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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열 Jul 15. 2018

저 재수할게요

진짜 나로 사는 길


“저 재수할게요.”


 고3 수험기간의 시작인 3월, 어머니께 드린 말씀이다. 왜 시작부터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재수를 결심했음에도 학교에서는 다른 친구들처럼 수업을 들어야 했다. 시간이 무척 더디게 흘렀다. 하루종일 시계 바늘만 힐끗힐끗 보는 것도 나름 고된 일이었고 방과 후에는 녹초가 되었다. 그 상태로 다시 책을 펴는게 죽을만큼 싫었다. PC방과 집을 오가며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 매달렸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수험생이라는 것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불리는 시기를 흘려보내고 있다는 사실도 잊을 수 있었다.   


게임이 항상 재미있던 건 아니었다. 가끔 지겨울 때도 있었고, 계속 게임에서 지기만 할 때면 열불이 터지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끈질기게 게임에 매달리는 것 외엔 다른 할 일도 딱히 없었다. 게임을 종료한 뒤엔 그 짧은 시간동안 일시정지해 둔 스트레스가 해일처럼 덮쳐왔다. '난 왜 이럴까?' 라는 자괴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잠이었다. 하루에 꼬박꼬박 8시간씩 자면서 이 생활패턴을 유지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부모님도 공부라는 단어를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다.  



 수능시험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어머니는 작게 한숨을 쉬실 뿐, 별 말씀 없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물렁한 복숭아를 내 앞에 놓아두셨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나올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다음 날이 수능이라서가 아니라, 모니터 안에 펼쳐진 전장에서 흘러나오는 긴장감에 온 정신이 휘말려 있을 뿐이었다.   


 수능 결과가 나왔다. 평소 모의고사에서 받던 점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럼 그렇지. 다른 친구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여기저기서 절규 비슷한 외침이 들리기도 했다. 대부분 점수가 큰 폭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모의고사와 비교했을 때 50점에서 많게는 80점 넘게 떨어진 친구도 있었다. 이에 비하면 난 평소 실력에 비해 무척 과분한 결과를 얻은 것이었다. 재수를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급하게 수능 배치표를 보며 성적에 맞춰 학교와 학과를 골랐고, 합격 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하늘을 날아갈 듯 기뻤다. 남들처럼 노력하지 않아도 평생 운이 따를것만 같았다.  



 "대학에 가면 원 없이 놀아도 돼.”   

 고등학생 때 귀가 따갑게 들어온 말이다. 그 말을 내 대학생활의 모토로 삼기로 했다. 매일을 술에 절어 살았다. 시험 기간엔 금은동메달을 우수수 땄다. 백지 시험지를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제출했다는 뜻이다. 1학년을 마치니 학사경고 2회라는 웃픈 훈장이 가슴에 달렸다.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었음에도 화학공학이라는 전공은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고 생각했다.   


 길게도 깊게도 고민하지 않고 1학년을 통째로 재수강했다. 성적을 새로고침한 뒤 컴퓨터공학과로 전과를 신청했다. 2박3일의 동아리 MT를마치고, 충혈된 눈과 술냄새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하게 전과 면접장에 들어갔다. 사전준비는 전무했고 당락은 매우 기초적인 질문에서 갈렸다. 내가 제대로 다룰줄 아는 프로그래밍 언어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불합격이었다. 대충 살아도 항상 행운이 따를거라 믿던 그 자신감이 처음으로 꺾였다. 하지만 이는 본격적으로 내리막길에 접어들기 전, 가벼운 몸풀기에 불과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공부에 의미를 두지 못한 학창시절이었다. 삼각함수를, 발해의 역사를, 스피노자의 철학을 배우는 것이 대체 내 인생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세상은 이 모든 것들을 알아야 대학교에 갈 수 있는거라고 말했다. 대학은 왜 가야 하냐는 질문엔 더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란 대답이 늘 따라다녔다. 그런 의미에서 고3은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다. 대학과 전공을 선택함으로써 어떤 분야와 환경에서 일하는 직장인이 될지 판가름난다니 말이다.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내 삶의 방향을 공부와 병행하며 1년 내로 결정해야 했다. 무척이나 버겁게 느껴졌다. 내가 뭘 잘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으니 불안하기만 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재수를 핑계로 그 결정의 순간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선택도 하지 않은 채 애매한 위치에서 계속 남아있고 싶었다.  


 노력보다는 운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결단이 필요한 순간에도 미루기만 하는 성향은 결국,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이기도 했다. 이 태도가 이후 내 삶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단순히 잘 맞지 않는 과를 선택하고, 전과 기회를 놓쳤기 때문만이 아니다. 훗날 인간관계, 직장을 선택할 때, 업무 스타일 등 모든 일상 생활에 <회피> 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상황이 자연스레 문제를 해결해주기만을 기다리다가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떠밀려 가기 일쑤였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내가 노력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운이 없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기도 했다.  


"저 재수할게요.” 라고 말한 뒤 16년이 지나서야 깨닫는다. 나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면 단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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