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콜로라도 서쪽 마을 이야기
올봄 동네 수제 맥줏집에서 열리는 작은 장터에 몇 번 참여했다.
가게의 야외 공간에서 열리는 장터인데, 가게 주인은 자릿세를 받지 않을뿐더러, 장사꾼들에게 공짜 맥주 한 잔씩 돌리는 여유까지 보인다. 발효 빵이나 수제 버터, 핫소스, 절임 채소, 말린 과일, 디저트, 프레첼, 직접 기른 버섯, 수공예품 등을 파는 동네 장사꾼들이 모인다. 그러니 일요일 낮 게으름 좀 피우려던 사람들도 겸사겸사 맥줏집으로 나선다.
밥 할아버지는 그때 처음으로 우리 김치를 맛보았다. 이쑤시개로 배추를 찍어 입에 넣더니, 와우, 하고 눈을 끔벅였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한국인이죠?
보통 이런 질문은 실례가 될 수 있지만, 김치 팔 때는 예외다.
맞아요!
그러곤 내가 생글거리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와, 이 김치 맛 끝내주는데! 이거 어머니 비법인가요?
많은 손님이 하는 질문이다.
“혹시 어머니만의 비법으로 만든 김치예요?”
그럼 나는 당연하죠, 하고 대답하지만, 곧 켕기는 게 있어 이렇게 덧붙인다.
아, 젓갈은 빼고요.
우리 김치는 보통 한국 김치와 조금 다르다. 젓갈과 찹쌀풀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젓갈은 우리가 먹지 않아서 안 넣는다. 내가 먹지 않는 음식을 남에게 권하고 싶진 않다. 그래서 파는 김치도 젓갈 빼고 소금만 쓴다.
장사 첫해에는 찹쌀풀을 쒔다. 풀은 발효를 돕고 김칫국도 진하게 만든다. 그런데 장사하다 보니 쌀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사과나 배, 마늘, 무 알레르기도 있다고!
채소나 과일은 차마 포기 못 하겠고, 쌀풀을 빼보기로 했다. 풀을 넣지 않으면 발효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긴 하지만, 맛은 여전히 청량하고 아삭하니 좋았다. 사실 풀 만드는 데 드는 재료와 노동, 시간 절약은 장사꾼에게 이점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김치는 젓갈과 쌀풀 빠진 김치가 되었다. 게다가 간편한 걸 좋아하는 현지인 취향에 맞춰 배추를 작게 썰고, 병에 나눠 담아 발효한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엄마 김치와 꽤 다르다. 결국, 나는 손님들에게 뻔뻔하게 거짓말하고 있는 셈이다.
항변하자면, 김치의 기본은 엄마에게 배웠다.
김치 만드는 법은 엄마에게 배웠다. 다 크고 결혼해서 엄마가 이제 배워야지, 하고 가르쳐준 건 아니다. 어릴 때 엄마가 김치 담글 때면 싫건 좋건 나는 항상 엄마 곁에 있었다. 장 보고 채소 다듬고 씻기까지, 제일 힘든 일은 엄마가 다 했다. 특히 김장철에는 손 시리다며 채소 씻는 건 잘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찹쌀풀 만드는 건 언제나 내 일이었다. 풀이 냄비 바닥에 눌어붙지 않게 주걱으로 젓는 일은 깨 볶는 것만큼 지루했다.
(중략)
양념이 고루 섞이고 엄마 손이 벌겋게 물들면 침이 꼴깍 넘어가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그럼 엄마는 노란 배추 속잎을 떼어 붉은 양념을 올리고 돌돌 말아서 내 입에 넣어준다. 그리고 꼭 묻는다. “맛이 어떠냐? 너무 싱겁지 않냐? 적당히 짜야 나중에 간이 고루 배는데.” 그리곤 김치를 익히다가 싱겁다고 소금을 치면 맛이 쓰니 필요하면 젓갈을 쓰라는 말씀을 빼놓지 않았다.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141쪽
그래서 엄마는 우리가 김치 파는 이야기를 재밌게 들어주신다. 장사를 마친 일요일 오후면 오늘은 얼마만큼 팔았는지 궁금해하시며 연락을 기다린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엄마가 제일 재미있어한다. 미국인들이 마늘 냄새 풍기는 김치 맛을 보고 싶어 하고, 그 김치를 사러 다시 오는 사실에 신기해한다. 그러곤 젓갈과 찹쌀풀을 안 쑤고 어찌 김치 맛이 나냐고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가 하면, 행여 자식 몸이 상할까 걱정스러운 말을 늘어놓는다.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140쪽
엄마 우려와 달리 많은 이가 우리 김치를 좋아한다. 김치 속에는 젖산균이 많아서 몸에 좋은 음식이라고 알고 다가오니, 따로 김치를 홍보할 필요도 없다. 사람들은 시식 기회를 고맙게 여기고 아삭하고 신선한 맛에 놀라워한다. 물론 세상일이 그렇듯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순 없다. 그래도 밥 할아버지가 우리 편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첫 만남 뒤 할아버지는 2주에 한 번 4.5리터씩 김치를 산다. 두 달마다 2리터 정도 사던 스티브 아저씨를 가뿐히 제치고, 밥 할아버지는 제일 큰 고객이 되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 많은 김치를 어떻게 드시는 거예요? 무슨 음식이랑 드세요?
별것 없지. 대개 그냥 먹어.
김치만요?
응, 난 고기 안 먹어. 밀가루도 안 먹고.
그럼 쌀밥은요?
뭐, 가끔? 난 퀴노아 정말 좋아해. 감자도 있잖아? 그리고 양배추랑 열무도 좋아해서 올해 텃밭에 좀 키워보려고.
고기랑 빵, 국수도 안 드시는데, 밥까지 잘 안 먹는다니. 아무래도 할아버지에게 김치는 주식이 된 모양이다.
대량으로 사는데 큰 할인은 못 해준다. 언젠가 할아버지는 백몇 불인가를 건네면서 말씀하셨다.
그거 알아? 나 지금 내가 처음으로 산 차보다 더 큰돈 내고 있다는 거?
그런 말씀 안 하셔도 왠지 미안하다. 물론 치른 돈의 대가로 할아버지는 두 손에 들 수 없는 양의 김치를 가져가신다. 사람을 부리지 못할 작은 사업이고, 김치 만드는 날엔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기도 한다. 그런데 난 그 고생을 금세 잊는다. 할아버지에게 맞아요, 좀 비싸죠, 하고 맞장구치곤 작은 병 하나를 더 얹어드린다. 아무래도 영민한 장사꾼은 못되겠다.
사지 않으면 요리할 수 없고
보이지 않아 먹지 않다 보면
먹고 싶은데 참는 일도 없다
그렇게 우리 부엌에서 고기를 놓아주었다
Flexible + Vegetarian = Flexitarian
완벽하지 않다고 포기하기엔 너무 소중한 채식 이야기,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훑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