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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젠가 Mar 06. 2024

누구나 가슴에 이혼소장 하나는 품고 살지 않습니까?

숨 막혔지만 그 또한 지나갔습니다.

지난겨울 숨 막히게 괴롭다는 경험을 했다.

글을 쓸 수도 없었다. 읽기와 쓰기는 늘 나에게 위로가 되었는데

너무나 힘겨운 상황을 겪다 보니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고 귀찮았다. 

걱정과 불안이 잠식해 불면의 날들을 보냈다.


겨울을 보내고 나는  이혼을 결심했다. 

남편과 시가 때문에 수없는 괴로움과 모욕을 겪는 동안 했던 결심과는 이번엔 차원이 달랐다.

시모에게 언어폭력과 가스라이팅을 당하기도 했고 나 몰래  남편이 집값의 80프로를 대출받아 집이 넘어갈뻔한 적도 있었으며 그걸 들키자 도망쳐버린 남편을 일으켜 세우고 엉망이 된 상황을 다 정리하고 견디고 참아 냈지만 쓰디쓴 결론은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기대를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다. 어차피 나는 혼자다.라는 결론이었다.


지난해부터 이 가게가 마지막이다. 제발 이번만은 스스로 일어서라 하고 부탁하고 사정했지만 남편은 또 폐업을 했다. 20여 년의 결혼생활 중 총 4번의 개업과 폐업. 이번엔 게다가 자리를 옮겨 새롭게 같은 업종을 오픈하면서 친정 식구들에게 손 벌려 달라, 그걸 못할 것 같으면 집을 팔아서 전세를 가고 사업자금을 대 달라며 나를 괴롭혔다. 

어떻게 지켜낸 집인데. 이미 그가 한번 다 털어서 넘어갈 뻔한 이 집을 내가 어떻게 지켜냈는데, 그동안 대출 갚느라 허덕이며 살다 이제야 한숨 좀 돌리려는데 또?

그에게 집도 친정도움도 안 된다고 알아서 하라고 단호하게 나가자 

그는 또 집을 나갔다. 

그의 부재중에도 아이들의 일상을 유지시키고 나의 불안감이 전염되지 않게 내 애들은 편안하고 무탈한 일상을 살게 해 주려고 애썼다. 나마저 무기력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더욱더 몸을 움직였다. 매일 청소를 하고 부엌 세간을 꺼내서 정리했다. 그릇들을 반짝이게 닦아댔다. 그리고 건강 검진 중  갑상선 암일지도 모르니 조직 검사를 하라는 결과를 받아 들었다. 


그 사이 남편은 나와 상의도 없이 계획도 없이 무작정 새 가게 자리를 계약해 버리고는 나에게 통보했다. 또 그동안처럼 일단 저지르면 마누라가 어떻게든 해결하겠지 하는 마음이었던 건지 나는 모른다. 그리고는 내 카드로 카드론과 리볼빙을 끌어다 쓰며 폐업하는 가게에 밀린 대금들을 결제해 버렸다. 


나는 상상도 못 할 카드 청구서와 내가 암일 수도 있다는 통지를 받게 됐고 그 이후 조직검사 스케줄 잡기,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명의를 알아보고 수술병원 물색 같은 불확실하고 무서운 일들을 헤쳐나가야 했다. 



답답하고 좌절스러웠다.

하지만 살아야 하기에 그에게 내가 큰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 카드 대금이 밀려서 카드결제가 안되게 되면 안되니 일단 내 카드 대금부터 해결하게 내 카드로 쓴 카드론부터 해결하라는 카톡을 보냈다.

그는 결혼 이후 자기 한 몸 일으키기도 늘 힘겨워했기에 일상과 육아와 가정경제에 기여도가 낮은 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이해했다. 배우자로서 파트너로서 육아,교육, 살림, 경제 부분에서는 내가 더 힘쓰면 된다 여겼다.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그건 다 받아들였다. 애들의 아빠니까 그가 부족한 부분은 내가 노력하면 되겠지 하며 남들보다 더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한 번은 스스로 일어서서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해 지길 간절히 바랐다. 이렇게 그의 옆에서 참아내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아주기를, 그러니 그도 힘을 내서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단단해지고 성숙해 지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일과 결혼생활과 살림과 육아의 과정들을 다 감내하며, 지독한 시집살이를 견뎌내며 그를 버리지 않고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걸 그가 알아주길 바랐다. 


그 과정들이 너무 힘들었지만 그는 내가 선택한 파트너. 남편에게 의리와 로열티를 보이는 것은, 의미 있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의 기본이라고 여겼기에 참고 견뎌오고 기다려왔다.


그런데 그는 내 노력들을, 내가 바친 충성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값어치 없이 내쳤다. 내가 아플 때 이렇게까지외면당할 줄을 몰랐다. 

