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혜 작가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을 읽고 있다. 주인공은 글방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데 자신을 ‘시옷’이라 했다. 시옷은 넘어지지 않고 잘 걸을 것 같아서 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 밑에 내게 이 책을 빌려준 이의 메모가 쓰여 있었다. ‘전 이응이에요. 어쩐지 모나지 않고 둥글게 살 것 같지 않나요.’
나는 노트를 꺼내 ㄱ-ㅎ 까지 자음들을 죽 써놓고 무엇이 가장 나 같을지 잠시 고민을 했다. 나의 상상은 여기저기에 닿아 내 이름의 자 모음들을 분해해보기도 하고 각각의 자음들에게 사연을 붙여주기도 했다. 내 세계에 갇힌 미음으로 할까. 아니면 밀어낼 쪽과 내게 들일 쪽을 동시에 가진 리을로 할까. 그러다 내가 선택한 나는 비읍이었다. 비읍은 내가 나를 담는 컵이다. 스스로의 충만함에 따라 중간 획은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했다. 어쩌다가 비읍이 하나 더 생기면 쌍비읍으로 내 다른 자아가 된다. 컵에 내가 얼마나 찼는지, 지금 괜찮은지 눈으로 확인하는 다른 자아.
최근에 나는 이응과 책을 바꿔서 읽고 있다. 이응은 책에 밑줄을 치거나 끄트머리를 접고, 하트나 별모양으로 표시해두기도 했다.(하트와 별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응의 독서기록을 따라가면서 영혼을 바꾸는 것 같았다. 자아와 책 속 구절이 동하는 부분에 대한 메모를 엿 볼 때는 이응의 은밀한 내면에 한 발자국 다가선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반면에 내가 빌려준 책에는 밑줄도 접힌 부분도 없다. 표지를 넘기자마자 작가의 친필사인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어떤 생각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내밀한 이응의 독서흔적에 흠뻑 빠졌던 것처럼 혹시 나를 들킬까봐 겁이 났다가 들킬 흔적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 했다.
내가 주로 쓰는 글은 시다. 시는 뭐든 남 얘기처럼 쓸 수 있고 하나의 세계관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왜 내가 시를 좋아하는지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내가 드러낼 수 있는 세계 중에 가장 숨길 수 있는 의도가 많아서 였던 것 같다. 시 속에서는 내가 애였다가 어른이었다가 개였다가 신이 된다. 죽어가는 것을 마음껏 살리고 살아있는 것을 죽이고 가장 추악한 나를 보여줘도 된다. ‘그건 그냥 시인데요.’ 한마디로 나를 정의해 볼 수 있어서 편리하다. 아, 나는 지금 편리하다는 말을 썼다. 이것도 정말 낯설고 어색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왔구나.
나는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과 들키기 두려운 마음 사이에서 글을 쓴다. 마치 내가 민주와 비읍 사이에 있듯이. 비읍은 내가 무슨 말을 써도 되는 든든한 빽이 된다. 빽이라는 단어에 비읍이 두 개인 것도 왠지 기쁘다. 기쁘다는 단어에 비읍이 두 개 인 것도 든든해진다. 사실 비읍에 담긴 나는 자주 쏟아지고 싶다. 나는 비읍으로 시작해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지금 이응이랑 읽고 있는 또 다른 책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이명의 탄생]에는 페소아의 백 개도 넘은 다른 이름들에 대해 나온다. 나는 비읍을 내 첫 번째 이명의 탄생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가 아니라 수필을 쓰는 비읍. 나.
41p. 우주만큼 다수가 되어라. 54p. 자기 자신을 여러 겹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명의 탄생], 페르난두 페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