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 1-1. 응급실 앞에서 ABCD(2)
옥토넛.
수술실 앞에서 엄마와 떨어지기 무서워 엄마 옷을 꼭 잡은 채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이제 막 6살이 된 아이를 위해 내가 떠올린 것은 옥토넛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하소연을 해서라도 고함을 쳐서라도 수술실에 함께 가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된다는 걸 이성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아이를 수술실로 들여보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동영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기 아이는 옥토넛, 슈퍼윙스를 무척 잘 보았는데 아이를 데리러 온 (아마도) 의사 선생님께 영상을 틀어달라고 부탁드렸고, 핸드폰에서 '바다 탐험대 옥토넛!' 소리가 들리자마자 지금 상황을 잊기라도 한 듯 아이는 홀린 듯이 선생님 두 분과 함께 수술실로 걸어 들어갔다. 수술실 입구문에 자그맣게 창문이 두 개 나있다. 태어나서 지금껏 또래보다 많이 작아 큰 네 살로도 보이는 여섯 살 내 아이가 핸드폰을 들고 사라지는 뒷모습이 보였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에 수술모자를 쓰고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멀어지는 모습을 보다 무너져버렸다. 그야말로 눈물이 터져서 멈추질 않는 것이었다. 아이 앞에서는 들어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라고 푹 자고 이따 만나자고 웃어놓고는 사실은 처음 겪는 일에 나는 무척이나 두렵고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차라리 자식 대신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고 하는 부모의 말은 나에게만큼은 나 스스로가 증명한 명제가 되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도 아이가 사라지는 그 모습을 끝까지 보고 싶었는데 수술실 앞에 서있지 말라는 병원 관계자의 말에 서둘러 자리를 옮겨야 했다. 나에게만 슬픈 일이지 관계자들은 늘 있는 일이기에 이해를 했지만 잠시도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 조금은 야속했더랬다. 그래도 시키는 건 잘한다. 바로 자리를 옮겼다.
TV 화면 수술 중인 명단에 아이의 이름이 떴고 두 시간 안에 수술이 끝나고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아이의 새근대는 숨소리를 듣고 위아래로 천천히 오르내리는 가슴을 보면서 많이도 울었다. 다 끝났다고 안심이 되면서도 이런 힘든 일을 겪게 한 것이 내 잘못 같고 나 때문인 것 같다는 엄마로서의 죄책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윽고 아이가 눈을 떴고 아이는 여기가 어딘지 물었다. 수술 잘 끝났고 잠에서 깨면 집에 가자고 밝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사실 아이가 받은 것은 어른이라면 수면마취 없이도 받는 시술이라고 하셨기에 시술이 끝난 후에는 귀가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환부라고 해야 할까? 혹처럼 볼록하게 올라왔었던 림프절이 점점 줄어드는 게 시간이 흐를수록 확연하게 느껴졌다. 시술 후 몇 차례의 검진을 받았고 그때마다 잘 줄어들고 있다고 하셨다. 정기 검진은 6개월에서 1년으로 주기가 길어졌고, 1년 후에 교수님을 찾아뵙던 날 깨끗하게 잘 치료가 되었다며 이제 검진하러 오지 않아도 된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을 드리고 너무도 가볍게 진료실 문을 열고 나와 집으로 향했었다. 그렇게 20년, 21년을 보냈다. 자꾸 잊었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것에 있어 건강한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주지하고 살려고 애썼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23년 4월이 다 끝나가는 시점에 아이의 오른쪽 목 림프절이 부어오른 것이다. 평생을 살며 재발하거나 아니거나 5:5의 확률이라던 이 질환이 다시 시작된 것일까? 혼란한 마음을 다잡고 내가 생각하는 질환이 아닐 수도 있다, 그 병이 맞다고 하더라도 당장 대학병원 진료 예약부터 하는 게 순서다라는 생각에 아이를 일단 학교에 보냈다. 등교 전에 학교 가서 혹시 열이 난다거나 힘들거나 하는 등 평소와 컨디션이 다른 것 같으면 선생님께 말씀드려 엄마에게 전화를 하라고 신신당부했고, 선생님께는 메시지를 남겨 아이의 현재 상황과 혹시 컨디션이 난조라면 전화를 주실 것을 요청드렸다. 그렇게 아이를 학교에 들여보내고 평소와 같이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제법 이성적으로 대처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대학 병원 예약 접수하고 지금 집에 없는 애 아빠에게 현 상황을 알리고 하교하면 일단 소아과를 가봐야겠다 이렇게 앞으로의 일도 머릿속으로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람이 한적한 대로변을 걷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종교가 없는 내가 하느님을 찾았다. 하느님 왜 우리 아이에게만 자꾸 이러세요, 배려심 많고 양보 잘하고 하지만 자신의 의견도 잘 피력하고 동생을 잘 챙기는 따뜻한 마음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우리 아이에게 왜 이러시나요. 우리 아이가 지금껏 살면서 대체 무슨 잘못을 했나요? 눈물을 참으려고 생각을 멈추었다. 눈물이 멈췄다. 다행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행인들이 있었다.
아무 문제없는 척 집으로 들어와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해나갔다. 인간의 경험치라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것이다. 두 번째 겪는 일이라 그런지 감정을 빠르게 수습할 수 있었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좀 더 수월했다. 그러다 오후에 담임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아이가 미열이 있다고 했다. 빠르게 아이를 하교시키고 내가 사는 이곳에 정착한 이후로 줄곧 다니는 소아청소년과로 부리나케 갔다(내가 참 좋아하고 신뢰하는 선생님이시다. 조심스럽지만 공개하자면 수앤정 소아청소년과 제2진료실 이정아 선생님이시다. 이번 일을 겪으며 더 감사하고 더 큰 신뢰를 쌓았다.). 요즘 소아과에 환자가 많다더니 과연 그랬다. 대기하는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애써 그 마음을 억누르며 아이를 옆에 앉히고 괜스레 장난을 쳤다. 나의 긴장으로 인해 네가 긴장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생각 외로 아이는 덤덤한데, 나쁘게 말하면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사실 아이도 긴장을 했을 거였다. 아침에 임파선이 부었다는 것을 인지한 후 아이는 카라티의 카라를 한껏 세워 올렸다. 카라를 접으라고 했지만 그냥 이렇게 갈래라고 말하는 아이를 보며 눈물이 나오려는 걸 또 꾹 참았었다. 내가 생각하는 침착하고 차분한 멋진 어른에 나도 조금 근접해 가는 걸까? 여하 간에 긴장 완화를 위해 아이 손도 잡고 장난도 치면서 순서를 계속 기다렸다.
드디어 우리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