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막 엔딩, 청춘을 도려내다
‘출사표(出師表)’
제갈공명이 위나라를 토벌하러 떠날 때 군대를 일으키며 임금에게 올린 글을 의미하는 출사표. 현재는 중요한 일을 앞둔 자신의 심경과 의지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된다.
굵은 삶을 위해 몸과 마음이 굶는 삶이 계속됐고, 내일에 빠져 내 일을 보지 못했다. 특히 차세대 미디어를 이끈다며 내 화단을 침범한 사람들은 곳곳에 내가 가꿔놓은 꽃과 나무들을 밟고 뽑으면서 이미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시든 꽃과 나무를 화단에 심기 시작했다.
‘질보다 양’, 그것도 일회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을 담은 많은 양의 글을 생산해야 하는 난 조직 속의 부품으로 전락했고, 그들이 동전을 넣으면 글을 뱉는 인간 자동판매기가 되어버렸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들은 뒤 글로 옮겨서 알리는 직업인데, 사람이 무서워졌다. 사람에 대한 회의가 생겼다. 우리네 인생사가 다 그렇겠지만 내가 몸담은 분야에서 사람에 대한 회의감은 유독 심했고, 사람에 대한 불신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비정상인들의 나라에선 정상인이 비정상인 취급을 받는다. 이 괴랄한 상황을 좌시할 수만은 없어 스스로 책도 읽고 강의도 들으며 스스로를 업그레이드 시키려 노력했다. 양질의 기사들이 좋아 유료회원으로 가입한 어느 매체의 강연회를 갔었는데, 그곳에서 방탄소년단의 성공 요인 심층 분석 기사를 작성했던 한 기자는 그 하나의 기사를 쓰기 위해 무려 2,000여건이 넘는 기사를 검색하고 일일이 다 읽어봤다고 했다. 그리고 그 2,000여개의 기사 중엔 실시간 검색어를 통해 조회수를 올리려는 우리의 낚시성 기사, 인스턴트 정크푸드같은 기사도 있었을 것이다.
순간 내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러워졌다. 남과 비교를 잘 하지 않고, 남을 의식하지 않는 나지만 그 날 그 순간 만큼은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같은 ‘기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데, 한 사람은 양질의 기사와 강의로 강단 위에 서있고, 난 쓰레기 같은 기사를 쓰는 기레기가 되어 강단 위의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고 나서야 인생 전반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어느새 16년차, 처음엔 ‘강한자가 오래 버티는 게 아니라, 오래 버티는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을 믿었다. 하지만 그 말은 적어도 내겐 틀린 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동기들, 선후배들을 살펴보니 남아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을 진작 간파하고 업계를 떠나 전직하거나, 그나마 좀 더 나은 직장으로 이직하거나, 새 꿈을 찾아 떠났다. 난 오래 버틴 게 아니라 도태되었던 것이다.
설상가상 몸까지 말을 듣지 않았다. 심장에 통증이 느껴지고 숨 쉬는 게 힘들었다. 추운 겨울 밤 버스정류장에서 집에 오는 어두컴컴한 길에서 심장을 부여잡으며 추위 서러움 두려움과 싸웠다. 스트레스가 쌓이자 가족 친구 지인들에게 짜증을 내는 일도 다반사였다. 한 번은 별 것 아닌 일에 크게 짜증을 내는 내 모습을 보고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꿈많던 소년의 모습을 한 나는 지금의 나를 향해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했다.
견디기 힘들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좀 더 나은 직장을 찾아, 뜻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몇 차례 이직을 했지만 이직은 더 이상 답이 아니었다. 스스로 공간을 만들지 않는 한 내가 뜻을 펼칠 공간은 없었다.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일을 그만둬야만 했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절실한 마음으로 결단을 내렸다. 출사표를 던졌다. 사표였다.
27살에 일을 처음 시작해 30대를 송두리째 관통하고 40대 중반에 들어설 시점까지 16년을 함께한 직업. 기자는 내 청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래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했을 때 단순한 퇴직의 의미를 넘어 내 청춘을 몸으로부터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렇게 학창시절 찬란히 빛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인생 1막은 쓸쓸히 막을 내렸다.
곪은 상처를 도려낸 자리는 쓰렸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만 견디기 힘들었다. 마음에 빨간약이라도 발라줘야 할 것 같아서 닥치는 대로 힐링이 될만한 책을 읽고, 강의를 찾아 들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듣게 된 ‘좀 놀아본 언니들’ 장재열 대표 강의에서 그는 “회사가 싫어 그만두는 사표가 아닌 세상을 향한 나만의 출사표를 던지라”고 했다. 그 말이 확 와 닿았다.
그러고보니 출사표 안에는 사표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일단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위해 나가려면(出) 사표(辭表)를 던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난 출사표(出辭表)를 통해 출사표(出師表)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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