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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시적관점 May 06. 2023

사는 이야기 - 1-1. 응급실 앞에서 ABCD(3)

이렇게 길게 쓸 줄 몰랐던 응급실 가는 이야기

 그러니까 4월 28일 금요일에 자주 가는 소아과에서 두 시간 가까이 기다린 끝에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 아이를 오랜 시간 동안 보셨던 선생님이시라서 이미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재확인시켜드리고자 림프절 비대로 인해 치료를 받았었는데 이번에 림프절이 또 혹처럼 부풀어 올라 걱정이 된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찬찬히 보시고 손으로 직접 짚어가시며 진찰하셨고 소견상으로 림프관종 같지는 않다고 하시며 임파선염 같으니 항생제를 먹으며 지켜보자고 하셨다. 긴장한 상태에서도 차분하려 애썼던 내가 드디어 자연스레 안도의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와 약을 처방받고 주말을 신나게 보낼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고 질병은 한 가족의 주말을 그리 쉽게 행복하게 두지 않는다. 아이가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금요일 저녁에는 38.5도를 찍었고 토요일 밤에는 39도를 오르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각하여 아이에게 해열제를 먹이며 관찰을 했다.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 아이는 온몸에 열꽃이 피어있었다. 해열제 먹고 열이 내리겠거니 쉽게 판단한 대가였으리라. 팔, 다리는 물론이고 배와 등 심지어 엉덩이에까지 열꽃이 피어있었다. 게다가 고열인데도 불구하고 손, 발은 지나치게 뜨겁고 빨갛게 퉁퉁 부어올랐으며 아이는 가려운지 계속 긁어댔다. 경험상 내 아이는 고열에 시달리면 손, 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진다. 그런데 경험하지 못했던 아이의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임파선은 그전보다 훨씬 더 두드러지게 그리고 더 넓은 부위에서 커졌다.  

 일요일이었지만 해당 병원은 해당일 오후 1시까지 진료를 하였기에 고민하다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기로 했다. 아이를 마주한 선생님의 표정이 매우 심각해지셨다. 아이에게 목이 아프냐고 물어보셨지만 목은 안 아프다는 말씀에 고심이 깊어진 얼굴이었다. 


"어머님, 제가 헷갈리는데 두 질환이 워낙 유사한 양상을 보여서요.. 지금 00의 증세가 성홍열 아니면 가와사키 같아요. 어머님 가와사키 들어보셨죠? 성홍열이라면 목이 아파야 하고 항생제를 먹었을 때 조금이라도 증상이 완화되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아니거든요. 가와사키일 것 같으니 큰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겠어요."


 가와사키..? 아주 옛날에 언뜻 읽고 넘어가서 이름만 좀 알고 자세히는 모르는 병명을 말씀하셨다. 림프절 비대가 아니라 좋아했던 그 며칠은 너구리가 물속에 넣어버린 솜사탕처럼 녹아 없어졌고, 애아빠와 나, 아이와 둘째는 다급히 소아청소년과를 나왔다. 


 의뢰서를 받아 들고 선생님께서 권고하신 큰 병원 응급실로 가게 되었다. 일요일인데도 대기 환자가 많았다. 119 구급차는 송파, 서초 등 다양한 곳에서부터 이곳으로 계속 드나들었다. 평소 교통수단을 좋아하는 우리 아이는 열이 나는데도 구급차를 따라 시선을 옮겨 다녔다. 그것도 잠시 뿐 아이는 고열과 가려움, 끝날 줄 모르는 기다림에 차츰 지쳐갔다.

  그때 떠오른 것이 'ABCD'였다. 이걸 요즘 청소년들도 할는지 모르겠다. 손을 사용하는 게임(?)이다. 'A'는 기도하듯 두 손바닥을 마주 보게 붙이는 거다. 'B'는 'A' 손을 옆으로 눕힌 후에 윗 손만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트는 모양이다. 'C'는 'A'에서 손바닥이 보이게 두 손을 떼어 보이는 것이고, 'D'는 반대로 손등이 보이게 두 손을 떼어 보이는 것이다. 나와 남편의 고향이 다른데 둘 다 알고 있는 게임인 걸 보면 우리 나이 대 분들은 아마 다 아시지 않을까 싶다. 두 아이에게 게임 방식과 손모양을 설명한 후에 게임을 시작했다. 첫째가 8살, 둘째가 6살이 되면서 이런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새삼 감격스러웠다. 여하간 그때부터 응급실 앞에서 알파벳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아이도 제법 기운을 차리고 참여했다.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위로가 되었다. 

 나는 삶을 사는 데 있어 위기가 닥치거나 어려움이 생기면 그것에 침잠하여 바깥으로 나오는 데 참 시간이 많이 걸렸었다. 감정에 그대로 휘말려 버리고 대안이나 방법을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물며 기운을 내는 것이야 말해 뭐 할까? 그런데 남편을 만나고 나서 그것이 참 성숙하지 못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이성적이고 혼란한 상황에서도 대안을 모색하고 방법을 구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살게 된 나는 조금씩 성숙한 사람으로 발전해 나가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랬었기 때문일까? 아이에게 이 아픈 순간에도 행복한 순간이 올 수 있다는 위로와 격려를 해주고 싶었다. 그게 남들 보기에는 철없어 보이는 응급실 앞 가족 간의 게임일지라도. 그리고 아이에게는 그게 제법 효력을 발휘했는지 이후 아이는 진료를 보러 가기까지 컨디션이 그나마 괜찮아진 것 같았다. 적절한 시기에 응급실에서 먹은 해열제 덕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크지만 나의 노력도 어느 정도는 뒤섞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이야, 언젠가 삶을 살면서 참 힘들고 슬프고 지치는 괴로운 일들이 생길 거란다. 그럴 때 네가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네가 힘들고 지쳤던 8살의 봄날, 햇볕이 따스해 역설적이었던 응급실 앞에서 아빠와 엄마, 너와 동생이 의자에 옹기종기 앉아 신나게 했던 'ABCD'를. 힘든 네 곁에서 언제나 그랬듯 함께한 그리고 함께 할 가족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음 짓고 힘든 일, 서러운 일 잠시 잊어내고 결국에는 당당히 맞서고 이겨낼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 


위의 단 다섯 줄을 쓰고 싶어서 이렇게나 길게 무려 3편으로 나누어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참말이지, 말만 많은 게 아니었다. 글도 겁나... 길다 ㅠㅠ  



번외. 우리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호옥시나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남깁니다. 


그 이후 응급실에 들어가 아이가 가와사키 의심된다는 의뢰서를 드렸지만, 가와사키는 고열이 5일 이상 지속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며 당일에 임파절염으로 판단하고 우리를 퇴원 처리시켰다. 

 그렇게 아주 찜찜하게 결국 가와사키일 것 같은데 그 5일을 채우고자 군말 않고 집으로 가게 된 아이는 꼬박 이틀을 더 앓고 다시 응급실에 방문한 끝에야 가와사키와 유사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어린 여자 아이에게서 좀 더 자주 보인다는 가와사키병을 8살 아들이 겪게 되었다. ㅎㅎ.... ㅎㅎㅎㅎ... 오늘 그러니까 5월 5일에 아이는 어린이날을 기념으로 퇴원을 할 수 있었다. 가와사키병에 대해서는 언젠가 한 번 글로 설명하고자 한다. 일단 꼭 유념할 것은 고열 발생 5일이 되지 않으면 진단을 해주지 않으니 아픈 아이 보며 힘드시겠지만.. 꼭 5일째에 병원을 가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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