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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젠가 Mar 06. 2024

사유원. 벼락 맞은 모과나무

아들에게 바치는 편지

기분은 변합니다. 사라집니다. 바람과 같습니다.

작년 5월 사유원을 찾은 건 바람과 같은 나의 기분이 그리고 아들의 기분이 나아지게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라지고 변하는 기분을 좋은 쪽으로 돌리고 마음을 가볍게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대구 근교에 위치한 이 사설 수목원은 굉장히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그리고 공휴일에는 69,000원이라는 굉장히 비싼 입장료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알바로시자나 승효상 같은 유명한 건축가들의 아름다운 조형물과 아름답게 조성된 수목들은 69,000원 이상의 가치를 하고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치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무 보러 가는 수목원 따위에 큰돈을 쓰냐는 남편과 아이들을 설득해서 길을 나섰습니다.

왜 이곳에 가고 싶었냐면 큰아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영리하고 예민하지만 마음속에 상처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애써 담담히 흘려보내지만 어미로서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아들에게 아빠의 존재는 어떤 것일까? 부모의 존재는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중요합니다.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부모는 아이의 우주이고 창입니다. 아빠가 너무나 약한 존재라 엄마인 내가 더 다잡고 더 노력해서 강하게 서면 된다고 여겼지만 큰 아이에게는 나의 이런 다짐과 상관없이 몇 년 전 아빠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고 아빠의 부재를 겪었던 일이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사춘기가 시작되었고 내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아이의 마음에 자리 잡은 아빠에 대한 실망감, 그렇지만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 그것을 극복하며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려고 노력하지만 교육열이 높은 학군지 학교, 사교육이 판치는 이 동네에서 생각보다 결과로 보이게 성적이 오르지 않자 느껴지는 좌절감 뭐 이런 것들이 아이에게는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자신을 잘 모르고 늘 어리둥절 한 사람인 남편 역시 점점 나이는 들고 아이는 커가고 중년이 되도록 자기의 직업과 진로에 대해서 계속 방황하며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고 그 사이에 예민하던 아이는 커가며 지독한 사춘기를 겪습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대놓고 할아버지 혹은 아빠의 경제력과 능력이 뒷받침 돼서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특별한 사교육을 받아온 그룹을 나는 이겨내지 못하겠다. 나의 과학고 입시 실패는 부모 특히 아빠의 무능 탓이라고 하였을 때 나도 남편도 매우 상처받았지만, 나는 아들과 대화를 시도했고 남편은 회피를 시도했습니다. 아들과의 갈등과 역동을 본인이 대화하고 풀 생각보다 일단 본인은 피하고 아이와의 대화를 피하고 도망치며 그런 문제들을 부인인 나에게 토스했습니다.


나는 어떠한 성향의 사람이냐면, 문제를 직면했을 때 이건 내가 해결할 일이 아니다 라며 포기하는 방법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해결해야 할 것 같은 급한 마음이 먼저 늘 앞섭니다. 어쩌면 내 남편이 저렇게까지 회피의 달인이 된 것은  일견 문제가 생기면 내가 먼저 나서서 해결했던 과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하고 애써 이겨내야 하는 것이 성인의 도리이고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런 단단한 자아나 인격은 사실 좋은 교육과 양육환경 속에서 형성될 수 있습니다. 혹은 아주 깊이까지 침전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 경험을 이겨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는 어쩌면  어린 시절 양육 환경이 썩 따뜻하지 못했고 성인이 된 이후는 아주 깊이까지 침전하여 홀로 외롭게 자신을 마주할 시간들이 없는 채로 문제가 생기면 그의  부인이나 그의 엄마가 해결해 주며 그냥 그렇게 중년이 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때는 아빠와 아들의 문제이지만 내가 나서서 해결해야 내 아들이 괴롭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아이가 한참 괴롭고 예민할 때 남편에게 "당신이 대화를 좀 해봐라" 하면 "어차피 나도 그랬다 내버려두면 된다"라고 하는 남편의 모습이 나에겐 또 방관자 같이 보이고 회피자 같이 보여 괴로웠습니다. 지나고 보니 지나면 해결될 일인데 아이가 크면 되는 일인데 아이의 마음그릇이 더 커지면 되는 일인데도요. 작년에 그리 힘들어하던 아들이 올해는 얼마나 성숙해지고 담담해졌는지 돌아보니 그건 저절로 내버려두면 해결된다는 남편의 말이 맞았습니다.


아무튼 작년 봄, 큰 마음을 먹고 두 시간을 운전해서 간 그곳은 

아름답고 고요하고 어디서 머물든 머물러 있기만 해도 치유가 되는 곳이었습니다

수목원은 몇 가지 테마가 있었는데 비탈에 선 모과나무 밭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중 벼락을 맞고 태풍을 이겨냈다는 모과나무. 모과나무는 타들어갔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둔덕에 뿌리내리고 더 깊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그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이. 그 아이가 그렇게 자라나길 빌어봅니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나 역시도  벼락을 맞아도 그 자리에서 죽지 않고 버틸 자신이 있습니다.



"아프지 않고 어른이 된다면 좋겠지만 생은 그런 것이 아니야. 가끔 엄마도 일상이 너무 힘겨울 때가 있어. 그렇지만 너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엄마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혀서 엄마는 흔들리지 않고 그 어떤 일이 닥쳐도 너를 지켜줄 거야. 엄마는 포기하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너는 항상 엄마의 기쁨이고 에너지라 생각한다. 그러니 너도 힘을 내줘 니 뒤에 있는 엄마를 믿고 힘내서 나아가렴"


그때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아들은 그 사유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마음의 정리를 좀 했고 힘을 내서 학업에 정진하고 있습니다.

그때 거기서 보냈던 시간은 나에게도 치유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그 나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습니다.


지난겨울, 혼란과 괴로움의 시간들이 닥쳤습니다.

그 시간의 원인은 늘 그러하듯이 남편이었습니다. 더 이상 그를 버틸 재간이 없다. 내 몸과 마음의 건강이 먼저다 하고 결심하고 그를 단절하려고 결심한 순간, 이제는 조금 행복하고 편안하게, 앞으로만 나아가자고 결심한 순간 가장 먼저 생각나며 나를 사로잡은 존재는 역시 큰아들입니다. 


까맣게 타들어 가더라도 나는 벼락을 이겨낸 모과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수험생, 인생에서 가장 예민하고 중요한 시기의 큰아들이 이제 겨우 조금 안정을 찾고 자신의 미래에 집중하고 나아가려는데 그 아이에게 다시 혼란과 불안을 줄 수 없습니다. 

벼락을 이겨낸 모과나무로 염주를 만들면 그것이 그렇게 특별하고 가치 있다고 합니다. 

비록 나 자신으로 어떤 염주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인생 위기를 이겨낼 것입니다. 견뎌낼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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