그동안 그가 일상의 기여가 낮았던 것은 지연 만족을 배우지 못하고 유아기를 보내게 한 시부모님의 양육환경을 통해 만들어진 인격탓이라 여기고 일견 애처롭게 여겼다. 나는 그와 시부모 사이의 역동을 겪어왔고 시모의 성향과 시부의 성향을 알기에 그를 불쌍히 여겼었다. 그래서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야 하는 사람, 성질이 급해서 화가 많고 참을성이 없는 것, 그래서 자기 화에 못 이겨서 늘 사람과의 관계나 사업상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 같은 인격적인 결함은 내가 감내하고 노력해서 메꿔주면 된다 여겼다. 그런데 내가 아플 때 내가 벼랑 끝에 몰렸을 때 나를 외면해 버리고 도망쳐 버릴 줄을 상상도 못 했다. 



문제는 이 과정들을 오롯이 내가 다 겪고 오롯이 내가 다 해결해야 한다는 것.


아이들의 아빠, 한때는 사랑했던 사람. 전생의 기억일까 싶을 정도로 먼 과거엔 다정했던 사람.

그는 결혼 이후 많은 시도는 했지만 뭐 딱 하나 진득하게 버텨내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늘 끝까지 견디고 파고들지 못하는 성향이나 쉽게 시작하고 쉽게 포기하는 급한 성격 같은 자신이 결국 감내하고 바꿔가야 하는 성격과 성향의 문제들을  처자식을 위해서, 여기서 접고 포기해야 한다는 말 뒤로 숨었다. 그가 어지러 놓은 상황을 수습하고 견디는 건 늘 나의 몫이었다.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시부모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고 지속적인 실패를 맛보다 보니 그럴 수 있지. 그가 밉지만 그는 내 삶의 중요한 존재이니 그를 믿고 지지하고 응원하자고 늘 결심했던 건 그나마 그가 다정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에게는 과거의 다정함도 남아있지 않고 거칠고 불안한 인격만 남았다.


그래도 그가 나에게 했던 것들을 잊고 흘려보내기로 했다. 애들의 아빠니 그도 한 번은, 저렇게 뭣이 중한지도 모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애를 쓰는데 그래도 한 번은 그도 그가 늘 바라는 데로 많은 돈을 벌어 떵떵거리고 큰소리치며 살아보길 빈다. 자기가 돈을 많이 벌면 꼭 나에게 돈다발을 가져다준다 늘 큰소리쳤는데 제발 성공하길 빈다.

하지만 그 성공의 끝에 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결국 나를 잃었다.


지난 두 달 동안 아무튼 나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견뎠다. 차례대로 중요한 일들부터 처리했다. 

예물과 아이의 돌반지까지 팔아서 남편이 마구잡이로 결제했던 카드값들을 정리했고(다행히 금값이 많이 올랐다.)

그리고 다른 소견을 알아보기 위해 의사들을 찾아갔다. 의협과 정부의 갈등상황에 서울의 빅 5 병원의 명의들에게 초진을 받을 엄두도 못 내는 상황, 막상 암이라 해도 서울로 올라가서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최악의 결과가 아니길 바라며. 

다행히 친한 후배가 연결해 준 분에게 초음파를 볼 수 있었는데 그분의 소견상 처음에 들었던 것처럼 날벼락같은 진단이 아닌 낙관적인 소견을 들었다. 


고립무원이라고 여겼지만 순간순간 위로가 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의사를 소개해줘서 다른 소견을 얻게 해 준 후배는 순간순간 나를 걱정하며 내 일상을 챙겼고, 함께 병원에 가주었다. 전 직장 동료였던 요방비둘기는 돌쟁이 아기와 손을 맞잡고 기도를 해주었다. 친정언니의 염려, 지인들의 응원과 걱정과 위로를 통해 그래도 외로움과 불안이 조금씩 잡혀갔다. 

나에게 숫타니 파타의 구절을 알려주며 무소의 뿔처럼 가라고 응원해 주시던 교장 선생님은 이번에는 너는 너무나 곱고 아름다운 사람이고, 너의 인생이 너무 귀하고 소중하기에 , 한 번뿐인 삶, 괴로움이 크다면 이번엔 이겨낼 생각보다 피해도 된다, 이혼을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존중받을 만한 개인의 선택이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2일 뒤에 조직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간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이제는 마음의 갈등과 불안이 사라진 상황이다. 아마도 양성종일 것이다. 악성이라 해도 수술을 하면 되는 것이다. 

갑상선을 절제하는 것과 남편을 절제하는 것 뭐가 더 고통스러울까? 내 인생의 진짜 암은 무엇일까?


뿌리내리지 못하는 남자와 결혼해 일상을 지켜내고 제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에 회의가 들때도 늘 나를 지탱했던건 자식과 내가 꾸린 가정, 내가 하는 살림, 내 자리를 지키며 홈 스위트 홈을 꾸린다는 자부심. 그런데 그게 나에겐 어쩌면 약이 아니라 독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때. 어쩌면 지금 가슴에 품었던 그 소장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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