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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롬 Jan 02. 2022

가장 좋아하는 동사

극복하라는 주문

극복하다. 국어사전에서 이 동사는 두 가지 뜻을 가진다. '악조건이나 고생 따위를 이겨내다'가 첫 번째 뜻이다. 두 번째 뜻은 '적을 이기어 굴복시키다'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게 삼켰다. 인생에서 가장 크게 넘어졌을 때다. 주변 사람들은 너도 나도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잘 극복해보자. 넌 할 수 있어."


극복하다라는 동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일종의 압박감을 느꼈다. 지금의 고통을 어떻게든 종료시키고 성장해야 한다는, 즉 불행에 빠져있는 지금 이 시기에 '끝'을 보아야만 한다는 의무감이었다. 또, 극복하다의 두 번째 뜻처럼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이 외부의 '적'으로 느껴졌다. 사람들의 눈망울엔 선의와 나를 향한 안쓰러움이 가득했으므로 나는 그 단어가 목에 점점 컥컥 걸리기 시작할 때도 잘 씹어 삼킨 것처럼 웃어 보였다. "그래. 잘 극복해볼게."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깨달았다. 불행은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커플이 탄생하고, 권신징악이 이뤄지는 K-드라마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엉덩이가 끈질긴 한 노년 작가의 대하 소설처럼 끝날듯 끝나지 않으면서 이어졌다. 불행의 가장 큰 불행은 파생된다는 것이다. 내 삶에 생긴 큰 불행으로 내 안의 '나'가 파괴되고, 일상이 뒤틀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에게 지쳐 떠나갔다. 나는 불행이 남긴 길고 짙은 흔적 속에서 '극복'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그리고 수개월이 지나도, 심리 상담을 받아도, 여행을 떠나고, 주변 사람들의 아무리 따뜻한 위로를 받아도 불행과 완전히 이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불행은 제 3자가 아니었다. 불행을 겪으면서 이미 불행은 나의 일부가 된 이후였다. 그때부터 내가 붙든 동사는 '극복하다'가 아니었다. 나는 인간이 세포에 불과할 때부터 배우는 미덕을 다시 떠올렸다. 견디다. 우리는 모두 열달을 견디지 않았는가.


물론 완전히 이별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불행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견디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은 부모가 그럴지 모른다. 남편이 계엄군의 총알에 머리가 뚫려 사망하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본 광주의 여성들이 그럴지 모른다. 난치성 질병과 매일 매일 줄다리기를 하는 환우들이 그렇고, 장애를 몸에 지닌 이들이 그럴 것이다. '완전한 이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 불행을 떠내보낼 순 없어도 불행이 일상을 집어 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매일매일 노력할 것이다. 그 하루하루는 불행에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견디기 위해 눈물을 닦고, 걷고, 청소를 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일을 할 것이다. 그러다 가끔 주저 앉아 울거나 지친 숨을 몰아쉴 수도 있다.


고 김용균 씨와 어머니. 한겨레.


불행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견디느냐가 인간의 결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불행을 견디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사회의 결을 결정한다고도 생각한다. '이제 그만 극복할 때도 되지 않았냐'는 말은, 견디는 삶을 한순간에 무너지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견디다'는 동사를 좋아해야 한다. 견디는 이 곁에서 '이제 그만 극복해라'는 재촉을 참는 시간을 오래 견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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