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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이방인 Oct 06. 2020

깊은 밤 혼잣말

feat. 얄궂은 빗소리

새벽 2시를 지나는 시간, 뇌가 필요 이상으로 활성화된다. 머리 위로 트인 창을 두드리며 떨어지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탓할 수 있는 비라도 내려주니 마음은 달래어진다.


더 깊은 잠에 취하고 싶은 바람과는 달리 뒤척임으로 분주해지는 몸. 어느 순간 나의 뇌는 전신의 신경을 깨웠고, 말똥말똥 칠흑 같은 천정을 응시하던 두 눈, 기어코 주변에 낮은 조명을 밝히기에 이른다.


치료제의 부작용으로 활동량이 급감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부쩍 피로감에 민감해졌다. 이른 잠을 청하는 날이 잦아진다. 하지만 숙면을 취하기보다 밤새 뒤척임으로 분주하고, 현실도피성 꿈에 시달리는 횟수 또한 늘어난다. 누워 보내는 시간은 연장되지만 머리는 말끔해지지 않는다. 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신호도 분명치 않다.


무엇이 두려운 걸까?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기억은 희미해졌어도 분명 꿈 많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직장 생활의 비중이 컸던 그 시기에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달렸지만 더 좋은 것을 취하고자 하는 욕심을 '미래'라는 단어를 내세워 멋지게 포장한 것이었을 뿐 대책 없이 살았다.


내 집 장만은 물려줄 자식도 없는데 굳이 은행 수익에 기여할 이유 없다며 진즉 접었다. 독일 연금시스템을 맹신하는 남편 탓으로 돌리며, 그 가락에 장단을 맞추어 살다 보니 은연중 인생 모토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젊은 순간들을 즐기자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살기 위해 벌어 왔고, 번 만큼 즐기며 산 인생이었다.


중년으로 접어든 이래, 소망은 해마다 소박해져 간다. 청승스러워지지 않을 만큼만 진전되기를 바라는 초조함은 덤이다.


명품으로 치장하는 즐거움도 병 앞에선 덧없어졌고, 기미 걱정하던 오픈카보다 주차 수월한 아담한 차가 편해졌다. 민낯은 마스크가 가려주니 피부과 시술도 부질없다 느껴지고, 화장품 욕심은 절로 증발된다.


오롯이 호흡하는 순간순간 감사하며, 특별하기보다 소소한 행복이, 남은 삶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것. 이 소망을 품고, 간곡히 두 손을 모두어 본다.

평범하기가 특출 나거나, 모자라기보다 어려운 법. 하나의 큰 행복보다 잦은 소소한 행복 낚기가 훨씬 힘든 법. 따라서 이 소망은 지극히 평범하며, 소박한 것으로 과소평가된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사치이자, 큰 욕심이라는 사실로 인지되지만 병을 얻고 나니 이 소망이 진리라는 것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라니?

수술 성공 여부, 수개월 삼켜내야 할 인내의 시간들, 회복 후 직장으로의 복귀, 그 후 삶에 찾아올 변화 등 혼선을 일으킬 만큼 엉클어진 머릿속.

두렵지 않을 이유가 없다.

불안한 심리 상태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이 모든 현실을 자꾸 파묻으려니 악착같이 더 수면 위로 떠 오르려는 청개구리 심보. 누군가에게 걱정을 끼친다, 나를 동정할까라는 앞선 마음으로 감추려 말고,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드러냄으로 오히려 편해짐을 깨닫는다. 또한, 왜 그게 나여야 하는지 그 이유를 따지기보다 내게 더 소중한 그 누군가가 아님을 감사하며 직면한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 아픈 순간을 발판 삼아 축복으로 한 발짝 다가서리라는 믿음에 의지해 보자.




나의 고민의 무게와는 별개로 시계침은 동이 터올 시간으로 향해 쉼 없이 나아가고, 지난밤이 평안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아침을 맞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연의 순리처럼 지금 상황은 거스를 수 없는 하늘의 섭리임을 인정해야 편해질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여태 밀어내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치 못하고 있는 미련함.


얄궂게 창을 두드리던 빗소리마저 고요해진 이른 새벽. 외곽 전철 첫 차가 대기 지점으로 들어서는 소리. 비가 그친 공간을 메우는 거친 바람소리 사이로 주변 세상이 기지개를 켜며 천천히 가동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렇게 새 하루가 깨어나는 시각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늑장 부리며 덮쳐오는 잠에 취해 나 홀로 이 세상에서 도태되면 어쩌나 불면으로 지새운 밤이 잠시 원망스럽다. 밤은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원망은 접어두자. 그리고, 여명을 드리우며 찾아오는 아침, 새 하루 속으로 덤덤히 나아가 보자.


삶의 순리는 단순하다,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고, 안개가 밀려와도 언젠가는 시야가 맑게 개일 것이다.

잠시 자욱한 안개 뒤로 숨은 나의 미래가 내 생애 최고의 사랑스러운 순간들로 채워질지 알 수 없다. 겁이 나도 용기를 내어 나아가자.


나는 혼자가 아냐!


겉힌 안개 뒤에 존재하는 미래의 내가 귀띔해준다.

그래, 오늘도 힘껏 견뎌내 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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