한을 가진 상호부조 공동체가 있었다. 도시 서민들 가운데 이 카지바오리라는 소방복을 입고 마치의 소방수 역할을 한 것은 ‘토비쇼쿠(鳶職)’라 불리던 건설 직인들이었다.
토비쇼쿠들은 평소에 ‘다이쿠(大工)’라 불리는 목공 직인을 도와 집을 짓거나 수리하는 직역을 맡았다. 왜 이들을 토비쇼쿠라 부르는가 하니 대들보 위를 날아다닌다(토부飛ぶ)하여 토비쇼쿠라고도 하고, 통나무를 옮길 때 ‘토비구치(鳶口, 솔개부리)’라 부르는 긴 장대에 갈고리가 달린 도구를 사용한다 하여 토비쇼쿠(鳶職)라고도 한다. (현대 일본에서도 비계―아시바를 놓거나, 철골을 조립하고 송전선을 가설하는 등 고공에서 작업하는 건설직을 토비쇼쿠라고 한다.)
에도시대의 토비구치 (사진출처 : Wikipedia)
건설노동자인 토비쇼쿠가 마치에서 소방수의 역할을 맡은 것은 그들이 가진 건축기술이 화재진압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처럼 기계가 발전하지 않은 중세에 사람의 손으로 물을 퍼 날라 불을 끈다는 것은 한계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당시의 화재 진압이란 주로 불이 난 건물 주변을 철거함으로써 불이 번지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때문에 건물의 구조를 누구보다 잘 숙지하고 있고, 철거할 때 사용하는 토비구치(갈고리)나 큰 망치의 사용에 능숙한 토비쇼쿠들이 소방수의 역할을 도맡은 것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신의 사내다움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단순한 사내들의 공통된 특징이라…… 토비쇼쿠들은 카지바오리의 겉에는 자신이 속한 조의 문장을 수놓고 안감에는 위의 전시품과 같이 번개의 신이나 용, 호랑이 따위를 수놓았다. 화재진압이 끝난 토비쇼쿠들은 카지바오리를 뒤집어 이런 멋진 그림들이 겉에 보이도록 입고는, ‘화마와 멋있게 싸워 이겼다’며 으스댄 것이었다. 참으로 유쾌한 문화가 아닐 수 없다.
이세구니 나가시마 번(伊勢国長島, 지금의 미에 현)의 번주인 마시야마 마사카타(増山正賢)가 1807년부터 1812년에 걸쳐 곤충과 파충류를 그린 《충시첩(虫豸帖)》 네 권 중 가을 편이다. 마시야마는 마흔 여덟의 나이에 아들에게 번주 자리를 물려주고는 풍류를 즐기며 살았는데, 시서화에 모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바둑이나 차를 달이는 일에도 취미를 가진 문인이었다.
《충시첩》을 들여다보면 마시야마가 근대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시야마는 다양한 행동을 하는 곤충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그 세부까지 치밀하게 묘사하였다. 암수의 차이를 묘사하거나, 먹의 농담으로 입체적인 생김새를 표현하려고 하는 등, 마시야마는 대상에 대한 관념을 묘사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대상을 물질로서 분석 · 재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시야마는 관찰하다가 죽이고 만 벌레들을 자신의 ‘벗’이라 부르며 작은 상자에 모셔두고는 언젠가 적당한 땅에 묻어 공양을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한다. 마시야마 마사카타 사후 그의 벗들이 절에 ‘무시즈카(虫塚, 벌레무덤)’를 세웠으니, 지금 그 벌레들은 우에노 공원 옆의 사원 칸에이지(寛永寺)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우키요에 화가 가츠카와 슌에이(勝川春英)의 1795년작으로 당시 공연한 가부키 《가나데혼 추신구라(仮名手本忠臣蔵)》에서 고노 모로나오(高師直) 역을 맡은 배우 7대 가타오카 니자에몬(片岡仁左右衛門)을 그린 그림이다. (《七代目片岡仁左右衛門の高師直》)
추신구라는 1701년의 아코 사건(赤穂事件)이라는 실화를 모델로 한 이야기로 억울하게 죽은 주군의 복수를 하는 무사들의 내용을 담고 있다. 무사도라는 전국시대의 가치와 막부의 질서에 대한 충성이라는 에도시대의 가치가 충돌하는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아코 사건 당시 주군의 복수를 한 무사들이 대중의 동정을 받았듯이, 추신구라를 다룬 닌교죠루리(人形浄瑠璃, 샤미센 반주에 맞춰 공연되는 인형극)와 가부키는 도시 서민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때는 1795년. 당시 에도 3좌라 불리던 극장 미야코좌(都座), 키리좌(桐座), 카와라사키좌(河原崎座)에서 경쟁적으로 가부키 《가나데혼 추신구라》를 상연했다. 그러자 에도 시중이 가마에 불을 지펴놓은 것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요즘 자주 쓰는 말로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 했던가. 가츠카와 슌에이는 추신구라의 역할로 분장한 배우들의 모습을 우키요에로 그려 일약 스타 아티스트가 되었다. 위의 우키요에도 바로 그 1795년 작품이다.
이 그림이야말로 도쿄국립박물관에서 본 그림 중에 가장 나를 매료시킨 그림이었다. 선은 단순했지만 악인의 마음씨가 표정과 자세에서 흘러넘치고 있었다. 연극적인 과잉이 약간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정말로 매력적인 악역 연기자를 보는 느낌이었다. 중세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면 이렇게 생긴 캐릭터가 악당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우키요에 화가 이소다 코류사이(礒田湖龍斎)가 그린 《추신구라 7단》. 적의 동태를 알리는 밀서를 읽다가 여자를 보고 황급히 밀서를 감추는 무사. 밀서의 내용을 엿보다 들킨 여자. 그리고 바닥에 숨어 밀서의 내용을 엿보는 적의 첩자. 마치 밀서처럼 폭이 좁고 긴 화폭에 극중의 한 장면을 긴장감 넘치는 구도로 묘사했다.
우키요에 화가 우타가와 쿠니요시(歌川国芳)가 그린 《괴물 추신구라 9단(化物忠臣蔵 九段目)》. 《괴물 추신구라》 연작은 '추신구라'의 등장인물들을 각종 요괴와 유령으로 바꿔 그린 작품이다. 우타가와 쿠니요시는 다이나믹한 구도가 인상적인 작품들을 많이 그렸는데, 특히 온갖 괴물들이 날뛰는 기괴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요괴들의 익살맞은 생김새가 모로호시 다이지로(諸星大二郎)의 만화 《시오리와 시미코(栞と紙魚子)》 시리즈를 떠올리게 했다.
우타가와 쿠니요시, 《소마의 고궁(相馬の古内裏)》. 『우토우 야스카타 충의담(善知鳥安方忠義伝)』이라는 전기소설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원작에서는 수백의 해골들과 싸우는 장면을 하나의 거대한 해골로 바꾸어 극적 효과를 높였다. 또한 세 장을 이어붙인 그림의 경우 각각의 조각이 완결된 장면이 되도록 하는 관례를 깨고 두 장에 걸쳐 화폭 가득 해골을 그려 넣었다. 이렇게 기괴하면서도 대담한 구도를 잡는 것이 우타가와 화풍의 특징이다. (사진출처 : Wikipedia)
다음 편에도 도쿄국립박물관 관람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